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아 보르게시: 빈 미술사 박물관 ━ 마로니에북스 세계미술관 기행 12

 

빈 미술사 박물관 - 10점
실비아 보르게시 지음, 하지은 옮김/마로니에북스

서문
빈 미술사 박물관
작품들
미술관 안내
화가 및 작품 색인

 

 


서문

빈 미술사 박물관 탄생의 기저에는 유럽에 만연했던 나폴레옹 군대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지금이 19 세기 초라고 생각해보자. 합스부르크 왕가는 가문의 예술유산, 특히 세 개의 도시인 인스부르크 근처 암브라스성, 뉘른베르크와 아퀴스그라나에 보관중인 신성로마제국과 황금양모기사단의 막대한 보물의 운명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 끝에, 컬렉션 전체를 빈의 벨베데레 궁전으로 옮기라고 명했다. 빈의 성문에 위치한 이곳에는 이미 회화 컬렉션이 소장돼 있었다. 

나폴레옹의 위협 속에서도 살아남은 왕가의 컬렉션은 처음으로 대중적으로 유명해지는 계기를 얻었다. 빈 회의 기간에 시민과 외국사절에게 컬렉션이 공개되었을 때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이때 아마도 이 컬렉션을 소장할 박물관 건설에 대한 생각이 절실해졌던 것 같다. 하지만 구체적인 계획이 수립되기까지는 수십 년의 시간이 필요했고, 무엇보다도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황제의 뜻이 가장 중요했다. 

1848년에 선출된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왕가의 예술유산을 한 장소에 모으려는 생각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19 세기 중반 빈에서는 대규모 사업이 시행되었다. 낡은 성벽을 허물고 도시화된 빈은 링 주변에서 새롭게 태어났다. 큰 가로수 길에는 극장과 의회를 비롯한 주요 공공건물이 무두 들어섰다. 한때 합스부르크 왕가의 거처로 사용되었던 호프부르크 궁전의 앞쪽은 지면을 평평하게 다지는 작업을 통해 일종의 왕실 광장으로 변신했다. 광장의 측면에는 서로 마주보고 있는 화려한 건물이 설계되었는데, 첫 번째 건물에는 과학 박물관이 들어서고 두 번째 건물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어마어마한 컬렉션이 보관될 예정이었다. 

이 프로젝트를 담당한 건축가 칼 하제나우어와 고트프리드 젬퍼에게 내려진 지시사항은 비용 걱정은 말라는 것 단 하나밖에 없었다. 박물관 건축은 신속하게 진행(1871~1880) 되었고, 값비싼 대리석과 멋진 프레스코와 모자이크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미술사 박물관의 각 전시실은 배치될 미술품에 적합한 양식으로 꾸며졌다. 고대유물은 고대후기 로마 건축에 영감을 받은 전시실에, 고대 이집트의 유물은 이집트 식으로 장식된 전시실에 전시되었다. 박물관 로비는 율리우스 베르거가 그린 〈합스부르크 왕가의 순수미술 후원〉과 미카엘 폰 문카치의 〈르네상스의 신격화〉와 같은 알레고리 그림과 루네트를 빛내던 한스 마카르트가 그린 이탈리아 화기들의 초상화로 풍성해졌다. 지금은 이름을 기억하기도 어렵지만 이들은 19세기 말 빈의 최고 화가였다. 천장 전면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제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는데, 그중 한 명이 훗날 아주 유명해진 구스타프 클림트였다. 1880년 링의 두 건물이 완성되었다. 새로운 박물관으로의 대규모 이전을 앞두고 벨베데레의 구전시관에 소장된 컬렉션의 상태는 수재화로 그려져 기록되었다. 

1891년에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미술사 박물관의 개관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전시실을 둘러보는 그의 모습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안목과 위대함의 증거로 영원히 기억될 것 같았다. 하지만 알다시피 상황이 꼭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25년 후, 복잡한 유럽정세에 의해 합스부르크 제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고, 그들의 컬렉션은 새로이 탄생한 공화국의 소유가 되었다. 양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도 컬렉션은 살아남았다. 1939년에는 박물관의 모든 작품이 알타우제 광산으로 옮겨졌고 나중에 무사히 돌아왔다. 그러나 박물관의 건물은 심각한 손상을 입고 폐쇄된 상태로 오랜 복구기간을 거쳐야 했다. 미술사 박물관은 1958년에 비로소 다시 대중들을 맞이했다. 

마르코 카르미나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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