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프랭코판: 기후변화 세계사

 

기후변화 세계사 세트 - 전2권 - 10점
피터 프랭코판 지음, 이재황 옮김/책과함께

서론
1장 태초 이후의 세계 - 대략 45억 년 전부터 대략 700만 년 전까지
2장 인류의 기원 - 대략 700만 년 전부터 서기전 12000년 무렵까지
3장 인간과 생태의 상호작용 - 서기전 12000년 무렵부터 서기전 3500년 무렵까지
4장 초기 도시와 교역망 - 서기전 3500년 무렵부터 서기전 2500년 무렵까지
5장 분수에 넘치는 삶의 위험성 - 서기전 2500년 무렵부터 서기전 2200년 무렵까지
6장 첫 연결의 시대 - 서기전 2200년 무렵부터 서기전 800년 무렵까지
7장 자연과 신에 대한 관심 - 서기전 1700년 무렵부터 서기전 300년 무렵까지
8장 스텝 변경과 제국들의 형성 - 서기전 1700년 무렵부터 서기전 300년 무렵까지
9장 로마의 온난기 - 서기전 300년 무렵부터 서기 500년 무렵까지
10장 고대 말의 위기 - 500년 무렵부터 600년 무렵까지
11장 제국의 전성기 - 600년 무렵부터 900년 무렵까지
12장 중세 온난기 - 900년 무렵부터 1250년 무렵까지
13장 질병과 신세계의 형성 - 1250년 무렵부터 1450년 무렵까지
14장 생태 지평의 확대 - 1400년 무렵부터 1500년 무렵까지
15장 구세계와 신세계의 융합 - 1500년 무렵부터 1700년 무렵까지
16장 자연과 인간을 착취하다 - 1650년 무렵부터 1750년 무렵까지
17장 소빙기 - 1550년 무렵부터 1800년 무렵까지
18장 대분기와 소분기 - 1600년 무렵부터 1800년 무렵까지
19장 공업, 수탈, 자연계 - 1800년 무렵부터 1870년 무렵까지
20장 격동의 시대 - 1870년 무렵부터 1920년 무렵까지
21장 새로운 이상향 만들기 - 1920년 무렵부터 1950년 무렵까지
22장 지구 환경의 재편 - 20세기 중반
23장 불안의 증폭 - 1960년 무렵부터 1990년 무렵까지
24장 생태 한계의 끄트머리에서 - 1990년 무렵부터 현재까지
결론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도표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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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초기 도시와 교역망 - 서기전 3500년 무렵부터 서기전 2500년 무렵까지

134 커다란 광역 도시권이 시작된 곳은 토양 유형, 배수, 강수량, 기온, 심지어 고도도 모두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 초기 도시들은 '국한된 곳'에서 생겨났다. 다시 말해서 그곳들 자체는 풍성한 지역이지만 적대적인 지세(사막, 산, 바다 같은)에 둘러싸인 곳이었다. 따라서 도시(그리고 따라서 '문명')의 탄생을 추동하는 발동기는 주민들을 환경적으로 쾌적하고 생산적인 땅이라는 좁은 대역으로 밀어넣는 압력에 의해 동력을 얻어야 한다. 그곳은 생태 발자국을 확대하는 능력이 제한돼 있다. 다시 말해서 초기 도시들은 필요의 산물로서 생존이 가능하려면 협력이 필수적인 곳에서 생겨났다. 

136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는 서기전 3000년 무렵 몇몇 대규모 정착지가 물이 풍부한 지역이 아니라 대체로 큰 강에서 멀리 떨어진 일련의 충적평원과 분지에 세워졌다. 이 공동체들은 평등 사회였고 공동 생활을 지향했던 듯하며, 중앙의 지도부가 없고 지위 표시의 흔적이 별로 없었다. 

136 메소포타미아 남부는 달랐다. 그곳에서는 더 크고 더 복잡하고 더 위계적인 정착지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곳은 우르크였다. 

 

7장 자연과 신에 대한 관심 - 서기전 1700년 무렵부터 서기전 300년 무렵까지

195 환경 악화, 자원 과소비, 지속 불가능한 인구 유지 부담의 위험은 수천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도 인식하고 있었다.

195 예를 들어 〈아트라하시스 서사시〉는 생태경계를 그 한계 너머로 밀고 나아가는 데서 오는 취약성을 잘 알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196 가장 극적인 시도는 대홍수였다. 고고학 증거로 입증됐고, 아마도 후대의 이집트 기록의 바탕이 되고 기독교 성서에도 나오는 사건이었다. 

196 홍수 이야기는 극적인 것이었지만, 인구 과잉과 취약성의 연결은 강력한 것이었다. 자원 고갈, 환경 악화, 물리적 세계에 대한 인간의 개입이 미치는 영향에 대한 우려라는 더 큰 그림 안에서 적합한 것이었다. 

