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사통史通(2)

 

2024.12.20 δ. 사통史通(2)

유지기, ⟪사통⟫(劉知幾, 史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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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는 유지기의 《사통史通》을 읽기 시작하면서 전반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 저작인가를 말했는데, 제가 유지기의 《사통史通》을 읽는 것은 《사통史通》이라는 책을 열심히 읽어서 역사를 편찬하는 방법을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의 서술이라고 하는 것, 역사적인 사태들을 서술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서술한 것을 바탕으로 해서 어떤 평가를 하는 것, 이런 것들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 아무런 데이터도 없이 무작정 평가질만, 그런 경우에는 우리는 평가질을 한다고 얘기하는데, 그것만을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또 어떤 사건을 서술해서 그것을 아무리 상세하게 나열한다 해도 그것으로부터 평가를 이끌어낼 수는 없다. 이미 사실을 서술한다는 것 자체가 일정한 정도의 범주를 가지고 사실을 서술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서술할 것인가 하는 것에서 이미 평가가 들어간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것들을 서술해야겠다 라고 말할 때 내가 생각하기에 라고 하는 지점에서 이미 평가가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과 평가의 영역이라고 하는 게 엄밀하게 구별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 해도 전통적인 의미에서 중국의 역사 서술들은 평가에 굉장히 큰 비중을 두어 왔다. 춘추필법이라든가 그런 말들이 사실 그런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는 유지기의 《사통史通》이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해서 섣불리 제대로 서술되지도 않은 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섣부른 평가에 이르는 것을 경계하는 의미가 있다. 바로 그런 점에서는 전목 교수가 유지기의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한계점들을 너무 섣불리 지적을 하지 않았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오늘은 다시 앞부분의 번역자인 오항녕 교수가 사통의 구조와 역사 비평이라고 쓴 부분을 중심으로 해서 들어가는 말을 한 번 더 살펴보고 다음부터는 본문으로 들어가겠다. 면밀하게 읽어서 상세하게 얘기를 하면 좋겠지만 일상적인 정도의 그런 생각을 가지고 한번 읽어보겠다.  일단 유지기가 이 책을 쓴 목적, 저술 동기는 무엇인가.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있는데, 661년에서 721년이면 유지기는 당나라 때 사람이다. 676년 신라의 삼국 통일을 가져다 생각해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이라고 흔히 말하는데, 실록이라고 하는 것은 당나라 때 새롭게 생겨난 역사 편찬 방식이다. 공동 작업을 통해서 동시대의 역사, 당대의 역사를 편찬한다. 혼자 하는 게 아니다. 이전의 역사 책들, 그러니까 사마천의 《사기》 같은 작품들을 보면 혼자 썼었다. 사마촌의 아버지 사마담, 집안 대대로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고 할 때 혼자 해서는 일가를 이룰 수 없고 최소한 3대 정도는 해야 될 것이다. 공동 작업을 통한 것은 말하자면 일가가 편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역사 편찬 작업이다. 물론 사마천의 《사기》 같은 것도 내가 재미 삼아서 한번 해본다 하는 사적인 의도를 가진 사찬私撰은 아니고 국가, 역사 편찬 작업에 들어가니까 정사작업正史作業이다.  유지기가 이 책을 쓰게 된 가장 밑바탕에 놓여 있는 핵심적인 그 배경은 시대적 배경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작업 방식이 변화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한국에서도 개개인이 역사책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국사편찬위원회가 있다. 그게 바로 실록 편찬 작업을 하던 것의 방식을 취했다고 말할 수 있다.  역사가들이 모여서, 역사가들이라기보다는 각기 분담하고 있는 일이 있을 것인데, 역사가들이 모여서 사관史館에서 이루어지는 집단 작업이 시대적 배경이 된다.  

유지기의 비판도 굉장히 수긍할 만한 지점이 있는데, 갑자기 이런 일들이 생겨나니까 이제 어수선하고 체계도 잘 갖춰져 있지 않고 그랬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공동편찬을 통해서 국사를 편찬하는 일이 그렇게 만만치 않고 몇 가지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궁중에서 작업이 이루어지니 황제한테 눈 밖에 나면 죽을지도 모르니까 비밀이 보장되지 않고 엄정하게 집필하기가 어려운 문제점이 있고 공무원 사회이니 쭉 정책의 일관성을 가져가기가 어렵다. 편찬 원칙이 결여되어 있고, 또 사람을 뽑아서 쓰다 보니까 조금 모자란 사람도 들어올 수 있을 테니까 편찬자들의 자격이나 기획 능력이 모자라는, 특히 이제 사관의 자질이 문제되었다. 그런데 저는 유지기가 사관의 자질을 문제 삼을 만한 사람은 아니지 않나 라는 생각을 좀 해보게 된다. 전목 교수의 평판을 봐도 그렇다. 

