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칼리슬: 키르케고르의 <공포와 전율> 입문

 

키르케고르의 <공포와 전율> 입문 - 10점
C. 칼리슬 지음, 임규정 옮김/서광사

옮긴이의 말 | 7
서문 | 11
원전에 대한 간단한 언급 | 19

제1장 주제와 맥락의 개관 | 21
제2장 본문 읽기 | 65
서문 | 65
조율하기 | 81
아브라함에 대한 찬사 | 105
마음으로부터의 예비적 객출 | 128
문제 Ⅰ: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중지는 있는가? | 171
문제 Ⅱ: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의무는 있는가? | 203
문제 Ⅲ: 아브라함이 그가 떠맡은 과업을 사라, 엘리에젤, 그리고 이삭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윤리적으로 변명의 여지가 있는가? | 219
에필로그 | 281
제3장 수용과 영향 | 287
제4장 더 읽어야 할 책들 | 331

찾아보기 | 335

 


26 요하네스 데 실렌티오는 이 문화 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교인들이 직면해 있는 믿음이라는 과제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 아브라함의 사례를 이용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요하네스 데 실렌티오에게 출발점을 제공하는 한 가지 이유는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종교 없는 믿음, 교리 없는 믿음, 제도 없는 믿음, 공동의 관습과 관행에 의해 형성된 종교적 공동체가 없는 믿음이라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전적으로 하느님에 대한 그의 개인적 관계에 있으며, 또 창세기에서 진술되고 있는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하느님과의 지속적인 대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사악을 희생시키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 극한까지 시험받는 것처럼 『공포와 전율』에서 키르케고르의 익명은 자신과 동시대의 사람들이 아브라함이 했던 것처럼 처신할 것인가 하는 문제, 그리고 그들이 심지어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고자 한다. 이렇게 『공포와 전율』은, 키르케고르의 다른 많은 저서가 그런 것처럼 그리스도교인이 된다는 과제에 관한 진정한 반성을 이끌어 내려는 목적으로 저술되었다. 요하네스 데 실렌티오의 전략의 일부는 그리스도교가 과제리는 사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도로 태어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쿄도가 되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116 창세기 설화를 읽으면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명령에 복종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문제는 그가 하느님의 명령에 어떻게 복종하는가, 사랑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두려움 때문인가, 믿음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절망해서인가이다. 이것을 말한 다음, 창세기 22장에서 하느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두려움이 언급되는 부분은 이사악을 희생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수행하고자 하는 그의 내면의 동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또 이 경우 요하네스 데 실렌티오의 독해는 이 이야기의 본래의 성서적 해석에서 벗어날 것이다. 어쨌거나, 이것을 문제삼을 이유가 있으며, 또 아브라함이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행하였다는 주장을 옹호할 이유 또한 존재한다. 

146 하느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생각은 이러한 무한성을 표현한다 실존하는 개인의 관점에서 볼 때 '무한성'은 그것이 하느님의 무한한 실재와 이어져 있고 또 그것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서 실존자의 자기를 의미한다. 그것은 또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의 일부이기도 한 자기, 혹은 영혼의 불멸을 의미하기도 한다. 체념은 유한한, 시간의 세계를 희생하는 대신 영적 차원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무한하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훨씬 주체적인 의미에서 무한하다. 체념의 운동은 그것이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도 철저히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또 이 운동은 매 순간마다 '지속적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점에서 무한하다. 체념은 결코 완결되지 않는 과업이다. 최소한 삶 그 자체가 끝나지 않는 한 말이다. 이런 면에서 그것은 끝이 없는 과제이며, 결코 휴식을 찾을 수 없는 무한한 투쟁이다. 

176 헤겔의 Aufhebung 개념은 『공포와 전율』의 이 절의 맥락에서 아주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윤리적인 것을 '중지시킬' 가능성과 관련한 요하네스 데 실렌티오의 물음에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윤리적인 것을 중지시키는 것은 단순히 그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에서의 역할을 그것에 부여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에 의해 윤리적인 것은 파괴되지 않고 새로운 맥락 안에서 상대화된다. 이 익명이 표현하는 바, '중지되는 것은 무엇이든 상실되지 않고 그 반대로 더 높은 것에서 보존되는 바, 바로 이 더 높은 것이 그것의 텔로스이다' [47]. 비록 윤리적인 것이 중지되더라도, 그것은 개인에 대한 권리를 계속 지닌다. 우리가 『공포와 전율』의 앞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아브라함이 행한 바에 대한 윤리적 표현은 그가 이사악을 살해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종교적 표현은 그가 이사악을 희생제물로 바치려고 했다는 것이다' [24]. 그리고 아브라함의 행위가 이러한 윤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바로 그 행위를 역설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며, 또 관찰자가 아브라함의 모리아산 여행을 이해하려고 헛되이 애쓸 때 그 관찰자의 '공포와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기도 하다. 