197 특히 문제는 과도한 관개로 인해 일어났다. 그것이 땅의 염분을 증가시켜 망가뜨렸다. 단기적인 이익을 얻으려 했다가 지속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땅을 손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208 온화한 날씨, 신의 은총, 좋은 지도자에 대한 보상은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뿌리가 깊은 곳이었다.

208 자연 질서와 힘의 통합은 3천 년 동안 중국의 정치철학 및 종교철학, 특히 제국의 정치 이념에서 근본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것은 사실상 황제의 역할을 좋은 결과에 합쳐놓았다. 환경 문제든 다른 것이든 말이다. 천명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배자는 잘 통치해야 했다. 이런 상황은 상반된 결과를 낳았다.  공이 있으면 풍요, 번영, 평화의 시기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불균형은 하늘의 질서가 교란됐다는 신호로 해석될 수 있었고, 따라서 처벌과 고난이 정당화됐다. 

215 불교는 오늘날 흔히 생태에 대해 인식하고 지속 가능한 환경을 생각했다고 해서 호감을 사고 유명해졌지만, 이는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기보다는 현대에 들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 초기 불교도들에게 자연계는 덧없는 곳이었다. 물리적 세계는 경이로운 곳이기보다는 인간의 삶과 마찬가지로 주로 "고통, 부패, 죽음, 무상함"과 관련된 곳이었다. 

219 영혼 불멸에 대한 관념, 윤회에 대한 관념, 선행에 대한 관념은 사람의 행동이 이 생애와 사후에 어떻게 평가돼야 하는지에 관한 더 광범위한 질문과 관계가 있다. 이 시기는 플라톤 같은 철학자들이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따라 보상받거나 처벌받는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224 유대교 사상의 가장 흥미로운 요소는 아마 도시 공간을 향해 드러낸 반감이었을 것이다. 도시가 아니라 사막이 신자들이 신을 직접 알 수 있게 되고 또한 신으로부터 검증을 받는 장소였다. 

224 신 자신이 목자로서 가축을 보살폈다. 가장 분명한 것이 〈시편〉 23편이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227 이는 서기전 6세기 신앙 체계의 공통적 특징이었다. 남아시아의 불교와 자이나교,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 동아시아의 공자와 노자 등의 가르침이 모두 그랬다. 중점은 단식, 금욕, 고행, 연민을 통한 절제와 욕망 억압. 탐욕, 방종, 소비를 줄이는 것이다. 

9장 로마의 온난기 - 서기전 300년 무렵부터 서기 500년 무렵까지

267 인간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물 부족이다.

269 전통적으로 지중해의 곡창이었던 이집트의 곡물 수확량이 급감했다는 기록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서기전 43년과 42년 모두 나일강이 범람하지 않은 결과였다. 

269 클레오파트라 여왕에게 꾸준히 가졌다. 이 요소는 프롤레마이오스 왕조의 붕괴, 로마의 이집트 합병, 로마가 제정으로 이행하는 순간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271 클레오파트라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패를 걸었다. 그의 군사적 실적과 대중성으로 판단할 때 투쟁에 나선 사람들 가운데 최고 유망주라고 생각했다. 대단히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결정이었다.  

271 클레오파트라와 이집트도 그와 함께 몰랐다.

271 여러 면에서 옥타비아누스의 출세는 로마의 정치적 기회주의의 걸작이었다.

271 그러나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로마와 그 시민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한 가지에 뛰어났다는 점이다. 그들은 적들에 비해 더 잘 조직되고 곤경에서 신속하게 빠져나올 줄 알았다.  

272 로마인들은 또한 운이 좋았다. 

272 기후 조건도 로마가 이웃, 한 칸 건넌 이웃, 더 먼 이웃들과 대결하고 있던 바로 그 시기에 이례적으로 좋았다.

272 이 시기는 '로마 온난기'로 알려지게 된다. 이 시기는 350여 년 동안 지속됐다. 정확히 로마가 지중해, 유럽, 북아프리카, 지중해 동안에서 최강자로 떠올랐던 시기다. 이 시기는 서기전 지난 4천 년 중에서 단연 가장 습한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지난 4천 년의 지중해 역사에서 단연 가장 생산성이 높은 시기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것이 남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농업 생산 증대에 이바지했고, 그것은 다시 인구 증가, 정복을 위한 인력, 안정성 개선, 그 과정에서 정치권력자들이 자기네의 권력을 정당화하고 강화했다. 

275 비슷한 팽창 과정이 일반적으로 기후 조건이 유리한 시기에, 긴 안정기에 일어난다는 것은 시사적이다.

275 서로 다른 성격의 제국 출현을 기후 때문에 돌리고 싶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각 정치체가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안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행정과 물류상의 기술을 개발했다는 사실이다.  