유지기도 사관은 삼장三長, 세 가지 장점이 있어야 한다 라고 얘기하는데, 재능才이 있어야 하고, 배움學이 있어야 하고, 식견識이 있어야 된다. 재才, 학學, 식識은 꼭 사관의 자질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뭔가를 하려면 이 세 가지가 있어야 한다.  이런 책 읽다 보면 꼭 여기에만 해당하는 것일까 라는 그런 느낌을 주는 것들이 있다. 재才, 학學, 식識, 재능이 있어야 된다고 할 때 재능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크게 될 놈은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할 때 그 떡잎에 해당하는 것이겠다. 기질과 성향은 타고난 부분이니까 일정한 정도로 사람은 조금씩 다르다.  수없이 많은 인간들 중에서도 유독 그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는 재능이 있어야겠다. 유지기를 보면 어려서 공부할 때 유독 춘추좌씨전을 잘 읽었다. 형들한테 설명해 줄 수준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런 부분이 재능이겠다. 그다음에 배움은 study, 흡수해야 되는, 그래서 이렇게 하다 보면 식견이라고 하는 것은 통찰일텐데, 배움과 식견에 관한 얘기는 조금 이따 보충해서 좀 더 하겠다. 유지기는 과연 학學과 식識을 갖추고 있는가에 관한 것은 조금 이따 얘기를 다시 더 하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동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제 사료 수집의 비효율성과 무원칙성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것은 당나라 때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공동 과제의 어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경우에서 도대체 극복하기 어려워 보이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이겠다. 

오항년 교수가 이 책을 읽게 된 것,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책 머리에 써놓았다. 자신이 조선왕조실록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조선왕조실록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유지기를 좀 볼 필요가 있었겠다. 저 같은 경우라면. 저는 유지기의 이 책이 있다는 것은 오항년 교수의 번역을 통해서 알았고, 도대체 이게 뭔가 하고 좀 들여다본 것에 불과한데, 저는 역사 철학 전공자니까 이런 책보다는 오히려 사마천의 사기나 이런 것에 훨씬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 "흥미롭게도 조선왕조실록 편찬의 경험은 유지기가 걱정했던 실록 편찬 일반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대해서 연구하는 사람은 유지기를 볼 필요가 있겠다. "실록 편찬은, 기록자와 편찬자가 다르고, 사초史草나 기타 공문서에 적힌 이해관계자들이 살아있을 때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화史禍의 가능성이 상존하는 구조가 내재한다." 조선시대 사화士禍라고 하는 것은 선비들이 화를 입는 것도 되지만, 이는 사화史禍와도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필화筆禍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조선 사람들은 사관의 기록인 사초의 보호에서 시작하여 편찬 과정의 누설 금지, 사후 엄중한 사고史庫 관리를 통해 유지기가 실록 편찬을 지켜보며 걱정했던 문제들을 극복해 나갔다. 그리고 그 시스템이 작동하고 수리되는 동안은 조선이 유지되었고, 그 시스템이 고장 나면서 조선은 무너져 갔다." 이 말은 조금 비약인 것 같다. 그 시스템이 작동하는 동안 조선이 유지되고, 고장 나면서 무너졌다는 것은 1800년 이후에 세도정치 시기에 들어서면서 시스템이 고장났으니까 맞는 얘기이기도 하겠지만, 정조 이후이니까 정조의 실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항년 교수는 조선시대 사관제도를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니까 당연히 이것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었을까, 유지기를 유심히 보지 않았을까 한다. 한국사상사 연구소에서 역사학에 대한 인식론적 반성을 배웠다고 한다.  "왠지 숙명적으로 엮여 있는 것 같은 강렬한 느낌에 휩싸였다. 그러던 차에 1992년 한국사상사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들어갔는데, 그때 서가에 꽂혀 있던 조여보의 『사통신교주』가 한눈에 들어왔다."  

