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틸리히: 조직신학 3 - 생명과 영, 역사와 하나님 나라

 

폴 틸리히 조직신학 3 - 10점
폴 틸리히 지음, 남성민 옮김/새물결플러스

서론 • 18

제4부 생명과 영
Ⅰ. 생명과 그 모호성 및 모호하지 않은 생명 요청
Ⅱ. 영적 현존
Ⅲ. 신적인 영과 생명의 모호성들
Ⅳ. 삼위일체적 상징들

제5부 역사와 하나님 나라
서론 • 442
조직신학에서 제5부의 위치와 생명의 역사적 차원 • 442
Ⅰ. 역사와 하나님 나라 요청
Ⅱ. 역사 속에 있는 하나님 나라
Ⅲ. 역사의 종말로서의 하나님 나라

 


41 이 제목에 나오는 "정신"(spirit)이라는 용어는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정신은 스토아주의가 사용한 그리스어로는 프뉴마(pneuma), 라틴어의 스피리투스(spiritus), 히브리어의 루아흐(ruach), 독일어의 가이스트(Geist)에 해당한다. 이런 언어들에서는 의미론적 문제가 발생하지 않지만, 영어에서는 발생한다. 왜냐하면 소문자 "s"의 "spirit"(정신)이라는 단어를 잘못 사용하기 때문이다. "Spirit"(영)과 "Spiritual" (영적)이라는 단어는 오직 신적인 영(divine Spirit)과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그 영의 효과에 대해서만 사용되며 대문자 "S"로 기록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이다.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개별적인 생명의 차원을 지시하고자 "spirit"(영/정신)이라는 단어를 복권해야만 하는가, 또 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하려는 강력한 논증들이 있고 나는 조직신학 제4부에서 계속 그런 논의를 할 것이다. 인도-게르만어뿐만 아니라 셈어에서도 정신을 가리키는 단어들은 기본적으로 "숨"(breath)을 의미한다. 인간은 바로 숨 쉬는 경험을 통해서, 특히 시체에서 숨이 중단되는 일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물음에 집중하게 되었다. 무엇이 생명을 살아 있게 하는가? 인간의 대답은 "숨"이었다. 숨이 있는 곳에는 생명의 힘이 있다. 숨이 사라진 곳에서는 생명의 힘이 사라진다. 생명의 힘인 정신은 정신에 의해 움직이는 무기적인 기체(substratum)와 동일하지 않다. 오히려 정신은 유기적 조직에 덧붙여진 한 부분이 아니라 움직이게 하는 힘 자체다. 그러나 고대 후기 세계에서 신비주의적 경향, 금욕주의적 경향과 관련하여 발전된 어떤 철학들은 정신과 몸을 분리했다.  

45 정신의 차원은 오직 인간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나타나기 때문에 "정신"이라는 용어를 인간론에서 사용되는 다른 용어들, 즉 "영혼"(soul[psyche]), "마음"(mind[nous]), "이성"(reason [logos])과 관련시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영혼"은 "정신"과 매우 유사한 숙명으로 인해 고통받았다. 그 단어는 "영혼에 관한 교설", 즉 심리학이라 불리는 인간의 시도에서 상실되었다. 근대 심리학은 영혼(psyche) 없는 심리학(psychology)이다.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흄과 칸트 이후 근대 인식론이 불멸의 "실체"(substance)로서의 영혼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영혼"이라는 단어는 주로 시에서 보존되었는데 시에서 그 단어는 열정과 감정의 자리를 가리킨다. 현대 인간론에서 인격성의 심리학은 인간 영혼에 의해 발생한 결과로 여겨지는 현상들을 다룬다. 만약 정신을 힘과 의미의 일치라고 정의한다면, 정신은 상실된 영혼 개념을 부분적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421 영적 현존은 한정된 측면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현존이다. 영적 현존이 창조의 상징과 구원의 상징을 전제하고 있으며 완성한다고 할지라도, 영적 현존은 창조의 상징으로 표현된 측면도 아니며 구원의 상징으로 표현된 측면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 정신에 황홀경적으로 현존해 있는 측면이며 정신의 차원을 구축하는 모든 것에 암묵적으로 현존해 있는 하나님의 측면이다. 이러한 측면들은 신적인 것의 본성에 실재하는 것을 종교적 경험과 신학적 전통을 위해 반영한 것이다. 그것들은 동일한 것을 바라보는 다른 주관적인 방법이 아니다. 인간 경험에 있는 주관적 측면이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 해도 그 측면들은 푼다멘툼 인 레(fundamentum in re), 곧 실재 안에 토대를 가진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삼위일체적 상징은 만들어져야 했고 정식화되어야 했으며 옹호되어야 했던 종교적 발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묻는다. 무엇이 그런 상징을 발견하도록 이끌었는가? 우리는 종교 경험의 역사에서 삼위일체적 사고 로 이끌었던 최소한 세 가지 요인을 구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우리의 궁극적 관심에 있는 절대적 요소와 구체적 요소의 긴장이고, 두 번째는 생명개념을 존재의 신적 근거에 상징적으로 적용함이며, 세 번째는 하나님이 창조적 힘, 구원하는 사랑, 황홀경적 변형이라는 세 가지로 현현함이다. 

