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72 제30강(2) 셰익스피어 《오셀로》

 

2023.12.09 문학 고전 강의 — 72 제30강(2) 셰익스피어 《오셀로》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30강(2)

- 오셀로
“나는 태생과 핏줄이
왕족이다. 그리고 받을 만하다.
다른 장식이 없이도, 내가 얻게 된
이 자랑스러운 행운을. 왜냐면 자네한테 말하네만,
상냥한 데스데모나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면
난 갇힘 없이 자유로운 내 처지를
제한하고 가두지 않았을 게야.
바다를 내게 준다 해도.”
I fetch my life and being
From men of royal siege, and my demerits
May speak unbonneted to as proud a fortune
As this that I have reach’d: for know, Iago,
But that I love the gentle Desdemona,
I would not my unhoused free condition
Put into circumscription and confine
For the sea’s worth.(1.2.21-28)

“나의 자질, 나의 직책, 그리고 나의 깨끗한 양심이
나를 옳게 천명할 것이야.”
My parts, my title and my perfect soul
Shall manifest me rightly.(1.2.31-32)

- 브라반치오
“스스로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거라.”
For I'll refer me to all things of sense(1.2.64)

“세상 사람들한테 물어보거라.”
“Judge me the world”(1.2.72)

 

 

 

《문학 고전 강의》 지난 시간에는 1막 1장 읽었고 오늘은 1막 2장을 읽는다.  지금 《문학 고전 강의》 책으로 보면 283페이지부터이다.  1막 1장에서 이야고가 얘기를 했다. "호의라고는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 일반 서민용 뱃사공 한 놈만 딸려 실려가신 곳이, / 음탕한 무어 놈의 털투성이 품이라면━" 이렇게 데스데모나에 대해서 불쌍하다, 철없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이용해서 오셀로를 비난하는 데 그 이야기를 사용하고 있다. 1막 1장에서 "떠돌이 부랑자"라고 말을 한다. 오셀로에 대해 가능한 모든 악담을 다 하고 있다. 오셀로에 대한 이이고의 비난은 이렇게 보면 투명해 보인다. 도대체 이아고는 틈만 나면 비난하는 게 그가 하는 일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를 짜증스럽게 한다. 반대로 의도가 차라리 투명하니까 나을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수 있겠다. 뒤에서 꿍꿍하는 것보다 앞에서 얘기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도 틀린 얘기는 아니다. 어쨌든 관객들은 이 말을 듣고 오셀로와 데스데모나의 구체적인 것까지 상상하는데 이아고의 이 수사학이 되게 재미있다. 재미있다는 건 즐겁고 기쁘고 유쾌하다는 뜻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레토릭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한다. 뭔가 청중에게 이야기를 할 때는 감각적인 단어들을 사용해서 머릿속에서 그림이 그려질 수 있게 하라. 저처럼 추상적인 단어를 많이 쓰는 사람들은 굉장히 들으면 뜨끔하는 얘기인데 그렇게 얘기를 한다. 우리의 뇌는 그림을 그리면서 생각을 하니까 그림을 그리듯이, 여기에 보면 "털투성이 품"이라는 것들이 있다. "음탕한 무어놈의 털투성이 품이라면" 이런 표현들은 셰익스피어가 천재다 어쩌다 얘기하지만 곰곰이 읽어보면 보고 배울 만한 그리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수사학의 기본적인 어떤 방식들을 잘 사용하고 있다. 그런 것을 천재적인 것이기보다는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다 라고 말하는 게 훨씬 더 적절한 표현이겠다. 

