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73 제30강(3) 셰익스피어 《오셀로》

 

2023.12.12 문학 고전 강의 — 73 제30강(3) 셰익스피어 《오셀로》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30강(3)

- 오셀로에 대한 공식적 인정과 자기 서사
공작. “용감한 오셀로”
Valiant Othello(1.3.48)
오셀로. “내가 나를 변호하는 일

내 사랑의 전체 경로”
In speaking for myself.

Of my whole course of love(1.3.89-91)
- 데스데모나의 공언
“제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제 주인의 본성 바로 그것이었죠.
저는 그분의 심성에서 오셀로라는 형용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명예와 그분의 용감한 자질에
제 영혼과 운명을 바쳤던것입니다.”
my heart's subdued
Even to the very quality of my lord:
I saw Othello's visage in his mind,
And to his honour and his valiant parts
Did I my soul and fortunes consecrate.(1.3.252-256)

 

 

 

《오셀로》의 1막 3장을 주로 분석하고 있는 《문학고전강의》 제30강 얘기를 마치겠다. 앞서서 보았듯이 오셀로는 자기 애가 있는 사람이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굉장히 예뻐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예뻐하려고 한다면 몇 가지 조건이 있다. 떳떳하게 예뻐하고 싶으면 남에게 인정을 받아야 된다. 이건 굉장히 상식적인 것인데 남들이 인정 안 해주고 자기 혼자 자기가 예뻐하고 있으면 우리는 그런 걸 자뻑이라고 얘기한다.  지난 시간에도 말했듯이 오셀로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측면이 있다. '뭐 나 정도면 충분하지 않냐, 게다가 나는 태생과 핏줄이 엄청난 사람이야' 이렇게 얘기했는데 혼자만 그렇게 떠들고 있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런데 애초에 사람이 태어나서 쭉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거나 또는 어떤 특정한 집단 속에서 생활을 하거나 하지 않는다면 그런 것조차 생기질 않는다. 《방법서설》에 보면 데카르트적 자아라고 하는 나오는데, 난롯가에 앉아서 데카르트가 뭔가 정신을 차리고 성찰하는 부분이 나온다. 데카르트가 좀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전쟁터에서 막 정신없이 싸우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건데, 그런 데카르트적 자아Cartesian self라고 하는 것은 애초에 없다,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의 self-identity는 외부에서 어떤 환경 속에서 또는 그동안 그가 만났던 사람들 속에서 그것이 외부의 데이터가 나에게 주어지면서 그 데이터가 나의 기질과 융합하고 또 그것에 대해서 자기가 반성하고 회고해보고 의지를 발휘해 보고 하는 가운데 생겨나는 것이다 라고 본다.  자기가 자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측면이 있다 하는 것도 결국 다른 사람이 칭찬해줬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게 아닐까 한다. 하여튼 우리는 분석적으로는, 사실이 아니라 해도, 어떤 범주를 세 개를 가질 수 있다.  자기 스스로가 자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측면이 하나 있고, 그다음에 실제로 그러한가. 그런데 실제로 그러한가 라고 하는 건 in practice이다. 현실적으로 그런가. 남들이 보기에도 그런가, 그러니까 공적인 영역에서 인정받는 측면이라고 하는 것도 인간 집단 속에서 실제로 그러한가. 이 세 가지 측면을 일단은 이 방법적으로 나눠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이다. 오셀로는 태생과 핏줄이 그러하다 라고 말했는데 이제 이 사람이 베니스 공국의 공식적인 자리에서, 1막 3장이 공공 회의실에서 얘기가 시작이 된다. 그러니 이 사람 인생에서는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본다.  

A council-chamber. The DUKE and SENATORS sitting at a table; OFFICERS attending. 기가 막힌다. 그 장면에서 오셀로는 이제 딱 한마디를 공작으로부터 듣게 된다. "용감한 오셀로. 곧장 장군을 보내야겠소. Valiant Othello, we must straight employ you," valiant라는 것은 brave 정도가 아니다. brave는 대담한 정도이지만 valiant는 용맹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더 붙일 필요가 없이 오셀로가 얼마나 뿌듯하겠는가. 오셀로는 자기가 태생과 핏줄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장군으로서 이렇게 되었다고 하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일단 오셀로는 "용감한 오셀로Valiant Othello"라고 인정을 받았다. 그런데 브라반치오는 어떠한가. 완전 불쌍해져 버렸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제 오셀로가 길게 얘기를 한다. 이 장면이 바로 운문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오셀로의 "내가 나를 변호하는 일 In speaking for myself"이다. "내가 나를 변호하는 일은. 하지만, 인내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 솔직하고 꾸밈없는 이야기를 들려드리리다. / 내 사랑의 전체 경로에 대해서. In speaking for myself. Yet, by your gracious patience, I will a round unvarnish’d tale deliver / Of my whole course of love;" 여기서 오셀로는 완전히 기고만장 정도까지 갔다. 오셀로는 이걸로 이제 다 된 것이다. 브라반치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애초에 없었을 것 같고, 공작 그다음에 카운실에서 council-chamber에서DUKE와 SENATORS에게 인정을 받았으니까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누구에게 인정받느냐 이것이 굉장히 사람에겐 중요하다. 이게 굉장히 필요하다. 인정받는 상대를 누구로 하느냐가 그 사람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 준다.  우리 인간은 방법적으로는 분석을 하기 위해서 그런 범주를 설정할 수는 있겠지만 데카르트적 자아Cartesian self 하는, 외부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온전한 의미에서의 자기라고 하는 것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없다. 인간은 직립보행을 시작한 이래로 인간의 모든 그 행위는 문화의 산물이다 라는 것이 제가 가지고 있는 편견이다. 본성이라고 하는 건 사실 우리가 알아내기가 어렵다. 태어나자마자부터 자연 속에서 산다 해도 그건 본성이 아니다. 자연적인 natural이라고 하는 단어에 대해서 저는 지극히 회의적이다. 그런데 어쨌든 누구에게 인정을 받느냐 라고 하는 것이 오셀로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다. 사람들 모두에게 다 중요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서 제가 《문학 고전 강의》를 썼는데 이 책을 쓰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모두 다 인정을 받고 싶다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상 사람들이 다 읽을 수도 없는데 당연히 불가능하다. 토니 주트는 모든 것의 역사를 쓸 수 없다고 얘기했다. 모든 것의 역사를 쓸 수가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나의 책을 읽힌다는 건 불가능하다. 누구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가, 사람들이 나를 많이 알아주면 좋겠다 라고 할 때 사람들 안에는 누가 들어가는가. 적어도 나는 요러요러한 사람에게는 인정을 받고 싶다. 이게 사실 정직하고 정확한 표현이지 않겠는가. 저는 책을 쓸 때 꼭 한 명 정도의 실제로 제가 아는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그 사람에게 읽히고자 한다 라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책을 이렇게 쓴다. 그러면 내가 쓴 책에 대해서 그 사람이 읽고 요러요러한 정도까지 이해를 하면 그걸로 만족한다.  아주 많은 사람이 나를 인정했으면 좋겠다 라고 하면 그런 판타스틱한 목적을 위해서 모든 게 수단화된다. 오셀로는 그런 사람에 비하면 낫다. 베니스 공국에서 인정받고 그다음에 데스데모나의 사랑을 얻으면 된 것이다. 누구에게도 인정받는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게 되면 그것으로써 이제 인간의 사회적 생명social life은 소진되는 것이다. 