428 만약 우리의 궁극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의 이름이 하나님이라면 배타적 유일신론의 원리가 다음과 같이 확립될 것이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 하지만 삼위일체적 상징 체계에는 신적 모습들의 다원성이 포함되어 있다. 이로 인해 이 신적 모습 중 어떤 것들에 감소된 신성을 부여하든지 아니면 배타적 유일신론 및 이것과 함께 궁극적 관심의 궁극성을 버리든지 등의 대안이 제시된다. 궁극적 관심의 궁극성은 반쯤만 궁극적인 관심들로 대체되고 유일신론은 그러한 유일신론을 표현하는 유사-신적인 힘으로 대체된다. 바로 이런 상황 때문에 그리스도의 신성은 예전적 헌신 행위에 남지 않고 신학적 해석의 문제가 되었다. 이 문제는 불가피했다. 왜냐하면 그리스인의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수용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종교적 헌신의 내용을 다룰 때 자신의 인지적 기능을 억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문제를 로고스 교설의 도움을 받아 풀고자 했던 초기 그리스 신학의 위대한 시도는 이후에 이루어진 모든 성취와 난점의 기초가 되었다. 

430 아리우스가 가르친 반신(half-god) 예수는 거부되었다. 하지만 삼위일체 문제는 해결되었다기보다 더 많이 거론되었다. 니케아 공의회의 용어에 따르면, 하나님과 그의 아들, 아버지와 아들의 신적 본성"(ousia, nature)은 동일하다. 하지만 휘포스타시스(hypostasis, 위격)는 다르다. 이 맥락에서 우시아는 어떤 것을 그것이게 하는 바로 그것, 즉 그것의 특정한 퓌시스(physis, 본성)를 의미한다. 이 맥락에서 휘포스타시스는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힘, 곧 상호적 사랑을 가능케 하는 존재의 독립성을 의미한다. 니케아 공의회는 하나님-아버지와 같이 로고스-아들도 궁극적 관심의 표현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어떻게 궁극적 관심이 실체적으로는 동일하더라도 상호관계 할 때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신적 모습으로 표현될 수 있는가? 니케아 이후의 투쟁에서 영의 신성이 논의되었고 부정되었으며 최종적으로는 두 번째 보편 공의회에서 인정되었다. 이렇게 된 동기 역시 기독론적인 것이었다. 

580 "역사의 종말" 교리에 해당하는 고전적 용어는 "종말론"이다. 영어"end"와 마찬가지로 에스카토스(eschatos)라는 그리스어에도 공간적·시간적 의미와 질적 가치 평가적 의미가 결합되어 있다. 그 단어는 시간과 공간에서 마지막 것, 가장 먼 것을 제시하기도 하며 최상의 것, 가장 완벽한 것, 가장 숭고한 것─하지만 때로는 가장 저급한 것,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것─을 제시하기도 한다. "종말론"이라는 용어, "마지막 또는 마지막 것들에 관한 교리"라는 용어가 사용된다면, 이런 함의들이 현존해 있는 것이다. 그 용어의 가장 원초적이면서 가장 직접적으로 신화론적인 함의는 "이어지는 모든 날 중 마지막 날"이다. 이날은 시간적 과정을 이루는 모든 날 전체에 속한다. 이날은 그날 중 하나이지만, 그날 이후에는 다른 날이 없을 것이다. 그날에 일어날 모든 사건은 "마지막 것들"(ta eschata)이라고 불린다. 이런 의미의 종말론은 모든 날 중 마지막 날에 일어나게 될 일에 관해 서술한다. 시적이고 극적이며 회화적인 상상력을 가지고 묵시문학으로부터 마지막 심판, 천국과 지옥에 관한 그림들에 이르는 것들을 풍부한 방식으로 기술해왔다. 