어쨌든 지금까지 오셀로와 데스데모나에 대해서 이야고가 이야기한 것들은 아주 구체적인 것까지 상상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이아고의 수사적 표현 능력은 탁월하다고 말할 수 있다. 곧 셰익스피어의 능력이 탁월한 것이겠고 그다음에 그들의 본질에 들어맞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닌 것일 수도 있는데 어쨌든 그것은 사람들에게 오셀로가 보여주고 했던 모습은 아니었던 건 틀림없다. 그러나 관객은 이미 1막 1장에서 오셀로의 모습에 대해서 상상을 해버린 상태이다. 그래서 1막 2장의 오셀로가 이야고, 그리고 횃불을 든 시종들이 등장을 했을 때 좀 거리감이 느껴지게 된다. 이제 관객들은 털투성이 가슴을 가진 음탕한 무한 놈이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오셀로가 나타나서 잘난 척을 한다. "해볼 테면 해보라지. / 내가 베니스 공국에 해준 일이 얼만데 / 그의 불평증은 파묻힐걸." 여기서 이제 베니스 공국에 자신이 해준 것, 이런 말은 드라마니까 참고 견디면서 읽어야 된다. '누가 이런 말 하는 거 정말 못 견디겠더라'하는 얘기있는데 그런 얘기도 참고 견디고 읽어야 된다.  "나는 태생과 핏줄이 / 왕족이다. 그리고 받을 만하다. / 다른 장식이 없이도, 내가 얻게 된 / 이 자랑스러운 행운을. 왜냐면 자네한테 말하네만, / 상냥한 데스데모나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면 / 난 갇힘 없이 자유로운 내 처지를 / 제한하고 가두지 않았을 게야. / 바다를 내게 준다 해도."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이번에 지금 다시 읽어보니까 오셀로의 자기애라고 하는 것, 사실일 수도 있는 얘기라 해도 그것을 자기 입으로 얘기해버리면 자기애이다. 남이 얘기해도 좀 어색한 얘기를 자기 입으로 말하는 것은 나르시시즘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My services which I have done the signiory / Shall out-tongue his complaints" 그다음에 태생과 핏줄이 왕족이다. "I fetch my life and being / From men of royal siege, and my demerits / May speak unbonneted to as proud a fortune" 그다음 "I love the gentle Desdemona, / I would not my unhoused free condition / Put into circumscription and confine / For the sea’s worth." 여기까지 읽어보니까 자랑스러운 행운까지는 몰라도 1막 2장에 오셀로의 이 대사 전체를 읽어보니까 굉장히 자기애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제 캐시오와 관리들이 등장했을 때 "잠을 깬 아버지와 그 친구들입니다. / 들어가시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그럴 순 없네. 어차피 발각이 될 텐데. / 나의 자질, 나의 직책, 그리고 나의 깨끗한 양심이 / 나를 옳게 천명할 것이야."라고 얘기한다. 그러니까 굉장히 자기애가 강한, 책에 쓴 것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겠으나, 그것을 내보이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베니스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자만심의 표현일 수도 있다. 자기 스스로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언제 어디서나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건 저의 편견이라고 하는 것을 미리 말하면, 자신을 사랑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여기는 것, 사랑 자체에 빠져들었을 수도 있다. 자기 애가 지나쳤다 라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하게, 자존감과 자만심은 겉으로 드러내느냐 아니면 가슴에 품고 있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라고 하는 것을 늘 생각한다. 그래서 생색내지 않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하다. 이것을 메타적으로 생각해 보면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편견이 텍스트를 읽을 때 어떻게 작동하는가의 사례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 텍스트는 전혀 그런 의도가 없더라도 조금이라도 그런 기미가 보이면 그런 식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또 그것을 자신의 이해를 온통 정당화시키는 과잉 해석이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런 점에 대해서는 저도 얘기하면서 순간적으로 반성이 생겨나게 된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할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말하는 게 아니다. 뭔가를 얘기할 때 말하는 순간 말을 하면서 방금 전에 한 얘기를 회고적으로 반성하고 그다음에 앞으로 할 이야기를 미리 예견한다. 현재라고 하는 것은 과거로부터 쭉 이어져 온 하나의 연속체가 현재 속에 들어와 있다. 그렇게 응결되어 들어와 있는데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는 지금이라고 하는 것 안에서 과거를 순간적으로 계속해서 돌이켜보면서 지금을 이야기한다. 지금을 겪어가고 동시에 앞으로의 것을 예견한다. 지금 이렇게 《문학 고전 강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렇고 강의를 할 때도 그렇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방금 전에 내가 설명한 것들이 제대로 되었나가 순간적으로 검토가 되면서 지금 설명이 이어지고, 이 설명을 하면서 이것 다음에는 이걸 얘기해야지 라고 하는 것, 그러니까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항상 동시에 하나의 또 다른 메타 인지 속에서 계속 작동해 나간다.  

오셀로는 "나의 자질, 나의 직책, 그리고 나의 깨끗한 양심이 / 나를 옳게 천명할 것이야."라고 얘기를 한다. 나의 자질과 나의 직책과 나의 깨끗한 양심을 남들이 그것을 통해서 나를 보아달라는, 원하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것도 자부심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자만심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이제 브라반치오가 나타나서 이야기를 한다. "이런 더러운 도둑놈," 브라반치오는 이아고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옮기고 있다. 그다음에 "스스로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거라" 이렇게 얘기를 했으니까 브라반치오가 말하는 건 꼭 틀린 얘기는 아니다. 상식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조심스러운 말인데, 항상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컨텍스트 속에서 거론되기 때문에 브라반치오에게 상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오셀로에게 상식이라고 하는 게 무엇인가, 그리고 관객에게 상식은 브라반치오가 말하는 상식이 받아들여질 것인가, 오셀로가 말하는 "나의 자질, 나의 직책, 그리고 나의 깨끗한 양심이" 받아들여질 것인가, 이 간격이 크면 클수록, 아주 많이 커버리면 막장 드라마이고 적당히 긴장감을 줄 정도로 크면 굉장히 심장이 쫄깃해지는 드라마일텐데, 거리를 조절하는 것이 창작 예술가의 핵심이겠다. 지나치게 파격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것이 되면 우리는 그걸 막장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서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와 같은 작품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들은 그 당시에는 거의 막장이었겠다. 공공 장소에서 이렇게 할 수 있나, 사실 누드화라고 하는 것에 익숙했다 할지라도, 상식 파괴라고 하는 것이 그런 것이겠다. '오셀로도 이해는 가지만 브라반치오의 말도 상당히 공감해' 이 정도의 긴장감이 《오셀로》라고 하는 드라마를 사람들에게 심장이 쫄깃해지는 그런 느낌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브라반치오의 상식은 계속 이어진다. "그렇게 상냥하고, 아름답고, 또 행복했던 처녀로, / 결혼은 끔찍이도 싫어하며 / 이 공국의 부유한 곱슬머리 귀공자도 물리쳤던 그 애가," 상식을 가지고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다. "어찌 이러겠느냐, 사람들의 조롱을 사며, / 보금자리에서 달아나 너 같은 놈의 / 그을음투성이 가슴에 안기겠느냐━" 그리고 나서 브라반치오는 다시 한 번 상식을 확인한다. "세상 사람들한테 물어보거라," 세상 사람들은 베니스 사람들이다. 온 지구상의 전 사람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베니스 사람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브라반치오가 '우리 공국'이라고 하는 말, 세상 사람들, 우리 공국 이런 것들, 이 상식과의 거리.  

《오셀로》라고 하는 드라마는 비극이라기보다는, 오셀로에겐 비극이겠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이건 로맨스로 갈 만한 가능성이 아주 높은 그런 것이다. 브라반치오가 말하는 상식과 오셀로가 말하는 자부심, 관객들 중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 간격이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는 일단 봐줄 만하네 라고 갈 수도 있다. 1막 2장까지가 그것이 충돌나는 지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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