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L. 샤이러: 제3제국사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4. 3. 24.
제3제국사 - 전4권 - 윌리엄 L. 샤이러 지음, 이재만 옮김/책과함께 |
머리말
제1부 아돌프 히틀러의 등장
제1장 제3제국의 탄생
제2장 나치당의 탄생
제3장 베르사유, 바이마르, 맥주홀 폭동
제4장 히틀러의 정신과 제3제국의 뿌리
제2부 승리와 공고화
제5장 권력에 이르는 길: 1925~1931
제6장 바이마르 공화국의 마지막 나날: 1931~1933
제7장 독일의 나치화: 1933~1934
제8장 제3제국의 삶: 1933~1937
제3부 전쟁에 이르는 길
제9장 첫 단계: 1934~1937
제10장 이상하고 불길한 막간: 블롬베르크, 프리치, 노이라트, 샤흐트의 몰락
제11장 병합: 오스트리아 강탈
제12장 뮌헨에 이르는 길
제13장 체코슬로바키아의 소멸
제14장 폴란드의 차례
제15장 나치–소비에트 조약
제16장 평화의 마지막 나날
제17장 제2차 세계대전 개시
제4부 전쟁: 초기 승리와 전환점
제18장 폴란드 함락
제19장 서부의 앉은뱅이 전쟁
제20장 덴마크와 노르웨이 정복
제21장 서부전선 승리
제22장 바다사자 작전: 영국 침공 좌절
제23장 바르바로사: 소련의 차례
제24장 전세 역전
제25장 미국의 차례
제26장 대전환점: 1942년 스탈린그라드와 엘 알라메인
제5부 종말의 시작
제27장 신질서
제28장 무솔리니의 실각
제29장 연합군의 서유럽 침공과 히틀러 살해 시도
제6부 제3제국의 몰락
제30장 독일 정복
제31장 신들의 황혼: 제3제국의 마지막 나날
맺음말
감사의 말
초판 출간 30주년 기념판 후기
옮긴이의 말
주
참고문헌
인명 찾아보기
머리말
5 나는 단명한 제3제국의 전반기에 이 대단하지만 당혹스러운 나라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독재자로서 권력을 굳혀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생활하고 일하기는 했지만, 2 차대전 말기에 역사상 유례없는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굳이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책으로 쓰려고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5 그 사건이란 독일 외무부, 육해군, 국가사회주의당, 하인리히 힘러의 비밀경찰을 포함해 독일 정부와 그 모든 부처의 기밀문서가 대부분 입수된 것이다. 내가 알기로 그렇게나 방대하고 귀중한 자료가 당대 역사가들의 손에 들어간 것은 일찍이 전례가 없는 일이다.
6 베를린에서 지시한 명령에 따라 소각되기 직전에 미국 제1군이 하르츠 산맥의 여러 성과 갱에서 입수한 독일 외무부 기록물 485톤은 제3제국 기간만이 아니라 바이마르 공화국을 거쳐 비스마르크의 제2제국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기간을 망라한다. 전쟁이 끝나고 나치 문서가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의 미국 육군 창고에 밀봉된 채로 산더미처럼 쌓겨 있던 여러 해 동안, 미국 정부는 포장상자를 열어 그 안에 무슨 역사적 관심거리가 있는지 살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8 비밀리에 내려진 중대 결정, 음모, 배신, 그런 결과를 낳은 동기와 탈선, 주요 행위자들이 배후에서 수행한 역할, 그들이 자행한 테러의 규모와 수━이 모든 것, 아니 그 이상의 것들은 독일의 기밀문서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대체로 우리의 눈길을 벗어나 있었다
9 이렇게나 일찍 입수한 비할 데 없는 자료를 가지고서, 나치 독일의 생활상에 대한 기억, 아울러 아돌프 히틀러를 비롯해 이 나라를 통치한 자들의 면모와 행위, 본성에 대한기억을 가지고서, 나는 어쨌거나 제3제국의 흥망의 역사를 써보겠다고 결심했다.
9 역사서로 손꼽히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투키디데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건을 이해할 만한 나이에 사건의 정확한 진실을 알아내고자 주의를 기울이면서 이 전쟁을 처음부터 끝까지 체험했다."