하지만 우리의 물음은 이런 것이다. (결코 유대교적이고 기독교적이지만은 않은) 이 모든 심상들의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에스카토스의 질적 함의를 강조하기 위해서 나는 단수 에스카톤을 사용한다. 종말론의 신학적 문제는 앞으로 일어날 많은 것이 아니라 한 가지 “것"으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어떤 것이 아니라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관계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 더 특별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시간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의 "이행"을 상징화한다. 그리고 그것은 창조 교리에 나타난 영원한 것에서 시간적인 것으로의 이행, 타락 교리에 나타난 본질에서 실존으로의 이행, 구원교리에 나타난 실존에서 본질로의 이행 등과 유사한 은유다. 

611 성서의 상징 체계에서 존재자의 영원한 운명과 관련해서 부정적 심판을 표현하는 두 가지 주요 개념은 영구적인 처벌과 영원한 죽음이다. 영원한 생명이 영구적인 행복의 비신화화인 것처럼 영원한 죽음은 영구적인 처벌의 비신화화로 간주할 수 있다. 영원한 죽음이 인간의 영원한 운명의 초시간적 특징을 고려하고 있기 때문에 영원한 죽음은 신학적 의의를 가지게 된다. 또 영원한 죽음은 해석을 필요로 하는데, 표면적 가치대로 받아들인 영원한 죽음에는 완전히 모순적인 두 가지 개념들─영원과 죽음─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612 기독교 사상사를 살펴보면, 두 가지 모순적인 면이 강하게 제시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즉 "영원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죽음의 위협은 대부분의 교회의 실천적 가르침과 설교에서 우세하고 많은 교회에서 공식적 교리로 주장되고 옹호되고 있다. 비록 영원에서 돌아섰다고 하더라도 영원에 뿌리내리고 있으며 따라서 영원에 속해 있다는 확실성은 교회들, 소종파들 내에서 일어나는 신비주의 운동과 인문주의 운동에서 우세한 태도다. 첫 번째 유형의 대표자는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칼뱅 등이며, 두 번째 유형의 대표자는 오리게네스, 소키누스, 슐라이어마허 등이다. 논의의 중심이 되는 신학 개념은 오리게네스의 "만물의 회복" (apokatastasis panton)이다. 이 개념은 시간적인 모든 것은 자신이 발원한 영원한 것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한다. 구원의 개별성에 대한 믿음과 구원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 사이의 갈등을 통해서 모순적인 관념들은 지속적인 긴장과 실천적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이런 논쟁의 상징적 틀이 과거에도 지금도 원시적이라 해서 논의의 요점은 신학적으로 중요하며 아마 심리학적으로는 더 많이 중요할 것이다. 그 논쟁에는 하나님과 인간 및 이 둘의 관계의 본성에 관한 전제들이 내포되어 있다. 그 논쟁은 궁극적 절망과 궁극적 희망 또는 피상적인 무관심과 심오한 진지함을 생산할 수 있다. 

613 기독교 안팎에서 이 첨예한 양극성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 시도 중 세 가지, 즉 "윤회", "중간 상태", "연옥"의 관념들이 중요하다. 이 세 가지는 죽음의 순간을 인간의 궁극적 운명에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느낌을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유아, 아이, 미성숙한 어른의 경우라면 이것은 완전한 부조리일 것이다. 성숙한 사람의 경우라면 이것은 모든 성숙한 인격적 생명에 들어와서 생명의 심오한 모호성을 유발하는 수많은 요소를 무시하는 것이다. 개별적 순간보다도 오히려 생명 과정 전체가 본질화의 정도에 결정적이다. 개체적 생명의 윤회라는 관념은 수백만의 아시아인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쳤고 여전히 어느 정도 끼치고 있다. 하지만 거기서도 "죽음 이후의 생명"이라는 주장은 위로하는 관념이 아니다. 반대로 모든 생명의 부정적 특징이 윤회로 귀결되는데, 이것은 영원한 것으로 회귀하는 고통스러운 방식이다. 18세기 어떤 사람들, 특히 위대한 독일의 시인이자 철학자였던 레싱은 자신의 궁극적 운명에 대한 최종 결정은 죽음의 순간에 이루어진다는 정통주의적 믿음 대신 이 교설을 수용했다. 하지만 모든 윤회 교설의 난점은 서로 달리 나타나는 육화들 사이에서 주체의 동일성을 경험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윤회는 불멸과 마찬가지로 개념이 아니라 상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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