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비어드: 로마는 왜 위대해졌는가

 

로마는 왜 위대해졌는가 - 10점
메리 비어드 지음, 김지혜 옮김/다른

추천의 말 드디어 진정한 로마사와 만나다 014

 

프롤로그 로마의 역사 019
1장 키케로의 전성기 029
2장 태초 069
3장 로마의 왕들 115
4장 로마의 위대한 도약 163
5장 더 넓은 세계 209
6장 새로운 정치 257
7장 제국에서 황제로 311
8장 국내 전선 365
9장 아우구스투스의 변신 415
10장 14인의 황제 475
11장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533
12장 로마 밖의 로마 579
에필로그 최초의 로마인 639
밀레니엄 641 | 마무리 649

연표 652
감사의 말 663
옮긴이의 말 666
참고 문헌 671
사진 및 도판 출처 699
찾아보기 710

 


프롤로그

24 내가 쓴 로마 역사는 212년 절정의 순간에 끝난다. 바로 황제 카라칼라가 로마 제국에 거주하는 모든 자유민에게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 순간이다. 이 일로 정복자와 피정복자 사이의 차이가 사라지고 거의 수천 년 전에 시작된 로마 시민의 권리와 특권을 확대하는 과정이 마무리되었다. 

24 로마가 확장해 들어간 세계는 서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공동체들의 세계가 아니었으며, 폭력이 난무하고 군사력으로 지탱되는 경쟁세력의 토대들로 이루어진 세계였으며, 작은 제국들로 구성된 세계였다. 로마의 적들은 대부분 로마인들만큼이나 군사주의의 성향을 지녔다. 

25 그리스는 지적 탐구와 연극과 민주주의를 선호했던 것과 달리, 로마는 공학과 군사적 효율성과 절대주의에 집착하는 고전 그리스의 더 젊고 폭력적인 형제에 불과하다고 단순히 간주할 수는 없다.  

25 그리스의 도시국가들도 로마인들만큼이나 전투에 승리하는 데 능했고 대부분의 도시국가들은 아테나이의 짧은 민주적 실험과 거의 관련이 없었다.  


제2장 태초

86 형제 살해는 로마 정치와 단단히 묶여 있었고 기원전 7세기부터 줄곧 로마 역사를 거듭해서 괴롭혀온 내분의 끔찍한 경쟁이 어느 정도는 예정되어 있었다. 

87 로물루스가 자신이 새로 건설한 도시의 시민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외국인, 범죄자, 도망자까지 도시에 오는 모든 사람들을 환영하고 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한다는 발상이다. 

88 정복지, 로마인들의 표현대로 하자면, '속주'의 주민들은 차츰 완전히 로마 시민권을 얻었고 그에 따른 법적 권리와 보호를 받았다. 그런 정책은 기원후 212년, 카라칼라 황제가 제국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을 때 절정을 맞았다. 

88 로마 원로원은 점차 오늘날 우리가 확실히 다문화적 기구라고 묘사할 수 있는 것이 되었으며 로마 황제 명단에는 이탈리아 외부 출신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89 아테네에서는 노예가 자유를 얻는 일이 극히 드물었고 그 과정에서 아테네 시민권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국적이 없던 어떤 중간지대limbo에 놓이게 된다. 


제3장 로마의 왕들 

156 왕정의 끝은 자유의 탄생이자 자유로운 로마 공화정의 탄생이었다. 로마의 그 많은 제도들이 왕정 시대에서 유래한다고 여겨지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나머지 역사의 정치에서 '왕' 또는 'rex'는 혐오감을 뜻하는 용어였다. 

159 공화정은 단순히 하나의 정치 시스템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치, 시대, 지리학과 로마 도시 풍경 사이의 복잡한 상관관계였다. 

159 전체를 떠받치는 것은 단 하나의 결정적 원칙, 말하자면 자유, 리베르타스libertas였다.


제4장 로마의 위대한 도약

204 이 시기 승리의 배경이 된 유일하게 중요한 요인은 전술도 아니고 군비도, 기술도, 동기도 아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동원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205 그들은 투표권 없는 시민권civitas sine suffragio으로 알려진 좀 더 제한적인 형태의 권리를 부여했다. 또한 콜로니아이coloniae로 불리는 정착지의 정복된 영토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콜로니아이는 그 단어의 근대적인 의미인 식민지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지역민과 로마 출신 사람들이 뒤섞여 만들어진 신흥 (확장된) 도시들이었다. 

206 로마인들은 '라틴'이라는 단어는 민족적 정체성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종이나 지역과 관계없는 정치적 지위를 지시하는 말로 재규정했다.  

206 이 모델은 조만간 해외로 확장되었고, 결국 로마 제국의 토대가 되었다.