291 예를 들어 로마 제국에서는 제국 대리인을 통한 지중해에서 라인 강 유역으로의 물자 공급이 대체로 군사 배치와 변경 통제를 유지하기 위한 필요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시장의 위치가 군대의 위치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을 뿐만 아니라 소비 패턴이 병사들의 소비와 연관돼 있다는 얘기였다. 

292 한편으로 주변부에서 누적된 압력이 다시 중심부로 돌아와 붕괴 과정을 악화시키고 가속화했다.

292 반면에 도시와 시장이 유기적으로 형성된 동반부에서는 난관을 처리할 힘이 더 커졌다.

293 학자들이 늘 이야기하는 '암흑시대'로의 추락은 혼란과 마구잡이의 유혈 사태로 인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분열과 이전에 서방의 주들을 한데 묶어주던 중앙집권적 권력의 실종 때문이었다. 

10장 고대 말의 위기 - 500년 무렵부터 600년 무렵까지

303 제국의 등장은 풍광을 바꿀 수 있었다. 인구 증가, 도시화, 소비 패턴의 변화로 생겨난 수요 때문이었다. 제국의 멸망도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로마의 서방 속주들이 오랜 쇠락기에 접어들자 초목이 차지하는 면적 역시 변화했다. 

303 식물의 관점에서 보자면 로마의 손실은 호밀의 이득이었다. 유럽에서 4세기부터 8세기 사이에 호밀 재배가 급속하게 늘었다.

305 사막과 황무지에 관한 태도 역시 양면적이었다. 

 

305 여러 신앙에서 신이나 더 높은 영적 수준과 교감하는 것은 다른 인간을 벗어나는 것과 연과돼 있었다.

325 다시 말해서 충격적인 단일 사건과 기후 충격의 기간은 신앙을 변모시켰을 뿐 아니라 기관들(기독교 교회 같은)의 확산과, 미래의 대재앙에 대한 설명과 대재앙으로부터의 보호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권위와 권력을 강화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것은 7세기 초에 중요한 것으로 드러났다. 


14장 생태 지평의 확대 - 1400년 무렵부터 1500년 무렵까지

445 동아시아에서는 1320년대 이래의 상시적인 환경 압박으로 극심한 기근, 유행병, 가뭄이 기승을 부려 중국 안휘성의 땅이 "거북 등처럼 쩍쩍" 갈라졌다. 

450 아스테카 지배자들은 기상 이변과 식량 부족에 대처하기 위해 왕국 곡물 창고의 비축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이마저도 소용없는 것으로 드러나는 경우들이 있었다. 

453 기후 재난과 자연재해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의 희생제는 그 무렵 이후 남아메리카의 다른 곳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453 거기에는 카팍후차qhapaq hucha 의식으로 알려진 희생제의도 있었다. 

453 잉카의 등장은 상당 부분 따뜻한 기상 조건 덕분이었다. 그것이 고지대, 특히 그들의 중심 도시 쿠스코 부근에서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였었다. 

454 복합농림업agroforestry 기술 개발과 예외적으로 높은 종자단백질 및 유분 함량을 지난 다양한 작물 재배도 마찬가지였다.

454 잉카는 또한 지역 교류망도 건설했다.

454 의무 노역을 통해 건설한 방대한 도로 체제인 카팍냔qhapaq ñan('왕도王道')은 3만 킬로미터에 이른 것으로 추정되는 서로 연결된 해안도로와 공로였는데, 중간 중간에 ‘탐푸쿠나tampukuna'라는 중간 기착지와 '와시wasi'라는 이어달리기 전령 초소가 있었다. 그 목표는 상인과 관리, 정보가 지방과 수도 사이를 오가는 데 걸리는 시간 및 비용을 줄여 통제력을 높이고 교역을 자극하려는 것이었다.  

468 따라서 어떤 면에서 아메리카를 찾거나 그곳에 정착한 많은 사람들이 새로 발견한 환경 조건에 실망했다는 것은 너무도 쉽게 간과될 수 있는 한 가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유럽인들은 왜 애초에 본향 근처에 머무는 대신 대서양 건너로 확장하고자 했을까? 

468 나 중의 한 잉글랜드 관리가 말했듯이 "서인도제도에서 잘된 모든 것"이 서아프리카에서도 잘될 수 있었다. 

469 그 대신에 아프리카는 집중적인 농업 투자를 위한 장소가 아니라 노동력의 공급지가 되었다.

469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서아프리카 국가들의 정치 조직이 매우 발달해 식민화를 고려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수백 년 동안은 말이다. 

470 아메리카가 식민지가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잘못된 정보, 정보 부족과 기대치 상승, 정착자들 사이의 경쟁, 추가적인 발견을 향한 독려 같은 것들이었다.  

470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현실적이고 간과되기 쉬운 것이었다. 

