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리엄 M. 레디: 감정의 항해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4. 3. 11.
감정의 항해 - 월리엄 M. 레디 지음, 김학이 옮김/문학과지성사 |
서언
제1부 감정이란 무엇인가
제1장 인지 심리학의 답변
제2장 인류학의 답변
제3장 이모티브
제4장 감정의 자유
제2부 역사 속의 감정: 1700~1850년의 프랑스
제5장 감상주의의 만개 1700~1789
제6장 프랑스혁명과 감상주의 1789~1815
제7장 자유로운 이성과 낭만적인 열정 1815~1848
제8장 민사소송 속의 감정
제9장 결론
부록
A. 『법원소식』 샘플 속의 이질적인 소송들
B. 베르사유 민사법원 샘플 속의 이질적인 소송들
미주
참고문헌
옮긴이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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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해제
57 감정이란 무엇일까? 철학자 강신주는 최근의 저서 『강신주의 감정수업』의 「프롤로그」 첫머리에서 소설 『롤리타』의 주인공을 놓고 감정을 논한다. 소설에서 50대의 중년 남자 험프리는 열두 살 소녀를 사랑한다. 그러나 "사회"는 "근친상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사랑을 "단죄"했고 험프리를 "저주"했다. 험프리가 그 위험성을 몰랐을 리는 없다. 강신주 역시 험프리가 처음에는 "자신의 감정을 이성의 힘으로 억누르려고 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다만 "감정은 용수철"과 같아서 "누르면 누를수록 더 큰 반발력을 갖기 마련"이고, 따라서 험프리의 노력이 실패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강신주는 단언한다. 인간에 대한 "억압이란 본질적으로 감정의 억압"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에서 거의 최초로 감정을 본격적으로 논한 그 저서에서 감정인 이성, 그리고 이성적 판단에서 도출된 의지와 대립적인 것으로 상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579 과연 감정이 이성 및 의지와 대립되는 것일까? 최근에 일본 총리 아베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한국인들의 감정에 상처를 주었다. 많은 한국인들은 그런 아베를 미워한다. 그런데 그 미움은 한국인들의 의지 및 이성과 어긋나는 것일까? 결단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그런 아베를 기꺼이 증오하기로 의지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의지는 2차 대전 동안 태평양전쟁에 동원된 위안부들의 고통과 일본이 20세기 전반기에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자행한 각종의 억압에 대한 기억과 판단에서 도출된 고유한 합리성을 지닌다. 감정은 이성 및 의지와 대립되기는커녕 전적으로 합치되는 것이다. 게다가 아베에 대한 한국인들의 미움은 집단적이다.
581 사실 이 책의 가장 빛나는 부분은 프랑스혁명에 대한 해석보다는 서양 하계의 감정 이론을 정리하고 자기 자신의 이론을 전개한 제1부이다.
581 감정은 같은데 지표는 다른 경우도 있다. 예컨대 곰에 대한 공포는 아드레날린을 혈관에 내보내지만, 암에 대한 공포는 그렇지 않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정교한 신체적 변화라곤 하더라도 그것이 감정의 표식일지언정 감정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581 그렇게 하여 생물학적인 "기본 색"의 존재가 입증되었다. 그러나 감정은 그렇지 않았다. "기본감정"의 보편적 실재가 명백하게 입증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개별 감정들 간의 관계는 문화에 따라 지극히 다양했다. 인도네시아의 한 부족의 경우 행복을 나타내는 두 개의 단어 중에서 하나는 '자부심' 및 '고집'과 결합되어 있었고 다른 하나는 '행운'과 '만족'과 '안전'과 결합되어 있었는데, 자부심과 고집은 행운 및 안전과 대단히 소원했다. 다시 말해서 그 부족의 감정 의미론은 오늘날 한국인이나 미국인의 감정 의미론과 너무도 달랐던 것이다.
582 서양의 전통적인 감정론은 물론 현재 한국의 감정론과 너무도 달리, 의분은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도 보유할 수 있 수 있는 감정이었고, 정치적 권위에 기꺼이 복종하는 감정인 '공포'는 의분만큼이나 귀중한 감정이었다. 그런 예는 무수히 많은데 만일 감정 의미론이 문화별로 상이하다면 감정 자체가 문화별로 상이한 것은 아닐까? 인류학은 그렇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태평양의 타이티 부족에게는 '슬픔'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었다.
