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틸리히: 조직신학 1 - 이성과 계시, 존재와 하나님에 관하여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5.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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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틸리히 조직신학 1 - ![]() 폴 틸리히 지음, 남성민 옮김/새물결플러스 |
머리말
서론
제1부 이성과 계시
Ⅰ. 이성과 계시에 대한 요청
Ⅱ. 계시의 실재
제2부 존재와 하나님
Ⅰ. 존재와 하나님에 관한 물음
Ⅱ. 하나님의 실재
37 모든 관심을 살펴볼 때,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어떤 존재"가 있다. 하지만 이 어떤 존재는 관심 없이도 알려질 수 있고 다루어 질 수 있는 분리된 대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것이 바로 신학의 첫 번째 형식적인 기준이다. 곧 신학의 대상은 우리에게 궁극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 대상이 우리에게 궁극적 관심의 문제가 될 수 있는 한, 그런 대상을 다루는 명제만이 신학적이다.
이 명제의 부정적 의미는 명확하다. 신학은 결코 궁극적 관심이라는 상황을 떠나서는 안 되며, 예비적 관심의 영역 안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해서도 안 된다. 신학은 예술적 창조물의 미학적 가치, 물리학이나 역사학의 가설이 지닌 학문적 가치, 의학적 치료나 사회 재건을 위한 최상의 방법, 정치적 갈등이나 국제적 갈등의 해법에 관해서 판단할 수도 없으며 판단해서도 안 된다. 신학자 자신은 예비적인 관심의 어떤 문제와 관련해서도 전문가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런 예비적인 관심을 다루는 전문가들 역시 신학의 문제를 다룰 때 전문가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 이처럼 신학의 첫 번째 형식적 기준은 궁극적 관심과 예비적 관심 사이의 경계선을 수호하면서 경계선 반대편의 문화 영역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신학까지도 보호한다.
37 예비적 관심과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사이에는 세 가지 관계가 가능하다. 첫 번째는 상호 무관심한 관계이고, 두 번째는 예비적 관심을 궁극적인 것으로 격상시키는 관계이며, 세 번째는 예비적 관심이 그 자신을 궁극적인 것으로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궁극적 관심의 매개물이 되는 관계다. 첫 번째 관계는 조건적이고 부분적이며 유한한 상황과 경험들 및 실존에 대한 궁극적 의미 물음이 불현듯 우리를 사로잡는 순간에 요동치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이런 구분은 무조건적이고 전체적이며 무한한 특성을 지닌 종교적인 관심과는 모순된다. 그것은 우리의 궁극적 관심을 다른 관심 중 하나로 만들어 버리며 궁극적 관심에서 궁극성을 박탈한다. 이러한 태도는 성서적 계명의 궁극성과 첫 번째 신학적 기준의 궁극성을 회피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두번째 관계는 본질적으로 우상숭배적이다. 우상숭배는 예비적인 관심을 궁극적인 관심으로 높이는 행위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본질상 조건적인 것을 무조건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본질상 부분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높이며, 본질상 유한한 것에 무한한 중요성을 부여한다. 그러한 관심의 유한한 기초와 그런 관심의 무한한 주장 사이에 벌어지든 갈등은 궁극적인 것들 사이의 갈등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그것은 성서의 계명뿐만 아니라 신학의 첫번째 기준과도근본적으로 모순된다. 궁극적인 관심과 예비적인 관심 사이의 세 번째 관계는 후자가 전자의 담지자이자 매개물이 되는 것이다. 유한한 관심은 무한하게 중요한 것으로 격상되지 않으며, 무한한 것 중 하나로 취급되지도 않지만, 무한한 것은 유한한 것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실제적인 것이 된다. 그 어떤 것도 이러한 기능에서 배제되지 않는다.
39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된다. 우리의 궁극적 관심의 내용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게 어떤 특정한 대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신조차도 될 수 없다. 신학을 정의하는 첫 번째 기준은 변함없이 형식적이면서 일반적인 것으로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궁극적 관심의 본성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면, 그것은 "궁극적 관심"이라는 개념 분석에서 파생되어야 한다. 우리의 궁극적 관심은 우리의 존재와 비존재를 결정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 대상이 우리에게 존재와 비존재의 문제가 될 수 있는 한, 그런 대상을 다루는 명제만이 신학적이다.