9 그럼에도 이 책에서 나는 엄격히 객관적인 자세로 사실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하고 전거를 일일이 밝히려고 애썼다 그 어떤 사건 , 장면 인용도 상상의 산물이 아니다. 하나같이 문서나 목격자의 증언 혹은 나 자신의 관찰에 근거한다. 사실을 알 수 없어 어느 정도 추측에 기댄 대여섯 사건의 경우에는 그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제1부 아돌프 히틀러의 등장
21 괴벨스는 피곤했지만 행복한 기분으로 새벽 3시에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일기를 휘갈겨 썼다 "마치 꿈만같다 ... 동화 같다. 새로운 제국이 탄생했다. 14년간의 노력이 승리로 보답받았다. 독일 혁명이 시작되었다!
21 1933년 1월 30일에 탄생한 제3제국은 히틀러의 호언장담에 따르면 천년을 이어갈 것이었으며 나치 용어로 흔히 '천년제국'이라 불렸다.
21 신비로운 섭리와 수 세기에 걸친 경험에 의해 주조된 독일 국민 안에서 그가 자신의 사악한 목적을 구현할 수 있는 자연적 도구를 발견했던 것은 사실이다.
22 독일인들 대다수에게 히틀러는 진정으로 카리스마적 아우라를 지닌 — 또는 조만간 지니게 될 — 지도자였다. 그들은 마치 히틀러가 신이 내린 판단력이라도 갖추고 있는 양 폭풍의 12년 동안 그를 덮어놓고 추종할 터였다.
23 아돌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하급 세관원이 세 번째 결혼에서 얻은 셋째 아들이다. 아돌프의 아버지는 사생아였으며 39세가 되기까지 시클그루버라는 모친 성을 사용했다.
24 그곳 주민들은 북쪽의 체코 농민들처럼 대체로 무뚝뚝한 편이었다. 히틀러 부모의 사례처럼 근친혼이 흔하고 사생아 출산이 잦았다.
27 머지않아 아돌프 히틀러의 어머니가 될 새색시 클라라 푈츨은 이때 25세이고 남편은 48세였는데,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27 알로이스와 클라라는 육촌지간이었으며. 그런 이유로 앞에서 언급했듯이 결혼에 즈음해서 교회에 특별허가를 신청해야 했다.
28 프란치스카 마첼스베르거가 낳은, 아돌프의 이복형 알로이스와 이복 누나 앙겔라도 무사히 성장했다. 기품 있는 여성으로 자란 앙겔라는 라우발이라는 세무관과 결혼했다가 남편이 죽은뒤 빈에서 가정부로 일했고, 하이덴의 정보가 정확하다면, 한동안 유대인 자선시설에 서 요리사로 일하기도 했다.
29 앙겔라에게는 금발의 매력적인 딸 겔리 라우발이 있었는데,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히틀러는 평생 그녀하고만 진실하고 깊은 애정 관계를 맺었다.
45 《나의 투쟁》에서 밝혔듯이, 그는 행여 프롤레타리아트 신분으로, 육체노동자 신분으로 미끄러져 내려갈까 봐 전전긍긍하는 프티부르주아지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 훗날 그는 그때까지 지도자없이 낮은 급료를 받으며 무시당하던 광범한 화이트칼라층을 토대로 삼아 국가사회주의당을 조직하면서 이 두려움을 활용했다. 이 두려움은 또한 수백만에 달하는 이 화이트칼라층 사이에서 적어도 사회적으로는 자신들이 ‘노동자’보다 낫다는 환상을 조장했다.
51 그리고 사회민주당의 성공을 설명하는 세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첫째 그들은 어떻게 대중운동을 일으키는지 알고 있었다. 대중운동 없이는 그 어떤 정당도 무력하다. 둘째, 그들은 대중 사이에서 구사하는 선전술을 터득한 상태였다. 셋째 그들은 그가 말하는 "정신적·육체적 테러"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55 요컨대 바로 여기에 훗날 히틀러가 독일에서 자신의 정당을 조직하고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활용한 이념과 수법이 담겨 있다. 그의 독창성은 1차대전 이후 우파 정치인 가운데 유일하게 그런 이념과 수법을 독일 정세에 적용했다는 데 있다.