177 헤겔의 논리학은 '존재' 개념에서 시작하는데, 이 개념은 무의 개념에 대립된다 이러한 대립자들은 제3의 개념인 '생성'에 의해 결합되는바, 이것은 존재와 무 간의 전이, 혹은 종합을 지칭하며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대립 개념들은 그것들 모두를 포괄하는 운동의 계기들로 파악된다 존재와 무는 생성에서 매개된다. 헤겔은 이성을, 역사의 과정들 위에서 표류하는 추상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것으로 ─ 세계에서 사례화된 것으로, 그리고 역사의 과정에 있는 것으로 ─ 간주하기 때문에 매개는 개념들 간의 관계들 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들까지도 언급할 수 있다. 예컨대, 교회와 같은 사회적 제도는 개개의 사람들과 하느님을,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간의 차이를 인식하는 한편, 동시에 성찬식과 예배 등과 같은 삶의 구체적 형식들에서 그것들을 결합시킴으로써, 매개한다. 요하네스 데 실렌티오가 아브라함의 믿음은 매개될 수 없다고 주장할 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것이 이성적 반성을 통해서는 이해될 수 없다는 것과,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그것이 공유되고 있는 오성에 의존하는 사회적 결합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183 헤겔은 보편적인 것을 구체적이고 또 특정 상황에 놓여 있는 것으로, 공동체의 윤리적 삶에서 구체화된 것으로 그리고 공동체의 가치, 제도, 삶의 방식과 관습에서 성문화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헤겔은 이러한 공동체적 인 윤리적 삶을 Sittlichkeit로 부르고 있는데, 독일어 Sitte는 '관습'을 의미한다. 그는 Sittlichkeit(인륜)와 Moralität(도덕)를 구별하는데, Moralität(도덕)은, 그 기초가 이성이건 감정이건 혹은 양심이건 간에 개인의 도덕의 종류를 지칭하거니와, 이것이 칸트에게 있어서 윤리학의 영역이다. Sittlichkeit(인륜)은 일정한 역사적 기간과 지리적 장소에 특정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헤겔은, 예를 들자면, 고대 그리스인들의 Sittlichkeit(인륜)을 논하고, 이것을 근대 독일의 윤리적 삶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아브라함의 희생의 윤리적 의의를 헤겔적 관점에서 평가한다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고대 히브라인들의 Sittlichkeit(인륜)의 맥락에서 고찰해야 할 것이다. 

291 우리는 『공포와 전율』의 핵심에서 두 개의 서로 다르지만 밀접하게 연관된 물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믿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둘째, 믿음과 윤리의 관계, 종교적 삶과 윤리적 삶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 물음들 모두 특수한 역사적 맥락에 녹아 들어가 있다. 우리는 이 물음들이 모두 1843년에 특정의 문화적 환경에 대한 반응으로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문화적 환경은 한편으로는, 분명히 그리스도교적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 키르케고르가 보기에는 ─ 태도의 변화를, 그리고 추측건대 아직은 온전히 명백해지지 않은 가치의 몰락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296 키르케고르는 (적어도 그 외적 운동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교와 공동체적 삶이 우연히도 19세기 덴마크에서 일치하였다는 사실이, 그가 보기에는, 그리스도교인이 된다는 과제에 본질적인 것인 결단을 은폐하였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그저 기존 관습과 의식에 따름으로써, 덴마크국교회와 같은 제도에 침여함으로써, 특정의 공유되는 어휘를 사용함으로써 스스로를 그리스도교인으로 간주할 수 있었다. 『공포와 전율』에서 그처럼 생생하게 제시되는 딜레마는 윤리적 영역과 종교적 영역을 분리시키며, 따라서 그리스도교직 결단을 내면의 것으로, 각 개인이 안락한 그리스도교 문화가 제공하는 보증없이 응답해야 하는 것으로 드러낸다. 이것은 종교적 삶이 반드시 개인주의적이거나 혹은 초세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반대로,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하느님에 대한 관계는 이 세계에서, 타인들과의 관계를 통하여, 삶 속에 실천되어야 한다. 

310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거라는 약속의 성취가 하느님이 믿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납득하게 하는 것은 전혀 아니며, 다만 그의 가능성의 지평을 변화시키고, 가능한 것에 대한 그의 개념을 확장시키며, 또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느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39]라고 믿게 해 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런 측면에서 그리스도교적 믿음의 전형을 제공해 준다. 하느님이 예수에게서 육화했다고,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 처형 후에 부활했다고 믿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미래와 관련하여 무한히 확장된 가능성의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성육신은 하느님의 무한한 권능의 표식일 뿐만 아니라, 그의 사랑의 표식기도 하며, 또 그렇기 때문에 이 사건에 대한 믿음은 아브라함이 예증하는 개인적 신뢰의 종류에 대한 기초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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