40 우리의 존재를 위협하거나 구원하는 힘을 갖고 있지 못한 그 어떤 존재도 우리에게 궁극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이 맥락에서 "존재"(being)라는 용어는 시간과 공간에서의 실존(existence)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존은 우리에게 궁극적 관심이 될 수 없는 것들이나 사건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위협받고 구조받는다. 하지만 "존재"라는 용어는 인간의 실재 전체, 실존의 구조 및 의미 그리고 목적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이 위협받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상실될 수도 있고 구원받을 수도 있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와 의미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하냐 혹은 존재하지 않느냐"가 궁극적이고, 무조건적이며, 무한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문제다.
43 기독교 신학도 예외가 아니다. 그것은 똑같은 것을 작업하지만, 유일한 신학(the theology)이라는 주장을 전제하면서 작업한다. 이 주장의 토대는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다"(Logos became flash)는 기독교의 교리, 즉 신적 자기 계시의 원리가 "그리스도로서의 예수"(Jesus as the Christ) 사건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는 기독교 교리다. 이 메시지가 참이면, 기독교 신학은 다른 모든 신학의 토대를 초월할 수 있지만, 자신은 다른 모든 신학에 의해서 초월될 수 없는 토대를 획득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구체적인 동시에 절대적으로 보편적인 것을 획득했다. 그 어떤 신화도 그 어떤 신비주의적인 광경도, 그 어떤 형이상학적인 원리도, 그 어떤 성스러운 법도 인격적인 생명이라는 구체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인격적인 생명과 비교해 보면 그런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추상적임을 알 수 있다.
53 철학과 신학은 모두 존재에 대해 질문한다. 하지만 철학과 신학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그 질문에 대답한다. 철학은 존재의 구조 자체를 다룬다. 이와 달리 신학은 우리와 관련한 준재의 의미를 다룬다. 이 차이점으로 인해 신학과 철학의 관계는 서로 일치하는 부분뿐만 아니라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
첫 번째 차이점은 철학자와 신학자가 보여주는 인식적 태도의 차이다. 철학자는 철학적 에로스에 의해 추동되지만, 그는 존재와 존재의 구조에 대해서 분리된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그는 실재에 대한 객관적 시선을 왜곡시킬 수도 있는 개인적 · 사회적 · 역사적 조건을 배제하려고 노력한다. 철학자의 열망은 진리를 얻으려는 열망인데, 이 진리는 그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그 어떤 평범한 비판이라도 겸허히 듣고자 하며, 모든 새로운 통찰을 유연하게 수용할 수 있고, 숨김없이 쉽게 전달될 수 있는 특징을 지닌다. 이런 모든 점에서 철학자는 과학자와 역사학자 그리고 심리학자 둥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들과 협력한다. 그는 경험적인 탐구를 하면서 축적해둔 비판적 분석의 자료들을 제공한다. 모든 학문은 철학에서 연원했다고 이야기되는 것처럼, 그렇게 그것들은 철학자가 실재에 대해 과학 이전의 접근 방식에서 얻을 수 있던 것보다 훨씬 더 새롭고 명확한 내용을 그에게 제공함으로써 철학에 공헌한다. 물론 철학자는 한 명의 철학자로서 과학이 제공한 지식을 비판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강화하지도 않는다. 과학을 통해 얻은 이 지식은 철학자가 존재 구조를 이루고 있는 범주와 구조적인 법칙 그리고 개념을 묘사할 때 그 토대를 형성한다.
343 "신"은 인간의 유한성에 함의된 물음에 대한 대답을 의미한다. 그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명명하는 이름이다. 이것은 먼저 신이라 명명되는 존재가 존재하며, 그다음에 "인간이 그에게 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인다”는 요구가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에게 신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반대로 인간은 자신에게 신이 되는 것에만 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다"라는 표현은 인간의 경험에 있는 긴장을 보여준다. 한편 우리가 구체적으로 만날 수 없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구체적으로 만날 수 없는 것이 실재의 영역이나 상상력의 영역에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344 기독교를 포함해서 모든 종교에서 나타나는 "신"에 관한 의미를 현상학적으로 묘사한 것은 "신"이라는 용어의 의미에 관해 다음과 같은 정의를 제공한다. 신들은 힘과 의미에서 일상적 경험의 영역을 초월한 존재들이다. 인간과 신들은 강도와 중요성에서 일상적 관계를 초월하는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기본적인 묘사가 가진 각각의 요소에 대한 논의는 "신"이라는 의미에 대해 충분한 현상학적 설명을 제시하며, 이것은 자연과 "종교들"이라고 명명되는 현상의 발전을 해석하는 도구가 된다.