470 세계 역사에서 다음 주기를 추동한 것은 이익 추구였다. 그것이 정치권력을 재편하고, 생태계를 변화시키며, 궁극적으로 기후 자체를 변화시켰다. 

15장 구세계와 신세계의 융합 - 1500년 무렵부터 1700년 무렵까지

471 이는 그 성격, 범위, 영향면에서 역시 세계적이었던 극적인 생태계 변화와 함께 진행됐다.

472 토마토, 파프리카, 파인애플, 고추, 땅콩, 감자, “이 모두는 아메리카에서 왔다.


472 예를 들어 현대 세계에서 우리는 토마토를 그리스나 이탈리아 요리와 동의어로 여긴다. 아니면 에스파냐 요리일 수도 있다. 라토마티나 같은 토마토 던지기 축제가 벌어지는 곳이다. 파프리카는 헝가리 국민음식 구야시와 연결한다. 파인애들은 열대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와, 고추는 인도와, 땅콩은 태국·말레이시아의 사테이 양념과, 감자는 영국에서 주말에 가족이 모여 먹는 특유의 음식인 선데이로스트와 연결한다. 그러나 모두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원산이 아니다. 이 모두는 아메리키에서 왔다. 

473 유럽 주민들의 '근면혁명Industrious Revolution'에 매우 적합한 상황을 만들어냈다. 

480 생물 혁명의 충격은 너무도 광범위해서 일부 역사가들은 여기에 일종의 '생태 제국주의ecological imperialism'라는 이름을 붙였다. 

484 17세기 말은 북아메리카에서 재난이 지속된 시기였다.

498 환금작물에 스스로를 빌려준 토양이 제공한 생태적 기회, 이익 추구과정에서의 효율적인 자본 투입, 삼각무역 체제의 창설, 공급사슬의 개발, 인간 생명의 희생 등 모든 것이 어우러져 일부 사람들에게는 기회를, 그리고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고통을 안겼다. 

19장 공업, 수탈, 자연계 - 1800년 무렵부터 1870년 무렵까지

616 1760년대에 벤저민 프랭클린은 나중에 예일대학총장이 되는 에즈라 스타일스에게, 삼림 파괴의 결과로 기온이 더 온화해졌다고 썼다. 
 
617 토머스 제퍼슨은 강박적인 관심을 갖고 1776년 7월 1일(바로 그가 〈독립선언〉을 기초하고 있을 때다) 일기를 쓰기 시작해 이후 50년 동안 하루 두 차례 기온을 측정했다. 

619 웹스터의 말은 기후변화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는 주장을 제대로 뒷받침하기 위한 엄격한 학술적 태도에 대한 요구였다. 

623 그러나 문제의 또 다른 원인은 세계 반대편에 있었다. 바로 지금의 인도네시아 탐보라산이었다. 1815년 4월의 그 분출은 과거 1 만년 사이에 가장 큰 규모였다. 

 

23장 불안의 증폭 - 1960년 무렵부터 1990년 무렵까지

785 냉전은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것이 지닌 중요하지만 흔히 간과되는 영향은 환경에 대한 태도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생명에 대한 실존적 위협은 결정적이었다. 

788 〈침묵의 봄〉은 고삐 풀린 베스트셀러였다. 그 판매는 상당 부분 출판사의 영리한 상술 덕분이었다. 그들은 신간 견본을 저명한 위치의 여성들에게, 여성유권자연맹 같은 단체에, 아동국, 전국유대인여성회의, 전국여성단체연맹 같은 여러 기구의 대표자들에게 보냈다. 또한 이 책은 당대 정치권의 논의에도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케네디 대통령을 자극해 농약사용에 관한 보고서를 주문하게 만들기도 했다. 

882 실제로 실험을 근거로 한 최근의 한 연구는 급속한 환경친화적 에너지로의 이행이 "대기 오염이 적고 가격이 안정적이며 기후에 대한 영향이 적은 보다 환경친화적이고 보다 건강하고 보다 안전한 세계 에너지 체계"를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수조 달러의 순절약으로 이어질 것"임을 보여주었다. 

884 마찬가지로 많은 나라, 주, 도시에서 전기자동차(EV)로 전환하는 것은 충전과 재충전 때문에 전기수요를 늘리는 결과를 가져오며 전기자동차가 높은 수준의 오염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사실 합성 차바퀴는 미세플라스틱의 주요 원천이다. 

 

결론

896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와 도전은 여러 가지로 인류 초기의 우리 조상들이 마주했던 것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여전히 같은 것이 하나 있다. 우리 주위의 자연환경과 그것을 떠받치는 기후가 우리의 존재를 틀 짓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술이 우리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준다고, 우리가 자연을 변형시키고 개조하면 모든 장애물과 장벽을 누그러뜨리거나 우회하거나 극복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런 자신감에는 희생이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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