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흄: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5.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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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종교에 관한 대화 - ![]() 데이비드 흄 지음, 이태하 옮김/나남출판 |
옮긴이 머리말
등장인물소개
팜필루스가 헤르미푸스에게
제1장
제2장
제3장
제4장
제5장
제6장
제7장
제8장
제9장
제10장
제11장
제12장
옮긴이 해제
찾아보기
7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에서 논의되는 주제인 '자연종교(natural religion)'란 계시종교에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세계의 창조주에 대한 이신론적인 신념을 기초로 온갖 종교적 의례와 신화를 거부하는 한편 도덕적 실천을 유일한 종교직 실천으로 주장한 18 세기 영국이신론자들의 철학적 종교를 말한다. 흄의 대화록에서는 데미아, 필로, 클레안테스라는 세 명의 가상적 인물들이 신의 존재와 본성에 관해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는데, 세 사람 모두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만 신의 본성이나 속성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인식방법에서는 서로가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흄은 이 대화록에서 자연신학에서 논의되는 신의 존재와 본성에 관한 철학적 논증을 비판함으로써 이성을 통해 종교에 이르는 길이 닫혀 있음을 보여주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에게는 이 우주를 창조한 지적 설계자가 있음을 믿는 자연적 신념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인간본성을 통해 자연종교에 이르는 길을 열어 놓고 있다. 이와 같은 귀결은 "철학적 해결이란 방법화되고 교정된, 일상적인 삶에 대한 반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흄의 방법론적 자연주의에 비추어 볼 때 충분히 납득이 가는 결론이다. 다시 말해, 흄에게 있어 종교란 부인할 수 없는 인간의 삶의 한 양식이기에 흄은 이성적으로 합리화할 수 없는 종교적 신념을 무조건 부인하고 배척하기보다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 인간본성의 원리를 규명하고 그 안에서 참된 종교의 토대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14 대화체의 서술방식이 특별히 적합한 어떤 주제들도 있네. 그 경우에는 직설적이고 단순한 서술방식보다 대화체의 방식이 선호되지. 너무도 명백하여 논쟁의 여지가 없으나 한편으로는 너무도 중요하여 주입식으로 강요할 수 없는 학설의 경우 그것을 다루기 위한 특정한 방식이 요구되는데 그 경우 대화체 방식이 지닌 참신성이 주제의 진부함을 덮을 수 있으며, 대화체가 주는 활기가 가르침을 새롭게 할 수 있고 다양한 인물과 성격이 제공하는 다양한 관점이 지루함이나 장황함을 감출 수 있네. 한편, 너무도 모호하고 불확실하여 인간의 이성으로는 그것에 관한 어떤 단정적인 견해를 가질 수 없는 철학적 문제의 경우 그것을 반드시 다루어야 한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화나 대담 방식으로 그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네. 아무도 합리적으로 단언할 수 없는 문제의 경우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의견을 달리할 수 있으며, 비록 어떤 결론에 이르지 못한다 해도 상이한 견해는 적당한 즐거움을 주네. 또한 다루어지는 주제가 호기심을 끄는 홍미 있는 것일 경우 그 주제를 다루는 책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며, 인생에서 가장 크고 순수한 두 가지 즐거움인 학문과 교제가 하나가 되게 하네.
14 다행히 이러한 조건들이 모두 자연종교에 관한 주제에서도 발견되는데 인류가 가장 무지했던 시대에도 사람들이 알고 있던 신의 존재란 너무도 명백하고 확실한 진리이기에 대부분의 천재적인 인물들은 야심차게 신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증명과 논증을 시도하곤 하지 않았는가? 우리에게 있어 모든 희망의 근거이고, 도덕의 가장 확실한 토대이며, 사회의 가장 확고한 지주이고 한순간도 우리의 생각과 사유 속에서 없어서는 안 될 유일한 원리인 이것만큼 그렇게 중요한 진리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이처럼 명백하고 중요한 진리를 다름에 있어서 신의 본성이나 속성, 의지 그리고 섭리에 관해서는 얼마나 모호한 의문들이 생겨나는가? 이러한 문제들은 늘 사람들 사이의 논쟁에 부쳐졌고 여태껏 인간의 이성으로는 어떤 결론에도 도달할 수 없었네. 그러나 이들 주제는 너무도 흥미로운 것이어서 그것에 관한 끝없는 탐구심을 억제할 수 없었지. 하지만 아직까지는 의심, 불확실, 모순만이 우리의 가장 엄밀한 탐구의 결과네.
