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틸리히: 조직신학 2 - 실존과 그리스도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5.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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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틸리히 조직신학 2 - ![]() 폴 틸리히 지음, 남성민 옮김/새물결플러스 |
머리말
서론
A. 『폴 틸리히 조직신학 2』와 『폴 틸리히 조직신학 1』 그리고 조직신학 전체의 관계
B. 제1권에서 제시된 대답의 재진술
제3부 실존과 그리스도
Ⅰ. 실존과 그리스도 요청
Ⅱ. 그리스도의 실재
164 기독교는 "그리스도"라고 불렸던 나사렛 예수가 현실적으로 그리스도, 즉 만물의 새로운 상태, 새로운 존재를 가져오는 자임을 인정함으로써 존재한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주장이 고수될 때마다 기독교의 메시지가 존재한다. 반면에 이 주장이 거부될 때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인정받지 못한다. 기독교는 "예수"라 불리는 사람의 탄생과 함께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의 추종자 중 하나가 그에게 "당신은 그리스도십니다"라고 말했던 순간 태어났다. 그리고 기독교는 이 주장을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살아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기독교가 기초하는 사건이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는 "나사렛 예수"라 불리는 사실이고, 그 다음은 이 사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자들에 의해서 수용된 것이다.
165 기독론을 사유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해석하는 일인데, 특히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일어난 이야기와 관련하여 해석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름과 성으로 구성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개인의 이름― 원후 1 년과 30 년사이에 나사렛에서 살았던 어떤 사람의 이름─과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조합된 것이다. 그 칭호는 신화론적 전승을 통해 전해진 특별한 기능을 가진 특별한 인물을 표현한다. 메시아─크리스토스(Christos)라는 그리스어─는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로, 그는 이스라엘과 세계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확립할 수 있도록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 혹은 "그리스도인 예수” 혹은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혹은 "예수, 바로 그 그리스도"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이 해석된 말 중 어떤 것을 사용할지는 맥락에 의해서 결정된다.
195 공관복음서의 예수가 제시한 메시지의 실체와 바울 서신들에서 제시된 예수에 관한 메시지의 실체는 다르지 않다. 이 진술은 앞의 세 복음서에서 모든 바울적 요소를 제거하고자 했던 자유주의 신학의 시도와는 무관하다. 역사비평은 어느 정도의 개연성을 가지고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일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수록 공관복음서가 보여주는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의 모습에는 더 적은 것만 남게 된다. 이 모습과 그리스도에 관한 바울의 메시지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신약의 증언은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에 관한 증언이라는 점에서 모두 일치한다. 이 증언이 기독교회의 토대다.
195 종말론적 상징 체계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새로운 시대를 가져오는 자다. 베드로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했을 때 그는 예수를 통해 만물의 새로운 상태가 도래할 것을 기대했다. 이 기대가 "그리스도"라는 칭호에 함축되어 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제자들의 기대에 부합하도록 성취되지 않았다. 자연적 사물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물의 상태도 변하지 않은 채 남았고 새로운 시대를 가져올 것 같았던 자도 옛 시대의 권세들에 의해서 파괴되었다. 이것은 제자들이 자신의 희망이 몰락했음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그 소망의 내용을 급진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제자들은 새로운 존재와 희생당한 자인 예수의 존재를 동일시함으로써 두 번째 방식을 선택할 수 있었다. 공관복음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 자신은 메시아 주장과 폭력적인 죽음의 수용을 화해시켰다. 그 기록은 제자들이 이 조합에 저항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메시아에게 역설적 특징이 있다는 주장을 부활절과 오순절로 묘사된 경험이 있고서야 믿을 수 있었다. 바로 바울은 그 역설을 이해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신학적 틀을 제공했다. 문제의 해답으로 다가가는 한 가지 접근법은 그리스도의 첫 번째 도래와 두 번째 도래를 구별하는 것이었다. 사물의 새로운 상태는 두 번째 도래인 그리스도가 영광 중에 다시 옴으로써 창조될 것이다. 첫 번째 도래와 두 번째 도래 중간 시대에는 새로운 존재가 그에게서 현존해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다. 원칙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종말론적 기대가 성취되었다.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자는 비록 인간의 실존적 곤경이라는 조건에서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오직 단편적으로, 예견으로 참여하는 것일지라도, 새로운 존재에 참여하는 것이다.