68 독일인의 잘 속는 특성은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자주 언급하는 주제다. 그것은 히틀러가 머지않아 최대한으로 활용할 특성이었다.
80 이렇게 특이한 부적응자들이 한데 모여 국가사회주의를 창시하고 부지불식간에 하나의 운동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 운동은 향후 13년 사이에 독일 전역을 휘어잡고 유럽 최강 세력이 되어 독일을 제3제국으로 이끌 터였다. 정신이 혼란스러운 자물쇠 수리공 드렉슬러가 씨앗을 뿌렸고, 주정뱅이 시인 에카르트가 '정신적' 토대의 일부를다졌으며, 괴짜 경제학자 페더가 이데올로기로 통하는 것을 내놓았고, 동성애자 룀이 군부와 퇴역군인의 지지를 얻어냈다.
99 루터, 칸트, 괴테, 실러 , 바흐, 베토벤, 브람스를 세상에 내놓은 민족의 독재자가 되고자 질주하던 초기에 히틀러가 자기 주위에 모은 무리는 바로 이런 자들이었다.
112 무엇을 그렇게 참을 수 없었을까?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로 하여금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영토의 일부를 벨기에에, 이전 세기에 비스마르크가 슐레스비히 공국과 싸워 획득한 영토를 ― 주민투표를 거친 후에 ━ 덴마크에 반환하도록 했다. 또한 독일이 폴란드 분할 때 차지했던 영토의 일부를 그마저도 주민투표를 거친 후에 폴란드 측에 반환하도록 했다. 이는 독일인을 가장 격분시킨 조항들 중 하나였는데, 발트해로 통하는 회랑지대를 폴란드에 넘겨줌으로써 동부 프로이센을 조국으로부터 분리하게 될 뿐 아니라 폴란드인을 열등한 인종으로 업신여기고 있었기 때문기다. 이 못지않게 독일인을 격분시킨 조항은 전쟁을 개시한 책임이 독일에 있다고 규정하고 카이저를 위시한 '전범' 800여 명을 인도하도록 요구한 것이었다.
181 전쟁과 정복, 권위주의 국가의 절대권력에 대한 찬미, 아리아인 즉 독일인이 지배인종이라는 맹신, 유대인과 슬라브인에 대한 증오, 민족주의와 인도주의에 대한 경멸 등이 히틀러의 이념을 이루고 있었다. 하나같이 독창적인 것이 아니었다.
제2부 승리와 공고화
221 독일 내 다른 정당들에 비해 나치당은 뒤가 구린 인물들을 단연 많이 끌어들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온갖 뚜쟁이, 살인자, 동성애자, 알코올 중독자, 갈취범 등이 마치 천성에 맞는 안식처인 양 나치당으로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히틀러는 자신에게 유용하겠다 싶으면 그런 자들이라도 개의치 않았다.
425 정치적·문화적·경제적 자유를 그토록 가볍게 단념했던 사람들은, 비교적 소수를 제외하면,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지도, 투옥의 위험을 감수하지도 않았다.
제3부 전쟁에 이르는 길
553 힘러에게 기회가 왔다. 아니, 힘러는 모략에 시동을 걸어 기회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깡패들이 득시글거리는 친위대나 국가사회주의당의 세계에서도―적어도 1938년에는―도무지 믿기 어려울 정도로 터무니없는 모략이자, 어쨌든 나름대로의 전통을 지닌 독일 육군에서는 지지할 리 없는 모략이었다. 블롬베르크 스캔들에 연이어 발생하여 훨씬 더 강력한 폭발을 일으킨 이 두 번째 스캔들은 장교단을 뿌리까지 뒤흔들며 그들의 운명을 결정했다.
562 1938년 2월 4일의 겨울날까지 5년 동안 육군은 히틀러와 제3제국을 전복할 만한 물리적 힘을 가지고 있었다. 1937년 11월 5일 히틀러가 제3제국과 국민을 어디로 이끄는지 알았을 때 육군은 왜 전복을 시도하지 않았을까?