19 우리가 믿는 감각이 저지르는 오류와 기만을 생각해보세. 또한 모든 학설의 제일원리에 수반되는 해결할 수 없는 난점들, 질료, 원인과 결과, 연장, 공간, 시간, 운동의 개념에 붙어 다니는 모순들, 확실성이나 증거를 지닌다고 생각하는 과학만의 대상인 모든 종류의 양들을 생각해보세. 일부의 철학자와 거의 모든 신학자들이 했던 것처럼 이러한 논제들에 대해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졌을 때 어느 누가 일상생활이나 경험과는 동떨어진 심오하고 난해한 주제에 대해 이처럼 나약한 이성의 기능이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하나의 돌멩이를 이루는 여러 조각들의 결합력 또는 돌맹이의 연장을 결정하는 각 조각들의 조직과 같이 우리에게 친숙한 대상들에 있어서조차도 설명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상호 일치되지 않는 모순된 상황이 드러나는데 우리가 어떻게 세계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이 세계의 역사를 확신을 갖고 추적할 수 있겠는가?
35 목적과 수단의 정교한 일치는 모든 자연에 걸쳐 인간의 고안품, 즉 인간의 계획, 사고 지혜, 지성의 산물과─그것보다는 훨씬 뛰어나지만─정확히 닮아있네. 따라서 결과가 서로 유사하기에 유비의 규칙에 따라 원인 또한 유사할 것이며 그 결과 자연의 창조주는 그가 행하는 일의 크기에 비례해 그의 능력 또한 크겠지만 인간의 정신과 다소 유사하리라고 추론하게 되네. 이 같은 후험적 논증에 의해 그리고 이 논증만으로 신의 존재를 단번에 입증할 뿐 아니라 신이 인간의 정신이나 지성과 유사하다는 것을 입증하게 되네.
41 클레안테스, 생각해보게. 자네가 우주를 집, 배, 가구, 기계와 비교하고 몇몇 상황에서 형성되는 그들간의 유사성으로부터 그들의 원인의 유사성을 추론해낼 때 자내의 그러한 비약적인 걸음 속에 자네의 일상적인 침착함과 철학이 들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우리가 인간이나 다른 동물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생각, 설계, 지성이란 일상적으로 우리가 관찰하는 열과 냉기, 인력과 척력, 그밖에 수많은 것들처럼 우주의 기원과 원리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그것은 자연의 어떤 특정한 부분으로 하여금 다른 부분의 변화를 야기하도록 하는 능동인인 것이네. 그러나 부분에 대한 결론이 전체에 대한 결론으로 타당하게 발전될 수 있겠나? 엄청난 불균형이 모든 비유와 추론을 가로막고 있지 않은가? 머리카락의 성장을 관찰하는 것으로 인간의 발생에 대해 무언가를 알 수 있을까? 꽃잎이 개화하는 방식을 완벽하게 안다고 해서 그것이 나무의 생장에 대해 어떤 지식을 제공할 수 있을까?
69 물론 불필요하게 원인을 증가시키는 것은 참된 철학에 역행하는 것이네. 그러나 이 원리가 현재의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네. 만약 이 우주의 생성에 요구되는 모든 속성을 지닌 하나의 신을 자네의 이론으로 이미 입증했다고 한다면 어떤 다른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이 (불합리한 것은 아니나) 불필요함을 인정하네. 그러나 이 모든 속성이 하나의 실체에 통합되어 있는지 아니면 여러 개별적인 존재들에 흩어져 있는지가 여전히 의문인 한, 우리가 어찌 자연의 현상을 들어 그 논란을 종식시킬 수 있겠는가? 저울 위의 물체가 들어 올려지는 것을 보면 시야에 가려져 있어도 반대편 저울에 그에 상응하는 균형을 이루는 무게가 있음을 확신하네. 그러나 그 무게가 여러 개의 독립된 물체의 총합인지 아니면 하나의 균일하고 통합된 물체인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네. 그리고 그 무게가 우리가 일전에 어떤 단일한 물체로 본 적이 있는 어떤 것보다 더 나간다면 전자의 가정이 훨씬 더 개연적이며 자연적인 것이 될 것이네. 우주를 창조할 만큼 거대한 힘과 능력을 지닌 지적인 존재, 혹은 고대철학의 언어를 빌려 말하자면 그토록 비범한 동물이란, 모든 유비와 심지어 모든 이해까지도 넘어서는 것이네.