유지기는 학學과 식識을 갖추고 있는가. 학學에 관한 점을 보면, 전목 교수가 얘기하기를 유지기는 경서經書를 읽지 않았다고 한다. 경서經書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일단 중국 고유의 전통에서 경서經書는 오경일 텐데, 의문점이 없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 카드에 빨간 색연필로 밑줄을 쳐놨는데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들, 좀 더 궁리를 해 봐야 되는 것들을 말한다.  스카이블루 잉크로 표시해 놓은 것은 다른 카드와 연결이 있는 부분을 말하고, 녹색 잉크로 써놓거나 아니면 녹색 색연필로 동그라미 쳐놓은 것은 제 의견을 말한다. 여기서 전목 교수가 말한 경서라는 것은 중국 전통에서의 경서, 일단 오경이라고 추측을 해본다.  오경에 대해서 간단하게만 얘기를 해보면, 먼적 역易. 주역周易이라고 하지 않고 역易이라고 한다. 역易을 읽었다고 말하는 것이 경서를 읽은 사람들의 레토릭이다. 이 책은 점보는 책이 아니라 일단 자연에서 일어난 사태를 보고 또 인간의 일을 보고 그것에 대한 성찰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인간 대상, 자연 대상, 대상 세계에 대한 나의 생각을 기록한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역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심오한 책이 아니라 사실은 일차적인 책이다. 두 번째가 서書, 서경書經이다. 유지기는 고문상서古文尙書를 읽는 것이 너무 어렵다고 얘기했는데, 그것을 보고 아마 전목 교수가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서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관가에서 나온 공식 문서 모음집으로 정치학 텍스트이다. 그러니까 유지기의 자서自敍를 보면 자기가 고문상서를 읽고 있는데 잘 못 읽으니까 너무 힘들었다 하는 얘기가 있는 부분에 이런 얘기가 있다. 공자의 큰아들 백어伯魚에게 시詩와 예禮를 공부했느냐를 물었다고 하는데, 시詩라고 하는 것이 오경 중에 하나이다. 시는 노래집이고, 예는 사회생활 또는 가정 생활의 예법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니까 큰아들한테 지금 시와 예를 공부했느냐 하는 것은 역易과 서書는 아직은 안 할 때이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뭘 가르쳤는가 할 때 시詩를 읽지 않는 자와는 함께 앉아 얘기를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시경詩經)이고, 그다음에 서書를 가르쳤다. 그러니까 공자는 교재가 이것이다. 역易은, 위편삼절韋編三絶, 죽간을 묶은 가죽 끈이 세 번 끊어지도록 읽었다, 공자는 역易을 읽었고, 서書와 시詩를 가지고 교재로 가르쳤고, 그다음에 예禮, 자기 아들한테 읽었냐고 하는 것이 시詩와 예禮이다. 그리고 마지막이 춘추春秋이다. 춘추는 공자가 썼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면 공자 이전에 만들어진 경서는 역易, 서書, 시詩, 예禮이고 공자가 써서 경서가 된 것이 춘추春秋이다. 춘추라고 하는 것과 춘추좌씨전과 춘추공양전과 같은 것들은 급이 다르다. 일단 그것이 기본 경經이고, 유교 경전에다가 주석서나 연구서까지도 포함해서 경經을 말하는 경우도 있는데, 원초적인 텍스트라는 의미에서는 5개가 오경이다. 그다음에 지난번에 경사자집經史子集을 얘기했는데, 자子는 제자백가서이다. 노자, 순자, 한비자 이런 것들은 고전은 아니고, "그 외 기타 등등"에 해당한다. 그것을 해야 학學인 것이다. 그것을 안 하면 학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에 따라 의리지학義理之學에 대한 배움이었으며", 그러니까 경서를 읽으면 아주 자연스럽게 의리지학에 대한 배움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이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이다. 그러면 "의리지학義理之學에 대한 배움이 없으며, 경사經史의 회통会通에 이르지 못하였다." 전목 교수의 평가를 이렇게 살펴본 건데, 이는 식識의 결여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배움이 없었다 라고 하는 것은 공부를 안 했다는 얘기가 아니라, 여기서 이 학學이라고 하는 것은 경에 대한 배움, 경학經學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에 대한 배움이 없으면, 의리지학義理之學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사람과 사태에 대한 평가를 만들어내는 기준점을 얘기하는 것인데, 그래서 그 기준점이 없었다 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 기준점이 없으니까 식별하는 능력이 없는 거니까 식識의 결여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아는 게 많다 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취합은 되어 있는 것인데, 그 취합은 학은 아니다. 지금 여기서 얘기할 때는 학과 식이라고 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경을 읽지 않으면 의리지학에 대한 배움이 없는 것이고, 경사經史의 회통会通은 곧 식이다. 경사의 회통에 이르렀다는 말은 식을 갖췄다 라는 말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학과 식은 별개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 사료를 많이 읽고 수집해서 살펴봤다고 하는 것, 그러면서도 자기가 의리지학에 대한 습득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지난번에 전목 교수가 말했던 사식史識에 이를 수 있겠는데 유지기는 그것이 없다.  그리고 식을 갖춰야 비로소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 포폄褒貶이 가능하다. 《사통》 전체를 보면 오항년 교수가 언급하고 있듯이 역사 서술 자체에 대한 비평서이고 역사 철학적 지향은 없다. 다시 말해서 의리지학에 바탕을 포폄은 없다. 전목 교수는 "뜻이 있는데도 할 수 없는 것과 근본적으로 이 같은 뜻이 없는 것은 크게 다르다"고 했는데, 그러면 유지기가 뜻은 있는데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는가 아니면 근본적으로 이 같은 뜻이 없는 사람이었는가. 전목 교수가 어떤 사람으로 보았는가에 대해서 고민을 좀 해봤는데, 뜻이 있는데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고 본다. 말하자면 유지기도 경사의 회통에 이를 뜻은 없는 건 아니었고, 뜻은 있는데 안 된 것이다. 학이 없었기 때문에 거기에 이를 수 없던 것이다. 학은 무엇을 읽느냐가 학을 식별해 내는 관건이다. 다독이라고 하는 것이 학은 아니라고 늘 얘기를 하는데, 많이 읽었다고 하는 것, 다독은 양적인 기준이다. 그러니까 오경을 안 읽으면 학은 아닌 것이다. 아무리 유지기가 춘추좌씨전을 읽고 어쩌고 해도 오경을 읽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 사람이 학을 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전목 교수는 "하나의 총체를 알아야만 하고 또 반드시 배움의 근본이 있어야 한다"라고 말을 했는데 굉장히 무서운 말이다. 총체가 학의 전체, System이다. System을 알아야만 하고 반드시 배움의 근본이 있어야 된다. 학은 그러니까 단순한 데이터의 묶음 또는 책의 묶음이 아니라 태도까지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학을 해야 식에 이를 수 있고 그렇게 했을 때야 비로소 이제 포폄이 가능하다. 그런데 유지기는 거기까지 간 건 아닌 것 같다 라는 얘기이다.  