563 "이 남자 — 히틀러 — 는 좋든 나쁘든 간에 독일의 숙명이다. 지금 그가 구렁텅이로 들어서려 한다면… 우리 모두를 끌고 들어갈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613 저는 한 청년을 이곳[오스트리아]에서 독일 제국으로 보내 그곳에서 성장하게 하고 그 국가의 지도자로 끌어올려 이 고국을 다시 제국으로 인도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신의 뜻이었다고 믿습니다. 세상에는 더 높은 차원의 질서가 있으며 우리 모두는 그 질서의 대행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3월 9일 슈슈니크 씨가 협정을 깼을 때, 그 순간 저는 신의 섭리의 부름이 저에게 와 닿았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사흘 동안 일어난 일은 이 신의 섭리가 실현된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615 처음 몇 주 동안 드러난 빈 나치 들의 행패는 내가 독일에서 목격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심했다. 그야말로 사디즘의 광란이었다. 날마다 다수의 유대인 남녀가 길거리에서 슈슈니크의 흔적을 지우고 배수로를 청소했다. 그들이 몸을 쭈그린 채 작업을 하는 동안 돌격대원들이 옆에서 감시하며 조롱하고, 주위에 모여든 군중이 악담을 퍼부었다.
621 병합 성공 이후 히틀러는 주저하는 독일 장군들이 더 이상 자신의 길을 막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설령 의구심이 남아 있었다 해도 프리치 사건의 결말로 말끔히 사라졌다.
623 프리치 장군, 그리고 그가 상징하던 모든 것이 곧 독일인의 삶에서 사라져갔다. 그런데 그가 상징한 것은 결국 무엇이었는가? 12월에 프리치가 친구 마르고트 폰 슈츠바어 백작부인에게 쓴 편지는 다른 수많은 장군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애처로운 혼란에 빠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1067 정오 무렵에 나는 빌헬름슈트라세의 총리 관저 앞에 서 있었다. 그때 갑자기 확성기를 통해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식이 발표되었다. 250명쯤━그 이상은 아니었다━되는 사람들이 그곳에 햇살을 받으며 서 있었다. 모두가 주의 깊게 들었다. 발표가 끝났을 때는 중얼거리는 소리조차 없었다. 그들은 가만히 서 있었다. 망연자실한 채로 히틀러가 지신들을 세계대전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1079 그럼에도 1939년 9월 3일 오후 9시, 히틀러가 베를린을 떠나던 순간에 독일해군은 공격에 나섰다. 경고도 없이 U-30 잠수함이 헤브리디스 제도에서 서쪽으로 약 320킬로미터 해상에서 리버풀을 출발해 몬트리올로 향하던 영국 여객선 애서니아호를 어뢰로 격침했다. 승객 1400명 가운데 미국인 28명을 포함해 112명이 목숨을 잃었다. 2차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제4부 전쟁: 초기 승리와 전환점
1137 나는 역사적 사태의 유망한 경로를 분명하게 인식했고, 가차없이 결정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도 지니고 있었다.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마지막 요인으로는 나 자신을 꼽을 수밖에 없다. 나는 대체 불가능한 요인이다. 어느 군인도 민간인도 나를 대신할 수 없다. 앞으로 암살 시도가 반복될지 모른다. 나는 나의 지성과 결단의 힘을 확신한다. … 이제껏 나만큼 성취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오늘날 세계가 우리를 증오할지라도, 나는 독일 국민을 아주 높은 데까지 끌어올렸다. 제국의 운명은 오직 나에게 달려 있다. 나는 그 운명에 걸맞게 행동할 것이다.
1143 우리는 폴란드를 재건할 의사가 없다… 독일 수준의 모범 국가는 없을 것이다. 폴란드 지식층이 통치계급으로 자리잡는 것은 막아야 한다. 낮은 수준의 생활이 유지되도록 해야 한다. 값싼 노예들…
1145 육군 참모총장의 이 짤막한 일기는 독일 장군들의 도덕관의 핵심을 드러낸다. 그들은 폴란드의 유대인, 지식층, 성직자, 귀족을 싹 없애버리는 '대청소'에 진지하게 반대할 마음이 없었다.