346 종교의 역사에는 인간들이 신적인 힘에 참여하고 인간의 목적을 위해서 그것을 사용하려는 시도들이 가득하다. 바로 이것이 마술적인 세계관이 종교적 행위에 들어오고 신적인 힘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기술적인 도구를 제공하는 지점이다. 마술 자체는 유한한 존재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 것을 보여주는 이론이며 실천이다. 그것은 "심리적인"(psychic) 수준, 곧 생동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과 감정적인 것으로 이루어진 수준에 있는 존재들 사이에는 물리적으로 비매개적인 공감과 영향들을 직접적으로 주고받는다는 것을 가정한다. 신들이 존재들인 한, 마술적 관계는 두 가지 방향에서, 곧 인간에게서 시작해 신들에게로 가는 방향과 신들에게서 시작해 인간에게로 오는 양방향에서 가능하며, 그것들은 인간이 신적인 힘에 참여하는 토대가 된다.
426 "창조의 목적”이란 개념은 너무나 모호한 개념이어서 피해야만 한다. 창조는 그 지신을 넘어서는 목적이 없다. 피조물의 관점에서 창조의 목적은 피조물 자체와 그것의 잠재성들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창조자의 관점에서 창조의 목적은 자기 자신을 넘어서 그 어떤 목적도 갖고 있지 않은 자신의 창조성을 행사하는 것이다. 신적인 생명은 본질적으로 창조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칼뱅주의 신학자들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창조의 목적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러한 진술이 가진 매우 상징적인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떤 칼뱅주의 신학자도 하나님이 무언가가 부족하셔서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에게 그것을 얻어야만 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생각을 이교도적인 생각으로 거부했다. 세계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에게 얻고 싶은 영광의 유일한 원인이시다. 하지만 그분이 자신의 영광의 유일한 원인이시라면, 그분은 그 영광을 얻기 위해 세계가 필요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 영광을 자신 안에 영원히 소유하신다. 루터파 신학에 따르면 하나님의 목적은 그분의 피조물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다. 신적 사랑은 자기 자신 외에 사랑의 대상을 원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를 하지 않으시고는 그분이 가질 수 없는 것을 필요로 함을 함의한다. 상호적 사랑은 상호의존적 사랑을 의미한다.
430 섭리(providence) 란 미리-정한 것을 미리-보는 것을 의미한다("그것을 주시함"). 이러한 의미의 모호성은 섭리에 대해 느끼는 모호한 감정을 말해주고, 그것은 사람들이 그 개념에 대해 달리 해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리-봄이라는 요소가 강조된다면, 하나님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아시지만, 자신의 피조물의 자유에는 개입할 수 없는 전지적 관찰자가 되신다. "미리 정함"이라는 요소가 강조된다면, 하나님은 세계의 기초를 세우기 전에·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정하신 입안자가 되신다. 모든 자연적 과정과 역사적인 과정은 이러한 시간을 초월해서 정해진 신적인 계획이 성취되는 것에 불과하다.
453 우리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분리와 재연합의 경험을 하나님의 생명에 적용한다. 우리는 생명과 영의 경우에서처럼 하나님을 사랑으로 상징적으로 말한다. 그분은 시랑이시다. 이것은 신적 생명은 사랑의 특성을 갖고 있지만 잠재성과 현실성의 구분을 넘어서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유한한 이해가 그것을 이해할 때는 신비임을 의미한다. 신약성서는 신적 사랑을 표현할 때 아가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신약성서는 인간끼리의 사랑이나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표현할 때도 동일한 용어를 사용한다. 이 세 가지 사랑의 관계에는 공통점이 있어야만 한다. 우리가 그러한 공통점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아가페 유형의 사랑과 다른 유형들의 사랑을 비교해야 한다.
455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적 창조성에 대해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런 유형의 사랑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주장에 기초가 되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완성을 위하여 그리고 분열되어 있는 모든 존재를 자신의 생명과 하나로 연합하시기 위하여 일하신다. 그리스도인의 상징체계는 신적 사랑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기 위해서 이런 유형들을 사용하곤 했다. 아가페는 다른 유형의 사랑과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는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열망을 신앙의 언어로 말하거나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필요를 신비주의적인 언어로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개념에 리비도 요소를 도입하는 것인데, 시적이고 종교적인 상징 체계를 통해서 그것을 도입했다. 하나님은 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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