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보댕: 국가론 (책세상문고)

 

국가론 - 10점
장 보댕 지음, 임승휘 옮김/책세상

들어가는 말
서문
제1장 좋은 국가가 지향하는 주요 목적은 무엇인가
제2장 주권에 관하여

해제- 장 보댕과 근대 주권론의 탄생
1. 법철학자이자 현실 정치가 보댕
2. <국가론>의 탄생 배경- 종교 전쟁과 국가의 승리
3. 국가와 주권
(1) 국가란 무엇인가
(2) 절대적이며 영속적인 힘, 주권
(3) 주권의 분할 불가능성
(4) 신과 주권자- 주권의 세속성
4. <국가론>, 절대주의의 바이블?
5. <국가론>의 현대적 의미


더 읽어야 할 자료들
옮긴이에 대하여

 


해제

127 보댕이 독창적이라고 평가받는 또 다른 점은, 두 시대가 교차하는, 다시 말해 정치와 세계에 관한 두 가지 개념과 두 가지 사상이 교차하는 시기를 산 인물로서 그가 이 양자 곧 전통과 진보를 아우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129 프랑스의 16세기는 르네상스의 시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정치적 분열로 얼룩진 시대이기도 했다. 역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가 지적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종교적 불경건과 비도덕성 그리고 개인주의는 분명 과장된 면이 없지 않지만,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은 분명 비극적이었다. 

130 에라스무스, 라블레, 몽테뉴가 묘사했듯이 인간은 가능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불가능한 존재, 그래서 역설적인 존재였다. 

131 《국가론》이 출간된 것은 프랑스의 종교 내전이 절정에 달했던 때다. 구성원들의 조화로운 결합을 보장하는 국가의 구조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의 결과인 이 책에서 그는 정치와 시민 사회의 조화를 위한 종교적 토대를 자신의 국가 이론에서 배제했다. 

132 무명의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사 루터가 95개 항목의 반박문을 독일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내건 지 2년 지난 후인 1521년에 파리의 소르본 대학은 루터의 주장을 정죄했고, 1523년에 프랑스에서 첫 번째 루터파 순교자가 발생했다. 

132 최초의 공식적인 분쟁이 시작된 것은 아마도 1534년 10월 17일 밤일 것이다.  

132 프랑수아 1세는 이제 파리 민중이 요구하는 루터파의 탄압에 나섰고, 1535년 1월에 35명의 루터파를 화형에 처했다.

135 1572년 신교파의 우두머리인 잔 달브레와 앙투안 드 부르봉 사이에서 태어난 앙리 드 나바르가 마르가리타 드 발루아와의 정략 결혼을 받아들임으로써 일시적인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곧 이어진 성 바르텔르미 축일의 대학살로 다시 전쟁은 장기화되었다. 

136 1593년 7월 25일 앙리 드 나바르, 즉 앙리 4세는 마침내 파리 북부의 생드니에서 그의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개종을 단행했다.

137 전쟁의 진정한 승자는 바로 국가였다. 종교 전쟁의 모태로부터 자라나 이제 국왕의 개인적 양심과 신앙을 희생시킨 주인공은 다름 아닌 프랑스 국가였다. 

210 주42. 성 바르텔르미 축일의 대학살 사건은 1572년 8월 23일 자정부터 24일 아침 사이에 파리에서 벌어진 신교도에 대한 대량 학살 사건을 말한다. 같은 달 18일에 거행된 마르가리타 드 발루아와 앙리 드 나바르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에 모인 신교도 인사들이 주된 희생양이 되었다. 

210 주43. 정치파는 종교 전쟁기에 신교도인 왕위 계승자 부르봉 왕가의 앙리 드 나바르에게 맞서 결성된 과격한 가톨릭 세력인 신성 연맹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제3의 당이다. 이들은 앙리 4세의 종교에는 반대했지만 왕위 계승자로서의 그의 적법성은 인정했다. 당시 신성 연맹은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에게 접근해 필요하다면 에스파냐 왕실의 인물을 프랑스의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온건 가톨릭 세력은 이러한 움직임에 경악하면서 프랑스의 고유한 갈리아주의를 고수하고자 했고, 결국 종교 전쟁에 대한 정치적 해법, 즉 앙리 4세의 개종을 주장했다. 

211 주44. 대다수 신교도들에게 성 바르텔르미 축일의 대학살은 1560년대 말 이래 왕정이 취해온 방향을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왕정은 가톨릭 세력의 편을 듦으로써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포기하고 진정한 신앙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보여준 것이었다. 학살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왕을 자기 편으로 이끌려는 모든 희망이 좌절되자, 신교도들은 1560년대에 기즈 공과 같은 그릇된 정치가들에게 만 책임을 전가하고 국왕에 대해서는 변함없는 충성을 보였던 것과는 달리 정치적 저항 이론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론가와 팸플릿 저자들은 독창적인 정치종교 사상을 발전시켰고, 이들은 모나르코마크monarchomaque━문자 그대로 '왕에 맞서 싸우는 자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주권 사상을 비판하면서 왕권신수설을 거부하고 국왕절대주의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리고 주권은 왕과 인민 사이에, 아니면 최소한 왕과 엘리트 사이에 맺어진 계약이라는 중세적 사유에 기반을 둔 주권 이론을 내세우고 권력을 남용하는 폭군으로서의 국왕에 대한 반란을 정당화했다. 프랑스 신교도 측의 대표적 이론가로는 오트망, 베즈, 뒤플레시 모르네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신교도인 앙리 드 나바르가 왕위 계승자로 등장하면서 모나르코마크 이론은 일순간 가톨릭에서도 채용되었고, 이를 대변한 파리의 설교가 부셰는 교회의 국왕폐위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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