1146 소련이 동부에서 자기 몫을 차지하고 독일이 서부에서 예전의 지방들과 약간의 추가 영토를 공식적으로 병합한 이후에 남은 폴란드 땅에는 총통의 10월 12일 법령에 의해 폴란드 총독령이라는 명칭이 붙었고, 한스 프랑크가 총독에, 빈의 부역자 자이스-잉크바르트가 부총독에 임명되었다. 프랑크는 나치 지식인 깡패의 전형이었다. 그는 법대를 졸업한 직후인 1927년에 입당했고, 나치 운동의 법률적 권위자로서 금세 두각을 나타냈다. 두뇌 회전이 빠르고, 정력적이고, 법률 뿐 아니라 문학전반에 걸쳐 박식하고, 예술 특히 음악에 몰두한 그는 나치당이 집권한 뒤 법조 부문에서 권력자가 되어 먼저 바이에른 법무장관, 뒤이어 제국 무임소장관, 독일 법률학회와 법률가협회 회장을 지냈다 음흉하고 말쑥하고 활기찬 사내, 다섯 아이의 아버지인 프랑크는 지성과 교양으로 자신의 원초적인 광신을 얼마간 상쇄했고, 그 덕에 이 시점까지 히틀러의 주변인물들 중에서 그나마 덜 혐오스러운 축에 들었다. 하지만 문명인이라는 겉치장 이면에는 냉혹한 살인마가 도사리고 있었다. 뉘른베르크 법정에 제출된, 프랑크가 자신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마흔두 권의 일기는 어두운 나치 세계의 가장 섬뜩한 문서 중 하나로, 이 싸늘하고 효율적이고 무자비하고 피에 굶주린 한 인간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준다. 그 일기에는 그의 야만적인 발언이 빠짐없이 담긴 것으로 보인다.
1306 말하기는 쉬워도 행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실제로는 히틀러도, 최고 사령부도, 육해공 참모본부도 영국과의 전쟁을 어떻게 치러 승리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1940년 한여름에 그들은 눈부신 성공을 바탕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군사국가 독일이 거둔 역사상 최대의 군사적 승리를 활용하려는 계획도 의지도 거의 없었다. 이것은 제3제국의 커다란 수수께끼 중 하나다, 히틀러는 군사력의 정점에 선 채 유럽 대륙 대부분을 발 밑에 둔 상황에서, 승승장구하며 피레네 산맥에서 북극권 한계선까지, 대서양에서 비스와 강까지 장악한 군대가 추가 지시를 기다리며 휴식을 취하는 상황에서, 장차 전쟁을 어떻게 이어가고 승리로 끝맺을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이제 원수장을 휘두를 12인을 비롯한 장군들도 마찬가지였다.
1307 독일군은 소문난 군사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대전략 개념이 없었다. 그들의 시야는 유럽 대륙에서 인접국들과 치르는 지상전으로 국한되었다━예로부터 줄곧 그랬다. 히틀러 자신이 바다에 질색했고 휘하의 훌륭한 지휘관들도 바다에 무지했다.
1442 헤스의 동기는 분명했다. 진심으로 영국과의 강화를 원했던 것이다. 그는 독일이 승전할 것이고 당장 강화를 체결하지 않으면 영국을 파괴하리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물론 다른 동기도 있었다. 전쟁 탓에 헤스의 권세는 빛을 잃었다. 전시에 히틀러의 대리로서 나치당을 운영하는 것은 따분하고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이제 독일에서 중요한 일은 전쟁과 외교였다. 총통의 관심은 거의 전쟁과 외교로만 쏠렸고, 두 과제를 담당하는 괴랑 리벤트로프, 힘러, 괴벨스, 그리고 장군들이 각광을 받았다. 헤스는 좌절감과 질투심을 느꼈다.
1492 실제로 이 과대망상증 독재자는 곧 역대 독일 제국들을 통틀어 어느 누구도━황제든 국왕이든 대통령이든━보유하지 못했던 권한을 합법화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더욱 키웠다.
