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불씨잡변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5. 6. 15.
해제 정도전의 삶과 『불씨잡변』 9
서문 37
발문 44
1 불교의 윤회설을 논변함 47
2 불교의 인과설을 논변함 57
3 마음과 본성에 대한 불교 이론을 논변함 67
4 작용을 본성이라 여기는 불교 이론을 논변함 79
5 불교의 마음과 마음의 흔적에 대해 논변함 86
6 불교가 도(道)와 기(器)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논변함 92
7 불교가 인륜을 훼손하는 것에 대해 논변함 98
8 불교의 자비설을 논변함 102
9 참된 것과 허망한 것에 대한 불교의 주장을 논변함 108
10 불교의 지옥설을 논변함 115
11 불교의 화복설을 논변함 120
12 불교의 걸식행위를 논변함 124
13 선종에 대해 논변함 131
14 불교와 유학의 같고 다름에 대해 논변함 139
15 불법이 중국에 들어온 시기를 논변함 149
16 부처를 섬기면 재난이 닥침 158
17 천도를 버리고 불교의 인과설을 따르는 일을 논변함 166
18 부처를 믿을수록 왕조의 수명이 단축됨 170
19 이단을 배척함 174
20 불씨잡변 지(識) 179
부록 정도전 연보 189
주석 201
참고문헌 233
139 선유가 '유학과 석씨(氏)의 도는 여러 구절에서 같지만, 실제 행하는 일의 내용은 다르다.'고 하였다. 이제 이에 근거하여 미루어 추론해보면, 우리 유가(儒)에서 빔을 말하고, 저들 불가에서도 빔을 말하고, 우리가 고요함을 말하고, 저들도 고요함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빔은 허하되 있음이고, 저들의 빔은 비워서 없는 것이며, 우리의 고요함은 고요하되 느끼는 것이요, 저들의 고요함은 고요하여 없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앎과 실천을 말하고, 저들은 깨달음과 수행을 말한다. 우리의 앎은 만물의 이치가 내 마음에 갖추어 있음을 아는 것이며, 저들의 깨달음은 이 마음이 본래 공(空)하여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의 실천은 만물의 이치를 따라 행하여 이치에 어긋나거나 잘못됨이 없는 것이요, 저들의 수행은 내 마음에서 만물을 끊어버려 내 마음이 만물에 매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이 모든 이치를 갖추고 있다고 보고, 저들은 마음이 만법을 낳는다고 한다. 이른바 모든 이치를 갖추고 있다고 하는 것은, 마음 가운데에 원래 이 이치가 있어 바야흐로 마음이 고요할 때는 지극히 고요하여 이치의 본체가 그 안에 구비되어 있고, 마음이 움직이면 느끼고 통하는데 이것은 이치의 작용이 행해지는 것이다. 「역전」에서 "[역의 본체는]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고, 그 작용이 발하여 감하면 천하의 모든 것과 통한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이른바 마음이 만법을 낳는다는 것은 마음 가운데에 본래 이 법이 없는데, 밖의 사물을 대한 후에 법이 생긴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바야흐로 마음이 고요할 때에는 이 마음이 머물러 있는 사물이나 사건이 없고, 마음이 움직이면 우연히 부딪치는 곳에서 만법이 생긴다는 뜻이다. 불전에서 "[사물에] 자신의 마음을 두지 말아야 청정심이 생긴다."고 한 것이나, "마음이 일어나면 일체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일체 법도 사라진다."고 한 것이 바로 이 뜻이다. 우리는 이치가 진실로 있다고 하는데, 저들은 법이 상호 의존적으로 일어난다고 하니", 어떻게 그 말은 같은데 실제 일은 이처럼 다른가? 우리는 '온갖 변화에 응대한다'고 하는데, 저들은 '일체에 순응하여 거스르지 않고 따른다'고 한다. 그 말이 같은 것 같지만, 이른바 우리가 '온갖 변화에 응대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내 마음이 각각에 응하여 합당한 법칙으로 제어하고 알맞게 대처하여, 그 마땅함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만일 여기에 자식 된 자가 있으면 반드시 효성스럽게 하고 적자가 되지 못하게 하며, 여기에 신하 된 자가 있으면 충신이 되게 하고 난신이 되지 못하게 한다. 동물의 경우에도 소는 논밭을 갈고 사람을 들이받지 못하게 하며, 말은 물건을 싣고 가고 사람을 발로 차고 깨물지 못하게 하며, 범과 이리는 함정을 만들어 우리에 가두어 사람을 물지 못하게 하니, 각각의 고유한 이치에 따라 대처해야 한다.
반면에 부처의 이른바 '일체에 순응하여 거스르지 않고 따른다'는 것처럼 하면 무릇 남의 자식 된 자의 경우에, 효자는 스스로 효자가 되고 적자는 스스로 적자가 되는 것이다. 남의 신하 된 자의 경우에는, 충신은 스스로 충신이 되고, 난신은 스스로 난신이 되며, 소나 말이 논밭을 갈고 물건을 싣고 하는 것도 스스로 갈고 싣고 하며, 사람을 치받고 물고 하는 것도 스스로 치받고 무는 것이어서, 스스로 하는 대로 둘 뿐이요, 내 마음의 작용이 그 사이에 끼어들 여지가 없다. 부처의 학설이 이와 같은지라, 저들은 사물이 스스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다른 사물에 의해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돈 한 푼을 주었는데도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모른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하늘이 사람을 낳아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고 지나침을 억제하고 미치지 못함을 돕는 직책을 준 이유가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144 그러므로 성인이 가르침을 베풀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 마음의 신령스러움을 스스로 알게 하고, 단아함과 엄숙함, 고요함 가운데에서 이 마음을 보존하여 이치를 궁구하는 근본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뭇 이치의 신묘함을 알게 하여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사이에서 궁구하여 마음을 온전히 실현하는 공을 이루도록 하였다. [이처럼] 큰 것과 작은 것이 서로 포섭되며, 동정을 함께 닦아 애초에 안과 밖, 정미함과 조야함을 구분하지 않았다. 이렇게 참으로 오랫동안 노력하여 환하게 통하여 모든 이치를 꿰뚫어 보는데에 이르면, 또한 혼연히 하나가 되는 것을 알아서 참으로 안과 밖, 정미함과 조야함이 없음을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불교] 유학의 이런 공부를 꼭 천박하고 지리하다고 여겨 형체와 그림자를 숨기고 따로 일종의 깊고 황홀하며 난해하여 잘라내 벗어나기 어려운 이론을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문자와 언어 밖에서 분주히 찾도록 하여 '도는 반드시 이와 같이 한 후에야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근래의 불교가 편벽되며 음란하고 사악하여 세간을 등진 바가 더욱 심해진 것이다. 그런데도 이를 옮겨와서 옛 사람의 명덕과 신민의 실제적 학문을 어지럽히니, 이 또한 잘못이다. 주자가 이를 반복적으로 논변하여 친절하게 밝혔으니, 배우는 자는 마음을 다해 스스로 깨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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