제5장 더 넓은 세계

247 기원전 2세기 초, 도시 안팎의 성인 로마 시민 전체 수가 30만 명이던 시절에 해외에 거둔 승리의 결과로 이탈리아 반도에 새로 도착한 노예의 수가 매년 평균 8,000명을 웃돌았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머지않아 해방되어 새로운 로마 시민이 되었다. 그 같은 사실은 로마의 경제뿐만 아이라 시민기구의 문화적·인종적 다양성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로마인과 외부인 사이의 구분은 점점 더 흐려졌다. 

248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후 에스파냐에서 동지중해까지 어디든 이탈리아 밖에 주둔한 군대에는 통상 3만 명 이상의 로마 시민들이 있었다. 

248 기원전 2세기 중반에 이르면, 로마의 성인 남성 시민의 절반 이상이 바깥 세계에 무언가를 보았고 그들이 다녀온 곳에 몇 명이나 되는지도 모르는 자식들을 두었다. 


제6장 새로운 정치

259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가 오랜 포위 끝에 마침내 파괴된 일은, 양측에서 보고된 잔학행위까지 더해져 고대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섬뜩한 것이었다. 

264 146년의 사건들은 공화정 붕괴의 시작으로 여겨졌으며 전제적인 지배로의 회귀를 낳은 100년의 내전, 대량학살, 암살의 시작으로 여겨졌다. 

271 일단 결과를 알고 나서는 그 시기를 돌이킬 수 없이 위기로 치닫는 일련의 잔혹한 단계들로 설명하거나 자유 국가의 종말과 1인 지배로의 회귀를 코앞에 둔 시기로 설명하기는 쉽다. 그러나 공화정의 마지막 100년은 단순한 유혈극을 넘어섰다. 


제9장 아우구스투스의 변신

420 적들에게 그는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즉, 옥타비우스였던 자)로 알려졌다.

421 옥타비아누스로서 그의 초기 기록은 가학성과 추문과 불법성의 혼합이었다.

421 옥타비아누스는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새 체제의 건국시조가 되었는지, 그리고 많은 사람이 보기에 그의 후계자들을 판단하는 황제의 모델이자 기준이 되었는지는 많은 예리한 로마인들이 묻는 질문이 되었다. 그리고 역사가들은 그가 확립한 체제의 본성과 그의 권력과 권위의 토대에 관해, 이 급진적인 변화와 체제의 본성에 관해 부심했고 줄곧 이견을 보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제10장 14인의 황제

489 황제들은 서로 다르기는커녕 아주 유사했으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것은 피상적인 조정에 그쳤다는 점이다. 황제지배체제의 거대 서사에서 암살은 미미한 막간극일 뿐이었다.  

493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Publius Cornellius Tacitus조차도 그런 세세한 사실들에 흥미를 느꼈다.

493 티베리우스부터 네로까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들의 역사를 다룬 그의 《연대기》의 첫 문장은 그렇다. "맨 처음부터 왕들이 로마 시를 다스렸다Urbem Romam a principio reges habuere." 단 여섯 개의 라틴어 단어로 이루어진 그 문장은 자신들은 옛 의미의 왕조가 아니라는 체제의 이데올로기적 토대와 아우구스투스들의 주장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496 황제의 업적과 성품은 후임자의 관심사에 따라 재창조되었기 때문에, 정권 교체의 정치가 역사에서 각 황제의 몰락 방식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가이우스처럼 암살된 사람들을 악마화하는 것은 로마 역사의 기본 규칙이었다. 

503 로마의 통치자 대부분은 만찬 자리보다 책상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업무를 처리하고,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청원에 응대하고, 제국 전역의 분쟁을 조정하고, 외부에서 볼 때 상대적으로 사소해 보이는 것들까지 까다로운 법률 소송에서 평결을 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507 14명의 황제들은 또한 아우구스투스가 물려준 문제와 긴장도 계승했다. '아우구스투스의 원형(原型)'이, 비록 어떤 면에서는 오래 지속될 만큼 확고했지만 다른 면에서는 위태로운 줄타기였기 때문이다. 

509 결정적으로 로마법에는 장자가 유일하거나 중요한 상속자라는 추정의 근거가 없다. 

515 제위계승은 언제나 행운, 임시변통, 음모, 폭력, 비밀 거래의 결합으로 이어졌다. 로마의 권력이 이양되는 순간은 언제나 로마의 권력이 가장 취약했던 순간이었다.  


에필로그

647 원인이 무엇이든 3세기의 ‘위기'에 출현한 새로운 로마는 우리가 로마의 처음 1,000년 동안에 살펴본 모든 것과 충격적일 정도로 달랐다. 

647 콘스탄티노플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권력을 확립한 아우구스투스의 모범을 따른 것이지만 콘스탄티누스가 세운 것은 교회였다. 

650 그저 따르기만 하면 되는 로마의 모범 같은 것은 없다.

651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르네상스 시대 이후 로마인과 그들의 글을 나누면서 권력과 시민권과 책임, 정치적 폭력과 제국과 사치와 아름다움에 관한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가정들이 형성되고 검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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