1493 실로 이돌프 히틀러는 독일의 지도자에 그치지 않고 '법' 자체가 된 것이다. 심지어 중세에도, 더 거슬러 올라가 야만적인 부족사회에서조차 명목상으로나 법률상으로나一실제상으로나 이 정도로 전제적인 권한을 행사한 독일인은 일찍이 없었다.
1602 제6군의 영광과 끔찍한 고통은 이제 끝이었다. 1월 30일, 파울루스는 히틀러에게 무전을 쳤다. "최종 붕괴를 24 시간 이상 막을 수 없다." 이 메시지를 받은 최고사령관은 스탈린그라드의 불운한 장교들에게 일련의 진급사령을 남발했는데, 그런 영예가 그 피로 물든 자리에서 영광스럽게 죽겠다는 그들의 결의를 다져주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히틀러는 요들에게 "독일의 군사사에서 원수가 포로로 잡힌 기록은 없다"라고 말하고는 무전으로 파울루스에게 모두가 선망하는 원수장을 수여했다. 무려 117명의 다른 장교들도 한 계급씩 진급시켰다. 소름 돋는 죽음의 의식이었다.
1606 엘 알라메인 전투 및 영미군의 북아프리카 상륙과 함께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2차대전의 대전환점이었다. 아시아와의 경계인 볼가 강까지 유럽의 대부분과, 거의 나일 강까지 북아프리카를 휩쓸었던 나치 정복의 힘찬 물결은 이제 퇴조하기 시작했고 다시는 되살아나지 못할 터였다.
1607 스탈린그라드의 눈밭과 북아프리카의 작열하는 사막에서 마침내 나치의 원대하고 끔찍한 꿈이 박살났다. 파울루스와 로멜의 재앙으로 제3제국의 명운이 다했을 뿐 아니라, 히틀러와 친위대 폭력배들이 정복지에서 분주히 수립해온 섬뜩하고 그로테스크한 이른바 신질서도 파멸할 운명이었다. 마지막제 6부 제3제국의 몰락으로 넘어가기 전에 그 신질서가―이론과 야만적인 실제에 있어서―어떠했고, 유서 깊고 문명화된 유럽 대륙이 가까스로 벗어나기 전까지 잠시 경험한 초기의 악몽 같은 참상이 어떠했는지 살펴보는 편이 좋겠다. 그 참상을 겪고서 살아남거나 그것이 끝나기 전에 학살당한 선량한 유럽인들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신질서의 시기는 이 책에서도 제3제국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어두운 장일 수밖에 없다.
제5부 종말의 시작
1611 신질서Neuordnung를 위한 포괄적인 청사진이 작성된 적은 없지만, 압수된 문서와 실제로 일어난 사태를 보건대 히틀러가 자신이 원하는 질서를 아주 잘 알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나치가 지배하는 유럽에서 독일의 이익을 위해 자원을 착취하고, 주민들을 독일인 지배인종의 노예로 삼고, “바람직하지 않은 부류” — 무엇보다 유대인이지만 동방의 숱한 슬라브인, 특히 지식인층까지 포함해 — 를 절멸시키려는 질서였다.
1612 여러 민족이 제공할 수 있는 우리 유형의 좋은 혈통은 받아들일 것이고, 필요하다면 그들의 자녀를 납치해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 양육할 것이다. 그 민족들이 풍요롭게 살든지 아니면 짐승처럼 굶어 죽든지 간에 나는 그들이 우리 문화를 위한 노예로서 필요하다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1619 원칙적으로
지금 우리는 다움과 같이 할 수 있도록 우리의 필요에 따라 케이크를 자르는 과제에 착수해야 한다.
첫째, 지배하고,
둘째, 관리하고
셋째, 착취한다.
1681 1939년에는, 히틀러의 군대가 점령한 지역들에 유대인이 약 1000만명 거주하고 있었다. 어떤 추정치를 택하더라도 그들 중 거의 절반이 독일에 의해 절멸된 것이 확실하다. 이것은 청년 시절 빈에서 밑바닥 생활을 하던 나치 독재자가 별안간 떠올린 이상한 생각, 그가 수많은 독일인 추종자에게 전달한―또는 그들과 공유한―생각의 최종 결과이자 경악스러운 대가였다.