어쨌든 내가 나를 변호하는 일In speaking for myself가 오셀로의 자기 서사인데, 이 자기 서사를 베니스 공국 회의실에서 하고 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겠는가. 그런데 브라반치오는 그것에 대해서 계속해서 아니다 라고 말한다. 브라반치오의 말이 사실 틀린 건 아니다. 자기 딸 데스데모나가 나이, 조국, 명성을 버리고 오셀로와 사랑에 빠진 건 브라반치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이제 공작이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단언하는 것으로는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라고 말한다.  상원 의원도 "정직하지 않은 강제 수단으로 / 이 젊은 처녀의 애정을 제압하고 독을 탔나요, / 아니면 영혼이 영혼에게 전하는 / 아름다운 대화와 요청으로 애정을 얻었나요?" 이건 뭐 물어보나 마나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오셀로가 대답하는 것보다도 데스데모나가 대답하는 것이 더 정확한 답이다. 오셀로가 "그녀는 내가 겪어온 위험들 때문에 나를 사랑했오소. / 그리고 나는 그녀가 이것들을 측은해하므로 그녀를 사랑했지요. / 이것이 내가 사용한 유일한 마법이오." 뭐 이런 말은 일단 빈말일 수 있다. 그러면 데스데모나의 말을 들어봐야 된다는 것이다. "제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 제 주인의 본성 바로 그것이었죠. my heart's subdued / Even to the very quality of my lord:" quality 라는 단어가 나오면 이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 보여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헌정사Dedica에서 군주의 자질qualita을 얘기하는 부분이 있다.  그 시대의 이러한 단어들은 어떤 의미로 쓰였는가도 알아야 한다. "저는 그분의 심성에서 오셀로라는 형용을 보았습니다. I saw Othello's visage in his mind," visage 라는 게 얼굴인데, in his mind, 그러니까 이제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그의 심성이 합치되더라, 그 심성에서 얼굴을 보았다 라는 것을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명예와 그분의 용감한 자질에 / 제 영혼과 운명을 바쳤던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말은 '바쳤다'이다. 이번에 이 단어를 새삼스럽게 유심히 보게 된다. "And to his honour and his valiant parts / Did I my soul and fortunes consecrate." valiant 라는 단어는 처음에 공작이 용감한 오셀로Valiant Othello라고 얘기를 했는데 그 부분과 같다.  consecrate는 바쳤다는 뜻인데, 사전을 찾아보면 (종교 의식을 통해) 축성하다, (빵과 포도주를) 성별(聖別)하다 그리고 (사제 등으로) 서임하다라는 뜻이 있다. Merriam-Webster 사전에서 보면 to make or declare sacred, to devote to a purpose with or as if with deep solemnity or dedication 라고 나와있다. 그러니까 최고급이 아니라 최고의 수위를 가진 단어이다. 그러면 데스데모나가 이 단어를 말한 것은 단지 헌신 정도가 아니라 고백의 끝판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데스데모나는 전쟁터까지 따라가겠다고 말하니까 이제 브라반치오는 미치겠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마지막으로 악담을 하나 딱 남긴다. "그 애를 잘 살피게. 무어 인. 보는 눈이 있다면. / 자기 아버지를 배반한 애야. 그리고 자네도 그럴 수 있어." 이게 1막 3장에 나오는데 5막 2장에서 오셀로가 그 말을 그대로 되풀이한다.  "하지만 그녀는 죽어야 해. 아니면 더 많은 사내를 배반할 테니까." 아버지를 배반했고 나를 배반했으니까 그게 이제 사내라고 하는 것으로 일반화된다. 

어쨌든 일단 지금 오셀로의 자기 서사 그리고 남에게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얘기 그리고 오셀로와 데스데모나의 사랑에서 데스데모나의 고백, 말 그대로 드라마틱한 만큼 그 이후의 전개에서, 드라마의 공식이라는 게 있는 것처럼, 두 사람은 어떻게든 파멸적catastrophic으로 끝장이 나겠구나 하는 걸 예상할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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