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사와라 히로유키: 오스만 제국 ━ 찬란한 600년의 기록

 

오스만 제국 - 10점
오가사와라 히로유키 지음, 노경아 옮김/까치

서문
서론 제국의 윤곽

제1장 변경의 신앙 전사들 ━ 봉건적 후국 시대 : 1299?-1453
1. 아나톨리아 북서부라는 무대
2. 오스만 집단의 기원과 그 시조 오스만
3. 14세기의 영토 확장
4. 번개왕 바예지드 1세의 영광과 몰락왕의 어머니로 선택된 노예
5. 공위 시대와 그후의 부흥

제2장 “세계의 왕”으로 군림한 군주들 ━ 집권적 제국 시대 : 1453-1574
1. 정복왕 메흐메드 2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2. 성자왕 바예지드 2세
3. 냉혹왕 셀림 1세
4. 장엄한 시대 : 술레이만 1세의 반세기
5. 셀림 2세와 대재상 소콜루의 시대

제3장 조직과 당파의 술탄 ━ 분권적 제국 시대 : 1574-1808
1. 새 시대의 개막 : 분권화의 진전
2. 왕위 계승과 왕권의 변화
3. 대재상 쾨프륄뤼의 시대
4. 18세기의 번영
5. 근대 제국이 될 준비 : 셀림 3세와 니잠 제디드 개혁

제4장 전제와 헌정을 오간 술탄 겸 칼리프 ━ 근대 제국 시대 : 1808-1922
1. 마흐무드 2세 : “대왕”, “이교도의 제왕”, 그리고 “이슬람의 혁신자”
2. 탄지마트 개혁
3. 압둘하미드 2세의 전제 시대
4. 제2차 입헌정
5. 제국의 멸망

결론 제국의 유산

후기
참고 문헌
연표
역자 후기
색인

 


15 오스만튀르크
이 나라는 흔히 "튀르크(Türk)" 혹은 "오스만 튀르크(Osman Türk)"라고 불린다. 주로 서유럽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는데, 다른 나라에서도 이 이름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튀르크인은 몽골 고원에서 유래하여 기원전 3세기경 역사에 등장한 유목 민족이다. 그들은 9세기부터 이슬람 세계에 군인 신분으로 유입되기 시작했고, 점차 세력을 강화한 결과 10세기에 처음으로 튀르크인을 왕으로 삼은 무슬림 왕조를 세우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점차 서쪽으로 전진하여 아나톨리아에 진입했고, 튀르크계 부족의 지도자인 오스만이라는 인물이 나라를 건국하기에 이르렀다.  

왕가가 튀르크계 명문가에서 출발했다는 역사의식은 당시 오스만 제국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었다. 특히 주변에 다수의 튀르크계 후국과 공국이 존재했던 16세기 초까지는 왕가에 고귀한 튀르크 혈통이 흐른다는 사실을 강조해야만 왕조의 권위를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튀르크성"은 16세기 중엽 이후에 그 빛을 잃는 듯하다가 19세기 말 이후 튀르크 민족주의 조류가 강해지면서 다시금 중시되기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의 공통 언어가 처음부터 끝까지 튀르크어였던 점도 강력한 민족적 구심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이 튀르크성은 오스만 제국의 시작과 끝에 상당히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므로 "튀르크" 혹은 "오스만 튀르크"라는 호칭이 한편으로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이 호칭을 쓰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나라가 스스로를 "튀르크"라고 칭한 적이 없었던 데다가, 오스만 제국의 역사에서 튀르크계가 대다수였던 시기가 극히 짧았기 때문이다. 오스만 제국은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제국으로서의 역사를 유지해왔다. 제국을 구성하는 주요한 민족만 해도 알바니아인, 세르비아인, 체르케스인, 그리스인, 아람인, 쿠르드인, 아르메니아인 등 매우 다양했다. 

물론 한 민족이 지배자가 되어 다른 여러 민족들을 지배했던 나라는 오스만 제국뿐만이 아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튀르크계가 아닌 다른 민족이 엘리트층을 차지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튀르크의 고귀한 혈통을 자랑했던 왕가만 보아도, 36대나 되는 역대 군주들 중에서 초기의 몇몇만이 튀르크계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튀르크"라는 민족명으로 이 나라를 부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17 그렇다면 오스만 제국 사람들은 자선의 나라를 무엇이라고 불렀을까? 국민들이 불렀던 이름이야말로 가장 타당한 국호일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 역시 그다지 간단하지 않다. 오스만 제국의 공식적인 명칭은 이 나라의 역사가 거의 끝나가던 19 세기 말, 즉 1876년이 되어서야 그 시기에 제정된 헌법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헌법은 그 나라를 "오스만의 나라(Devlet-i Osmaniye)"라고 칭했다. 그때까지 이 나라에는 정식 명칭이 없었다. 물론 정식 국호라는 관념 자체가 근대의 산물이므로 그 사실 자체는 그다지 놀랍지 않다. 

그러므로 정식 명칭은 일단 제쳐놓고, 공문서에 어떤 명칭이 쓰였는지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오스만 제국의 공문서에서는 대개 자국을 "최고의 국가(Devlet-i aliye)"라고 일컫는다. 또한 자국의 국토를 "신이 지키는 땅"으로 종종 표현했다. 그러나 "최고의 국가"나 “신이 지키는 땅"은 현대의 역사 연구자가 쓰기에는 다소 부적절한 용어이다. 

따라서 이번에는 역사서에서 어떤 명칭이 쓰였는지를 살펴보자.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 그중에서도 제국 전반기를 다룬 역사가들은 "오스만 왕가(왕조)의 역사(Tevarih-i Ali Osman)"라는 문구를 자주 썼다. 즉 그들에게 오스만 제국은 "오스만 왕가” 혹은 "오스만 왕조"였던 것이다.  