전목 교수의 지적은 역사가의 카테고리에서 말한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역사철학적 지향에서 이야기한 것인데, 역사학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무시해도 괜찮다.  그런데 유지기가 조금 실수한 것이 내 편 맨 마지막에 자서自敍가 있는데 거기에서 자기가 뭘 공부했는가를 얘기한다. "고문상서를 배웠는데 매번 그 자구가 심오하여 이해되지 않아 암송하거나 읽기가 어려웠다." 재才가 없었는지 아니면 유독 재미가 없었는지 이게 재미없으면 재才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앞서 제가 말한 것처럼 전목 교수는 이 사람은 경을 읽지 않았구나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비록 여러 차례 회초리를 맞았지만 공부를 마칠 수 없었다." 그래서 마칠 수 없었다 라는 굉장히 중요하다. 基業不成, 공부를 마치지 못했다. 다시 돌아가기 어려운 것이다. 이 시기에 공부를 마칠 수 없었다는 것은 경서가 안 되었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춘추좌씨전은 1년 만에 강송講誦을 마칠 수 있었다. 좌씨전과 춘추는 다르다. 좌씨전은 경이 아니라 secondary이다. "아버지와 형들은 춘추 전문가로 만들 생각을 한 것 같지만", 그러니까 경으로 넘어가게 하려고 했는데, "춘추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직 몰랐다." 간단히 말해서 유지기는 경서 공부에 있어서 치명적인 뭔가를 범한 것인데 춘추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직 몰랐다고 했다. 이 사람은 춘추를 경으로 본 게 아니라 역사책으로 본 것이다. "나머지를 공부하여 새로운 지식을 넓히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니까 그 나머지라고 하는 것은 춘추 이후의 역사이겠다. 그러니까 어렸을 때 춘추와 좌씨전의 구별이 안 된 사람이다. 춘추는 애공 14년에서 끝나고, 좌씨전은 애공 27년에서 끝나는데, 춘추 이후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은 이를 평면적으로, 연대기적으로 본 것으로, 사실 경사자집의 범주화categorization에 따르면 춘추는 위에 있는 것이고 좌씨전은 밑에 있는 것이다. 미견기사未見基事, 이를 몰랐다라고 되어 있다. 춘추는 역사책이 아니라 경이니 더 열심히 읽어야 했다. 