1944 1944년 7월 20일의 반란이 실패한 것은 그저 육군과 민간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들 중 일부가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서툴렀고, 프롬과 클루게의 성격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고, 고비마다 음모단에 불운이 덮쳤기 때문이 아니다. 반란이 진압된 것은 장성이든 민간이든 이 대국을 운영한 사람들 거의 모두가, 그리고 제복을 입었든 독일 국민의 대다수가 혁명을 일으킬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전쟁의 비탄과 패전 뒤 외국에 점령당할 암울한 전망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들은 혁명을 원하지 않았다. 스스로 초래한 독일과 유럽의 퇴화를 견뎌내지 못한 국가 사회주의를 그들은 여전히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지지했으며, 여전히 아돌프 히틀러를 국가의 구원자로 보았다.
1851 히틀러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적어도 비독일인에게는—최면술을 통해 비범한 국민으로부터 마지막까지 충성과 신뢰를 얻었다. 그들이 마치 말 못하는 짐승처럼, 하지만 동물 무리에게는 없는 감동적인 신념과 심지어 열정까지 품은 채 히틀러를 맹종하여 낭떠러지에서 민족의 파멸로 나아간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제6부 제3제국의 몰락
1920 히틀러가 의도한 대로 유언장은 잔존하며 그의 다른 문서와 마찬가지로 이 흥망사에 중요하다. 유언장은 12년간 독일을 철권으로 통지하고 4년간 유럽 대부분을 지배한 사람이 그 경험으로부터 무엇 하나 배우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1946 12년하고 4개월 8일 동안 이어진 암흑시대, 독일 군중을 제외한 모두에게 암흑이었으며 이제 그들에게도 암담한 밤으로 끝나가는 시대와 함께 천년을 간다던 제국이 종말을 고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 제국은 이 위대한 민족, 재주가 많지만 너무나 쉽게 호도당하는 민족을 그들이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권력과 정복의 정점에까지 끌어올렸다가 역사상 거의 전례가 없을 정도로 갑작스럽고 완전하게 해체되었다.
맺음말
1950 히틀러의 나머지 측근들은 조금 더 살았다. 나는 그들을 보러 뉘른베르크로 갔다. 이 도시에서 연례 전당대회가 열릴 때 영광과 권력을 누리던 그들을 자주 본 적이 있었다. 국제군사재판의 피고석에 앉은 그들은
달라 보였다. 전혀 딴판이었다. 추레한 옷을 입고 맥없이 앉아서 초조하게 꼼지락거리는 그들은 더 이상 지난날의 거만한 지도부와 비슷하지 않았다. 시시한 어중이떠중이처럼 보였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저런 자들이 무시무시한 권력을 휘둘렀고 위대한 국가와 유럽 대부분을 정복했다는 것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1950 피고석에는 21 명이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봤던 때보다 35킬로그램을 줄인 괴링은 색이 바래고 계급장이 없는 공군 군복 차림이었고, 피고석에서 1 인자 자리를 배정받아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히틀러가 죽은 뒤 나치 위계에서 괴링의 위치에 대한 일종의 뒤늦은 인정이었다.
1952 히틀러의 초대 외무장관이며 확신과 청렴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구식 독일인 노이라트는 완전히 낙담한 듯했다. 슈페어는 그렇지 않아서, 모든 피고 가운데 가장 솔직하다는 인상을 주었고, 장기간의 재판 내내 정직하게 발언했으며, 자신의 책임과 죄를 회피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초판 출간 30주년 기념판 후기
1959 트레버-로퍼는 서평을 시작했다. "종말 이후 한 세대의 절반만 지난 시점에 … 그 역사를 쓰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제3제국의 경우 그 무엇도, 심지어 종말까지도 평범하지 않았다. 완전한 소멸과 함께 [히틀러의] 통치의 모든 비밀이 훤히 드러나고 모든 문서가 압수되었다. … 전과 달리 지금은 생존 목격자들과 역사적 진실이 한 점에서 만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역사가뿐이다.