23 시대를 넷으로 나누다
오스만 제국의 600년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시대별 특징을 고려하여 역사를 서술할 필요가 있다. 다행히 오스만 제국의 역사의 시대 구분은 연구자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이 책에서는 그 합의에 따라서 제국의 역사를 4개의 시대로 나누었고(단, 시대별 명칭은 저자가 붙였다) 한 시대에 하나의 장을 할애했다. 

봉건적 후국 시대: 오스만 후국은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에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초기 오스만 후국은 약탈을 일삼는 불량배 집단에 불과했지만 무슬림 왕조들의 통치체제를 서서히 변형시켜 받아들이면서 국가로서의 체제를 정비해갔다.

국가의 중심은 언제나 오스만 왕가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지방 호족들과 구(舊) 튀르크계 후국 세력 등 준독립 집단이 왕가를 떠받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이 시대의 오스만 왕가는 많은 봉건 제후들 중에서 가장 유력한 존재에 불과했다. 

집권적 제국 시대: 오스만 왕조는 메흐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원정을 실행한 1453년 이후 술탄 중심의 중앙집권화를 추진함으로써 "제국"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위엄 있는 모습을 갖추게 된다. 실제 변화는 점진적이었지만, 그래도 그 원정이 변화의 기원이 된 것은 틀림없다. 그로부터 100년이 넘도록 후대에 "황금시대"라고 불리는 풍요와 안정이 이어졌다. 아랍 대원정을 달성한 셀림 1세, 빈 포위를 감행한 술레이만 1세의 치세도 이 시대에 포함된다. 

이 시대의 술탄은 상비군인 예니체리 군단을 비롯한 노예 출신 신하들을 거느리며 절대적인 전제군주로 군림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서로 다른 신하들을 통제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았다. 

분권적 제국 시대: 이 시대가 언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있지만, 이 책에서는 그 시점을 무라드 3세가 즉위한 1574년으로 보았다. 과거의 연구자들은 대개 이 시대, 즉 16세기 말 이후 200년 동안을 오스만 제국의 정체기 혹은 쇠퇴기로 본다. 무능한 술탄들이 다스린 탓에 제국이 혼란해지고 영토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반대로, 이 시대가 변혁기였을지언정 쇠퇴기는 아니었다는 새로운 평가가 정설이 되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 시대는 수도 이스탄불에 있던 유력자들이 이전에 술탄이 마음껏 휘두르던 권력을 일정 부분 제약하고 자신들의 당파를 통해서 국정을 운영하기 시작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에는 이 체제가 파벌 대립을 격하시켜서 정국이 혼란해지기도 했지만, 18세기 이후에는 사회가 안정을 되찾아 제국의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번영의 시대가 이어졌다. 

근대 제국 시대: 중동사, 이슬람사를 연구했던 과거의 역사가들은 나폴레옹이 이집트로 쳐들어온 1798년부터 이슬람 세계에 근대화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서양적 관점에 치우친 의견이다. 이집트가 오스만 제국에 속해 있던 중요한 지역이기는 했지만, 이 사건이 본국에 미친 영향은 그다지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는 마흐무드 2세가 즉위하여 근대화를 주도하기 시작한 1808년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리고 그 끝은 제국이 멸망한 1922년이다. 이 책에는 이후 1924년의 칼리프 제도 폐지에 관한 이야기도 약간의 후일담으로 소개되어 있다. 

178 그러나 아흐메드 1세가 즉위했을 때, 그의 동생 무스타파는 관행대로 처형되지 않았다. 새로운 술탄에게 아직 아들이 없었기 때문인지 고위 관리들이 무스타파를 처형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178 이 선례는 이후 오스만 왕가의 왕위 계승 관행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형제 살해"의 관행이 폐지된 것이다. 이후 형제 살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술탄이 즉위하자마자 바로 처형이 집행되는 일은 없어졌다. 술탄으로 즉위한 후에 기회를 보아서 형제를 처형하려고 할 때에도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슬람 장로를 필두로 한 고위 울라마들이 종종 그 중심에 있었다. 이슬람법상 형제 살해가 불법이라는 사실도 그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살해당하지 않은 현 술탄의 형제는 궁전의 한구석에 격리되어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채 지내야 했다. 이것을 "새장(Kafes) 제도"라고 한다. 그러나 현 술탄의 결정에 따라서 얼마간의 자유가 주어지기도 했고, 그들 중에서 왕위 계승 후보로 지목된 왕자가 있을 경우 그에게는 충분한 교육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한 없이 남자 왕족이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새장 안의 왕자는 아들을 낳지 말아야 했다. 이 규제는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19세기 후반의 압둘아지즈 시대에야 해제되었다. 

310 오스만 제국의 오랜 존속을 가능하게 한 것은 탁월한 왕위 계승 체제와 유연한 권력 구조였다. 또한 술탄을 비롯한 제국인들의 다층적이고 다양한 소속 의식도 거기에 한몫 했다. 근대 이전의 오스만 사회는 이런 동상이몽 속에서 느슨한 통합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오스만 제국의 근대란 오스만 제국의 이러한 탄력성과 다층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을 의미한다. 즉 근대 이전 제국의 특징이었던 유연한 구조가 균일하고도 동질적인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세계적인 흐름을 만나자 기능 부전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예니체리로 대표되는 다양한 특권 단체가 배제되고, 이슬람의 비호하에 불평등하게나마 공존했던 비무슬림 신민이 민족주의에 눈떠서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된 것이다. 스즈키 다다시는 이처럼 제국이 해제되고 붕괴하는 과정을 “이슬람의 집에서 바벨탑으로"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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