그리고 이제 자서自敍에서 "나의 사통이라는 책도 오늘날 붓을 잡은 사람들의 뜻이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그 점을 걱정해서 역사학의 목표나 지향을 변증하여 그 체계나 체계와 원칙을 확립하고자 만든 것이다." 이것은 아주 잘한 것이다. 사욕변기지귀思慾辨基指歸, 역사학의 지指, 목표, 귀歸, 지향. 귀歸라고 하는 것은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그러니까 희랍어로 말하면 telos이다. 지향점 또는 되돌아가야 할 바. 그러니까 변기辨基, 변증하여, 따져 묻는다는 말이다. 탄기체통殫基體統, "체계와 원칙을 확립하고자", 체통體統이다. 이제 바로 저자가 쓴 사통의 저술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다음에 마지막에 오항년 교수가 인용을 해놓았는데, "이 책이 비록 역사를 위주로 했지만 그 여파는 위로 왕도에 이르고 아래로는 인륜을 펴는 데 이르러, 만물을 총괄하고 모든 존재를 포함할 것이다." 여파소급餘波, 상궁왕도上窮王道, 하섬인륜下掞人倫, 총괄만수總括萬殊, 포탄천유包呑千有. 역사를 위주로 했지만, 말 그대로 역사, 자료 모아서 하는 역사 위주인데, 여파는 위로 왕도에 이르고, 여파라고 하는 말은, 한자를 그대로 쓰면 나머지 파장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볼 수 있는데, 내 의도는 또는 영향력은 그런 것일 텐데, 사실 위로는 왕도에 이르고, 상궁왕도上窮王道의 궁窮은 굉장히 궁리한다는 말이다. 위로는 왕도를 궁리한다는, eidos를 궁리해서, 하섬인륜下掞人倫, 아래로는 인륜을 펼치며, 섬掞은 펼친다는 뜻이다. 지난번에 얘기한 사마천이 하늘과 사람의 관계를 탐구한다는, 구천인지제究天人之際이다. 앞서 전목 교수가 얘기한 것처럼 뜻은 있는 것이다. 여파라는 것이 이런 뜻은 있다 라는 말인데, 이 책에서 할 수는 없었다. 50페이지를 보면 오항년 교수가 "일찍이 작은 문제에 구애된 적은 없었다고 라고 했는데, 이는 과장이 아니다."라고 얘기했는데, 이 표현은 잘 모르겠다. 그리고 "만물을 총괄하고 모든 존재를 포함할 것이다." 사마천의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며"의 변형태이다. 총괄만수總括萬殊에서 수殊는 특수特殊할 때의 수이다.  개개의를 particular 다 포함하고, 포탄천유包呑千有, 만유는 세상의 온갖 물건, ta onta를 만유라고 번역하는데, 만유라고 하기도 하고 천유라고 하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앞에 만수萬殊가 있으니까 뒤에는 천유千有, 포탄천유包呑千有라고 했는데 이것은 역사 철학적인 것이다. 자기가 애초에 이 책의 목표를 역사학의 목표나 지향을 변증하여 체계와 원칙을 확립하고자 만든 것이다 라고 해놓고, 그런데 여파는 이것이다. 여파는 그러니까, 때 전목 교수의 말과 연결해서 볼 때 뜻은 있는데 할 수 없는 것이다 라고 봐야 되겠다. 앞서 춘추와 좌씨전은 다르다고 얘기했는데, 전목 교수가 그것에 명료하게 얘기해 놨다. "사실의 기록이라고 하는 각도에서 말하면 좌전은 춘추에 비하면 매우 상세하다. 그러나 더 높은 역사의 정신을 가지고 말한다면, 당연히 공자의 춘추는 좌전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 이렇게 표현해도 좋지만 공자의 춘추는 좌전과는 다른 범주에 있는 텍스트다. 좌전은 주석서이고, 춘추는 경이다. 춘추는 역사철학 책이고, 좌전은 역사책이다. 아예 범주가 다른 텍스트라고 말할 수 있다. 

다음부터는 본문 내용을 본격적으로 읽어 나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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