1960 "이 책은 객관적인 방법, 확신에 찬 판단, 모든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결론을 제시하는 뛰어난 학술 저작이다."
1960 독일에서는 부드럽게 말해서 서평가들로부터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독일인은 도저히 자신들의 과거를 직시할 수가 없었다. 서독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를 필두로 책을 맹공격하고 저자를 비방했다. 아데나워는 "독일 혐오자"라고 불렀다. 책이 나치 독일을, 그리고 독일인이 인간 정신과 이웃과 유럽 유대인을 상대로 저지른 범죄를 객관적으로 다루었다는 이유로, 아울러 문서로 입증된 사실들이 스스로 말하도록 했다는 이유로 나는 독일의 격렬한 반발에 부딪혀 다소 움츠러들긴 했지만, 전혀 놀라지는 않았다.
1961 이제 사람들은 묻는다. 독일인은 변했는가? 서구의 많은 이들이 그렇다고 믿는 듯하다. 나 자신은 그렇게 확신하지 않으며 분명 나의 견해는 나치 시대에 독일에서 생활하고 일한 개인적인 경험으로 뒤덮여 있다.
1961 독일 문제의 해결책이 있을까? 아마도 있을 것이다. 재통일한 독일을 유럽 안보체계에 얽매여서 과거의 침공 정책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결박하는 것이다.
옮긴이의 말
1963 《제3 제국사》는 영어권에서 나치 독일을 다룬 대중 역사서를 대표하는 책이다. 1960년 10월 17일 초판이 출간되고 1년 만에 양장본과 보급판 각각 100만 부 이상 판매되었고, 1962년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축약판으로 연재되어 1200만 명의 독지에게 읽혔다.
1964 1932년 《시카고 트리분》에서 퇴사한 샤이러는 히틀러가 집권한 이듬해인 1934년에 유니버설 통신사의 베를린 지국에 채용되어 나치 독일을 본격적으로 취재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샤이러는 제국의회 의사당을 드나들며 히틀러의 연설을 꼬박꼬박 챙겨 듣는가 하면 자르 지역 반환과 라인란트 재무장 등 히틀러의 평시 성취를 보도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기간에는 독일 정부가 대외적 이미지 제고와 선전을 위해 유대인 박해를 감추고 있다고 폭로하는 기사를 썼다가 괴벨스의 선전부에 의해 공개 비판을 받고 독일에서 추방당할 뻔하기도 했다.
1968 샤이러는 독특한 방식으로 저술했다. 보통의 역사학자가 동료 연구자들의 참고문헌을 바탕으로 논제를 정하고 해석과 분석을 개진하는 식으로 쓴다면, 샤이러는 역사학자들의 저작을 참고하되 무엇보다 막 공개된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제3제국 시대라는 드라마의 주연들과 조연들, 단역들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도록 중점을 두었다.
1969 이 책의 읽는 독자라면 공감할테지만, 역사적 인물들이 눈 앞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듯한 생동감으로 다가온다.
169 끝으로, 그간 제기된 이 책에 대한 비판점 중 하나를 살펴보자. 바로 서술의 균형이 맞지 않고 중요한 빈틈이 있다는 것이다. 옳은 지적이다. 이 책은 균형 잡힌 통사가 아니다. 다시 말해 제3제국의 정치, 사회, 경제, 외교, 군사, 문화, 예술 등을 골고루 다루지 않는다. 이 책은 나치 독일의 고위정치, 외교 정책 군사적 사건에 편중된 '위로부터의' 통사다.
1970 제3제국 핵심 행위자들의 사고와 언행 감정을 밀착해 살펴보려는 독자에게는 오히려 장점일 수 있다. 다행히 《히틀러국가》, 《히틀러 I·II>, 《홀로코스트 : 유럽 유대인의 파괴 1·2>, 《나치 시대의 일상사》 등 내가 번역하면서 긴요하게 참고한, 나치 독일에 관한 명저들이 적잖이 번역되어 있으므로 이 책에서 다루지 않는 부분은 다른 독서를 통해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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