71 이 세계는 나중에 자신의 서투른 솜씨가 부끄러워 내다버린 어린 젖먹이 신의 서투른 처녀작이든, 아니면 어떤 의존적이고 열등한 신의 작품으로서 좀 더 우월한 신들의 조롱거리일 것이네. 아니면 늙은이의 작품으로서 노쇠한 신의 노망인 것이고 신이 죽은 후에도 지금까지 그가 부여한 최초의 추진력과 활력으로 위태롭게 지속되고 있는 것이네. 데미아, 자네가 이런 이상한 가정에 대해 혐오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이나 또는 이와 동일한 종류의 수많은 가정들은 나의 가정이 아니라 클레안데스의 가정이네. 신의 속성이 유한하다고 가정하는 순간부터 이러한 모든 것이 발생하는 것이네. 따라서 나로서는 이처럼 다듬어지지 않은 불안전한 신학체계가 어떤 면에서든 전혀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할 수는 없네.
109 이 모든 성찰을 하고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성찰을 한 후에도 자네는 여전히 신인동형론을 주장할 수 있고 또한 인간의 덕목과 동일한 유형의 정의, 박애, 자비, 정직과 같은 도덕적 속성을 신 또한 지니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우리는 신의 능력이 무한함을, 다시 말해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이룰 수 있음을 인정하네. 그런데 인간이나 어떤 동물도 행복하지가 않네. 따라서 신은 이들의 행복을 바라지 않는 것이네. 그의 지혜는 무한하네. 따라서 그는 어떤 목적에 대한 수단을 선택함에 있어 실수할 수가 없지. 그런데 자연의 경로는 인간이나 동물의 행복과는 거리가 머네. 따라서 자연의 경로는 그러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 진 것이 아니네. 모든 인간의 지식을 동원해도 이 이상 더 확실하고 분명한 추론은 없을 것이네. 그런데도 어떤 점에서 그의 박애와 자비가 인간의 그것과 닮았다는 것인가?
134 나는 유신론자에게 묻겠네. 인간의 정신과 신의 정신 사이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나게 큰 측정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지. 그가 경건한 사람일수록 더 쉽게 긍정적으로 말할 것이며 더욱 더 그 차이를 확대하려고 할 것이네. 게다가 그는 그 차이는 아무리 확대되어도 문제가 없다고 말할 것이네. 그러면 나는 단지 명목상으로만 무신론자이고 진심으로는 그럴 수 없는 무신론자에게 묻겠네. 이 세계의 모든 부분들 사이에 보이는 질서와 명백한 조화를 볼 때 어떤 때, 어떤 상황에서든 모든 자연의 작용들 사이에는 어느 정도 유비가 가능하지 않은지. 또한 순무의 부패, 동물의 생식, 인간 사유의 구조가 서로 먼 유비가 가능한 것은 아닌지. 그는 그것을 부인할 수 없으며 쉽게 그것을 인정할 것이네. 그에게서 이 같은 양보를 얻고 나면 나는 그를 계속 밀어붙일 것이네. 그래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묻겠네. 이 우주에 처음으로 질서를 주고 지금도 그것을 유지하는 원리가 자연의 다른 작용들이나 인간 정신의 사유나 구조와 인지할 수 없는 어떤 먼 유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음이 내키지는 않아도 그는 동의를 할 걸세. 그러면 나는 두 논쟁자들에게 큰 소리로 말 할 것이네. 자네들이 논쟁하는 주제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유신론자는 원초적인 지성이 인간의 이성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인정했고, 무신론자는 질서의 원초적 원리가 인간의 지성과 먼 유비를 갖고 있음을 인정했네. 이보게, 자네들은 정도의 문제에 휘말려 들어 정확한 의미도 없고 따라서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는 논쟁에 빠져든 것이 아닌가? 자네가 그렇게 완고하다면 나는 자네가 눈에 띄지 않게 입장을 바꾸어도 놀라지 않을 것일세.
146 자연적인 이성의 불완전을 올바르게 깨닫고 있는 사람은 계시적 진리에 열광적으로 빠지게 되지. 반면 철학의 도움만으로 신학의 전 체계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만한 독단주의자는 더 이상의 어떤 도움도 뿌리치며 이 같은 돌발적인 가르침을 거절하네. 교양인에게 있어서 철학적인 회의론자가 되는 것이 건전하고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는 첫걸음이자 가장 핵심적인 단계이네 이것은 내가 팜필루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말이네. 끝으로 클레안테스, 자네의 학생에 대한 교육과 지도에 여태까지 간섭해 온 나를 용서해주기 바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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