233 아타나시오스가 교회의 생사 문제라고 옹호했던 니케아의 결정은 계시와 구원에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적 힘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들었다. 니케아 논쟁의 용어를 따르면, 그리스도의 힘은 신적 로고스의 힘, 신적 자기-현현의 원리다. 이로 인해서 로고스의 신적 힘이 아버지와 동등한지 아니면 아버지 이하인지를 묻는 물음이 제기된다. 만약 아버지와 동등하다는 대답이 제시된다면, 사벨리우스주의 이단과 같이 아버지와 아들의 구별이 사라질 수도 있다 만약 아버지 이하라는 대답이 제시된다면 아리우스주의 이단과 같이 로고스는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일지라도 단지 피조물일 뿐이며 따라서 창조된 것을 구원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오직 실제로 하나님인 하나님만이 반신이 아닌 새로운 존재를 창조할 수 있다.
234 니케아 공의회의 정식은 줄곧 삼위일체론에 관한 교회의 기본 진술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5세기의 기독론적 결정들과는 구별되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다. 삼위일체 교리는 모든 하나님 현현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만남에 독자적인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는 관념이 거룩한 것의 심연적 요소와 형식적 요소를 구별하고 그 요소들을 정신에서(spiritual) 일치시킬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었다. 이를 통해 종교사에서 존재했던 삼위일체적 상징 체계를 드러내는 다양한 형식들을 설명할 수 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그 관념을 조직화하고 로고스와 그리스도의 관계라는 결정적 요소를 덧붙인다. 이 뒷부분으로 인해서 조직적으로 발전된 삼위일체 교의가 나왔다. 비록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이 삼위일체 교의에도 기본적인 공헌을 했지만, 그것은 기독론적인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콘스탄티노플에서 이루어진 니케아 신조의 재진술과 확장(381)은 로고스의 신성에 성령의 신성을 추가했다고 하더라도 기독론적인 진술이었다. 만약 그리스도로서 예수의 존재가 새로운 존재라면 인간 예수의 인간적 정신은 그를 그리스도로 만들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로고스처럼 신적인 영 또한 하나님보다 결코 열등할 수 없을 것이다.
243 양자 기독론과 성육신 기독론은 모두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으며 이러저러한 이유로 기독교 사상에서 정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그 기독론 중 어느 것도 다른 것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 양자론, 즉 하나님이 자신의 영을 통해서 인간 예수를 메시아로 입양했다는 관념은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귀결된다. 왜 꼭 예수여야만 했는가? 그리고 이 물음으로 인해서 예수와 하나님 사이의 깨어지지 않는 일치를 창조했던 자유와 운명의 양극성으로 돌아가게 된다.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이 일치를 예수의 기원까지, 심지어 이를 넘어 그의 조상까지 추적한다. 예수의 선재라는 상징은 영원한 차원을 제공하며 역사적 실재(육신)가 된 로고스라는 교리는 "성육신"이라 불리는 것을 제시한다. 양자 기독론을 설명하기 위해서 성육신 기독론이 필요했다 이것은 필연적인 발전이었다. 하지만 성육신 기독론의 완성을 위해서 양자기독론이 필요했다는 것 역시─늘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필연적이다. "성육신"이라는 용어 자체가 ("신적 본성"이라는 용어와 마찬가지로) 다른 종교에 적합하다. 신들은 우주에 속하기 때문에 손쉽게 우주의 모든 형식에 들어올 수 있다. 끝없는 변신(metamorphoses)이 가능하다. 기독교는 "성육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우주를 초월하는 자가 우주 안에, 그리고 우주의 조건 아래 나타난다는 역설을 표현하고자 했다.
