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 우리가 믿는 것들에 대하여
- 책 밑줄긋기/책 2023-24
- 2024. 4. 1.
우리가 믿는 것들에 대하여 - 김진혁 지음/복있는사람 |
서문
서론. 믿음에 대하여
1장. 하나님
2장. 예수 그리스도
3장. 사람
4장. 성령과 교회
5장. 죄 사함
6장. 종말
결론. 아멘, 그리고 다시 ‘믿음’에 대하여
부록
주
찾아보기
12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는 다층적이지만,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역사적인 신앙 공동체에 속하게 된다는 것입니다(엡 2:8). 달리 표현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의 몸인 '거룩한 공교회'의 일부가 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우리는 교회가 됨으로써 삼위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의 지평으로 들어가게 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새로운 지향성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초기교회 때부터 교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수많은 수세자가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신약성경의 여러 구절이 보여주듯, 1세기 사람들에게 세례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침여하는 '종말론적' 구원 사건(롬 6:3, 갈 3:21, 벧전 3:21 등)인 동시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 현존하는 '종말론적' 공동체에 들어가는 예식이었습니다(행 2:41). 그렇기에 공동체 속에서 '나는 믿습니다'Credo라고 사도신경을 고백한다는 것은, 나보다 더 크고 더 위대하며 더 오래된 무언가에 접붙여짐을 의미합니다. 삼라만상의 주님이신 하나님의 은혜의 포괄성에 상응하듯, 우리는 시공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전 세계 곳곳의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룹니다. 이는 사적 세계로 후퇴하며 자신의 세계를 각종 논리로 옹호하려는 인간의 자기중심성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나와 너를 갈라놓는 언어와 문화, 인종, 성별, 역사적 기억, 이데올로기, 계급의 차이를 뒤로하고, 세상과 화해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모든 것을 거는 신앙의 모험을 떠나는 원정대에 합류하겠다는 선언입니다.
43 고대 근동의 다신론적 사고에 젖어 있던 사람들은 나라가 망하면 자연스럽게 적들이 섬기는 강력한 신을 새로운 예배 대상으로 삼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논리로는 세계를 통일한 대제국의 신이야말로 '신 중에 그와 같은 이가 누구이리까'라는 찬양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남유다가 멸망했음에도 바빌로니아 제국의 신이 아닌, 조상들을 이집트에서 건져낸 '아웨 하나님'을 계속해서 섬기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하려면 '야웨만이 참 하나님이시다'만 무의미하게 무한 반복하는 맹목적 헌신을 넘어서야 했습니다. 즉 신을 이해하는 방식에 질적 도약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때에 포로기의 고통스러운 시간은 이스라엘의 택일신론적 신앙에 남아 있던 다신론적 요소들을 떼어 내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46 유일신론이라는 혁명은 이 난제에 대한 답을 찾을 때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특정 부족이나 특정 나라의 신이라면 그 영토에 묶여 있겠지만, 시간과 공간을 만든 유일신은 그러한 제약을 초월합니다. 따라서 포로기 이후 유대교는 성전에서 회당으로, 제시에서 율법 연구와 실천으로 강조점이 옮겨가게 됩니다.
48 이스라엘은 형이상학적 사변의 결과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 관한 모세의 가르침을 포로기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재해석함으로써 독특한 유일신 신앙의 언어와 논리를 잉태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급진적 유일신론과 고통의 역사가 함께 형성한 전복적 구원 이미지는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제자들이 이해하는 방식에도 결정적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스도를 고난받는 종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교회를 세상을 위해 대리적 고난을 받는 주님의 몸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84 나사렛 예수가 '우리 주님'이라고 불렸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고대 로마 사회에서 유일신론적 배경을 가진 유대인들이 하나님 한 분께 시용한 호칭을 시골 출신의 한 사내에게 부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이라는 호칭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유롭게 시용했다는 것은, 그들이 그분을 하나님으로 예배하면서도 그것을 유일신론에서 벗어나 제2의 신을 섬기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방증합니다.
217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과 화해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너를 의롭다 여기시고 용납하셨다는 것이 믿음의 내용입니다. 우리에게 자신을 선물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삼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며, 성령을 통해 우리도 성자처럼 성부를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친밀한 교제로 들어가는 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성부께 순종하며 세상으로 파송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각자의 삶에서 하나님과 세상의 화해를 증언하고 현실화하는 것이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아내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칭의론의 기본 문법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죄인이지만 은혜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믿음으로 그 은혜를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사랑의 불씨를 가슴에 품은 자유인으로서 정의로운 삶의 모험을 떠납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들과 죄인인 인간 사이에 '운명의 교환'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283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하고' 세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의 종말론적 구조를 보여줍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도신경과 함께 세례를 받았음에도 지금껏 사도신경의 의미를 통달함으로써 세례의 자격을 획득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단지 여전히 진리를 모르고 죄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창조하고 구원하고 거룩하게 하는 삼위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조건 없이 용납되었을 뿐입니다. 지금은 '희미하고 부분적'으로만 안다는 것조차 '나의 신앙'으로는 잘 인지되지 않지만,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그때에는 온전히 알게 될 것이라는 '교회의 희망에 믿음으로 접붙여져 나의 존재를 세례의 물에 맡길 뿐입니다(고전 13: 12).
284 사도신경 조항들을 입에 올리고서 마지막에 아멘, 곧 '참으로 그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일반적인 지성과 경험으로 허락하기는 몹시 힘든 일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약 이천 년 동안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도신경으로 진실하게 신앙고백을 했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하지만 그 기적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참여했기에 실제 이루어졌습니다. 참 인간이자 인류의 대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 먼저 아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성경은 그분 자체를 아멘이라고 소개합니다(계 3:14). 성부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아멘이라고 하실 때, 우리의 아멘이 성부께로 들어 올려졌습니다. 이로써 아버지와 하나이신 그리스도의 중보로 우리의 어설픈 고백의 언어마저 삼위 하나님의 대화 속에 오가는 유의미한 사랑의 언어로 변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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