583 타이티 부족에게 슬픔이라는 단어가 없고, 그에 따라 우리가 슬퍼하는 상황에서 그들이 우리와 전혀 다른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은, 한 인간의 내밀한 감정이 그가 속하는 공동체의 문화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을 말해준다. 인류학의 현장 연구는 그러한 사례를 무수히 발견했다. 타이티 족과 이팔루크 원주민들만이 아니라 태평양의 누쿨라엘라에족, 이집트의 아울라드 알리족, 필리핀의 일롱고트족, 인도 타밀어 지역의 여러 크리슈나 종파들 등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시, 연극, 편지 쓰기, 인간사냥의 축제, 종교 예배 등등의 공동체적인 정치 · 사회 · 문화적 일상을 통하여 공동체의 감정 규범을 내면화하고 실천하고 있었다. 인류학은 감정이 조형적造型的인 것이라는 점을 입증해낸 것이다.
584 인지 심리학은 그런 실험을 통하여 감정에 대하여 여러 가지 사항을 확립했다. 감정은 상황에 대한 인지이다. 다만 그것은 하의식적인, 즉 무의식적인, 혹은 의식에 입장하지 못한 인지이다. 감정이 상황 및 의식과 무관한 듯이 발동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리고 감정은 종종 인지 부하로 인하여 실패한 심리 통제의 결과물이다.
585 감정이 의지와 반하는 듯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해명되지 못한 점도 있다. 왜 어떤 감정은 강렬하고 어떤 감정은 약한가? 인지 심리학은 답한다. 갑정에게는 한편으로 '강도intensity'가 다른 한편으로 쾌감/불쾌감, 즉 '정서가valence; 情緖價'가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585 정보라는 개념이 의식과 갖고 있는 긴밀한 관련성 때문에 레디는 정보 대신 '생각 재료'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인간이 특정한 상황에 놓이면 목표가 정해지고 그에 따라 생각 재료가 활성화된다. 이때 생각 재료가 특정한 방향으로 활성화되도록 하는 것이 '주의 attention'이다. 다만 생각 재료는 어차피 너무나 많다. 활성화된 생각 재료만 해도 너무나 많다. 따라서 활성화된 생각 재료 중에서 일부만이 의식에 입장한다. 의식에 채 입장하지 못한 활성화된 생각 재료, 바로 그것이 감정이다.
586 그 순간 내면에 있던 모든 생각 재료들이 재배열되고, 활성화되었지만 의식하지 못하는 생각 재료들이 그를 희열과 절망과 안심과 불안 속에 몰아넣는다.
587 생각 재료를 활성화시키고 감정을 발동시키는 것을 레디는 "이모티브emotive"라고 칭한다. 레디 스스로가 개념을 만든 것이다.
587 인간은 이모티브를 어디서 얻는가? 공동체, 즉 해당 사회의 문화와 의례와 종교적 실천과 담론에서 얻는다. 따라서 감정은 사회와 강력하게 묶여 있다. 정의상 감정은 개개인의 내밀한 세계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사회적이다. 따라서 감정을 장악하는 공동체는 안정을 구가한다. 그러므로 모든 체제는 각종의 이모티브를 공급한다. 레디는 그러한 체제를 "감정체제 regime of emotions"라고 칭한다. 개개인은 체제가 공급한 이모티브를 말하고 실천함으로써 사회의 준칙에 따르려 한다. 레디는 이를 "감정적 노력"으로 칭한다. 물론 앞서 사랑의 예가 보여주듯이, 이모티브를 말하거나 실천하여도 감정이 만들어지기는커녕 그것이 부인될 수도 있다. 레디는 그런 상태를 "감정고통"이라 칭한다. 체제는 이모티브를 공급하고 일탈자에게는 감정고통을 가함으로써 체제의 통합을 만들고 유지한다.
602 레디는 감정이 인지이면서도 어떻게 합리적인 인지 및 의지와 대립될 수 있느냐는 핵심적인 문제에 제대로 답했다. 그리고 그는 이모티브, 감정체제, 감정고통, 감정적 노력 등의 개념을 개발하여 감정이론과 감정사에 다가갈 지름길을 열어놓았다. 내가 이 책을 번역한 이유는 이 책을 통하여 한국의 감정 연구가 돌연히 본격적인 학문적 궤도에 올라설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학문적인 관심을 떠나서라도 이 책은 독자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재미있게 성찰하도록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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