267 구원을 필요로 하는 부정성들만큼이나 "구원"이라는 용어도 많은 함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을 궁극적 부정성과 구별할 수 있고, 궁극적 부정성으로 귀결되는 것과 구별할 수 있다. 궁극적 부정성은 정죄나 영원한 죽음, 존재자의 내적 텔로스 상실, 하나님 나라의 보편적 일치에서 배제됨, 영원한 생명에서 배제됨이다. "구원"이라는 단어나 "구원받음"이라는 구절이 사용되는 엄청나게 많은 경우에서 그 단어는 궁극적 부정성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 구원 물음이 엄청난 무게를 가지는 이유는 그 용어가 다음과 같이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물음은 "있음이냐 없음이냐"라는 물음이 된다. "구원"의 더 제한적인 의미는 궁극적 목적─영원한 생명─을 이룰 수도 있고 상실할 수도 있는 방식으로 정해진다. 따라서 초기 그리스 교회에서 사람들은 죽음과 잘못으로부터 구원받기를 요구하고 원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구원은 죄책 및 현생과 다음 생에서(연옥과 지옥에서) 받게 될 죄책의결과로부터 구원받는 것이었다. 고전적 개신교에서 구원은 율법과 불안을 생산하며 정죄하는 율법의 힘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이었다. 경건주의와 부흥운동에서 구원은 회심을 통해 무신적 상태를 정복하는 것과 회심자로 변형되는 것이었다. 금욕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개신교에서 구원은 특별한 죄들의 정복과 도덕적 완전함을 향한 진보였다. 궁극적 생명과 죽음 문제는 (신학적 인문주의라 불리는 어떤 형식들을 제외하고) 이후의 집단들에서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드러나지도 않게 되었다. 구원의 근원적 의미와 우리의 현재 상황과 관련해서 구원을 "치유"로 해석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268 구원은 옛 것에서 갱신됨, 새로운 존재로 이전함이다. 이런 이해에는 다른 시대에 강조되었던 구원의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그 이해에는 인간 실존의 궁극적 완성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그 이해에서 이 완성은 특별한 측면에서, “건강하게, 온전하게"(salvus) 만듦, 곧 "치유"라는 측면에서 이해된다.
270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안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를 통해 이루어진 치유의 특별한 특징은 무엇인가? 만약 그를 구원자로 수용한다면, 그를 통한 구원이란 무슨 의미인가? 그 대답은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외에 구원하는 힘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그는 모든 치유 과정과 구원 과정의 궁극적 기준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를 만난 자들조차도 오직 단편적으로만 치유 받았을 뿐이라고 앞서 말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그에게 있는 치유하는 성질은 완전하고 무제한적이다. 그리스도인은 구원과 관련하여 상대적인 상태에 남아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새로운 존재는 그 치유하는 성질과 힘에 있어 모든 상대성을 초월한다. 바로 이 사실로 인해 그는 그리스도가 된다. 따라서 구원하는 힘이 인류에게 나타나는 곳마다 그 힘은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안에 나타난, 구원하는 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279 하나님의 정의는 죄인의 죄책에 따라서 계산하여 행하는 특별한 처벌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실존적 소외의 자기-파괴적인 결과들이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행위다. 하나님은 그 결과들을 제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결과들은 존재의 구조 자체에 속하며, 하나님이 그 결과를 제거하는 경우 하나님은 하나님이기를 그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께 유일하게 불가능한 일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사랑이기를 그치게 될 것인데 그 이유는 정의가 사랑의 구조적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 형식이 없으면 사랑은 단지 감상주의일 뿐이다. 정의의 실행은 하나님의 사랑의 사역으로서 사랑에 맞서는 것에 저항하고 그것을 깨뜨린다. 따라서 하나님에게는 사랑과 정의의 갈등이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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