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류 파일: 흄의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 입문

 

흄의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 입문 - 10점
앤드류 파일 지음, 이태하 옮김/서광사

옮긴이의 말 … 5
서문 … 13

1. 배경 지식 … 15
2. 책의 개요와 쟁점 … 27
3. 본문 해제 … 39
4.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를 보는 다섯 가지 관점 … 197
5. 반향 … 215
I. 하만과 칸트 … 215
II. 페일리 … 218
III. 다윈 … 223
IV. 존 스튜어트 밀 … 228
V. 오늘날의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 … 230

더 읽을거리 … 233
찾아보기 … 243

 


16 흄은 『인간 본성에 관한 연구』의 출간이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은 책의 내용보다는 너무 많은 분량과 이해하기 어려운 문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간 본성에 관한 연구』를 좀 더 짧고 이해하기 쉬운 2권의 책으로 다시 출간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출간된 책이 바로 『인간의 이해력에 관한 탐구, 1748)』와 『도덕의 원리에 관한 탐구, 1751)』이다. 이 두 작품과 더불어 대중적인 성격을 지닌 다수의 소론을 통해 흄은 인식론 분야에서 대표적인 경험론의 주창자이자, 종교에 대한 회의론자로 그리고 윤리학에 있어서는 감성을 기반으로 한 자연주의자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인간의 이해력에 관한 탐구』의 10 절 '기적에 대하여'와 11절 '특별섭리와 미래에 대하여'에서 그는 자신의 반성직주의의 입장을 분명히 드러냈다. 이 두 개의 절을 읽어보면 그가 자연종교와 계시종교의 토대를 강력하게 공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7 1752년부터 1757년까지 흄은 에든버러의 변호사 도서관의 관리자로 지냈다. 일이 많지 않았기에 임금은 적었으나 대신에 방대한 분량의 책과 공문서를 접 할 수 있었다. 이 기간에 그는 『영국사』의 집필을 시작했는데 1754년에 나온 첫 권은 스튜어트가의 왕들인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에 관한 것이었다. 이 책에서 흄은 극한 대립을 보이고 있는 휘그와 토리의 사이에서 중립적이며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런 중도적인 입장은 양측 모두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영국사』는 1762년에 완성되었다. 이 책은 종교에 대한 회의론과 기독교인에 대한 편견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성직자들로부터 강한 공격을 받았으나 출판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역사나 정치에 관한 흄의 저작물이 다루고 있는 핵심 주제 중 하나는 종교적 극단주의의 위험을 알리고, 시민 정부가 성직지들의 정치적 권력을 제한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기성종교의 위험에 대한 이러한 정치적 우려는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에 담겨 있는 주제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22 흄의 대표적 철학적 저작인 『인간 본성에 관한 연구』와 『인간의 이해력에 관한 탐구』는 매우 엄격한 경험론을 주장하고 있다. 경험론은 의미와 이해에 관한 이론인 관념에 대한 이론(theory of ideas)과 증거의 성격과 우리 인식의 기원과 한계에 관한 이론인 인식론(theory of knowledge)으로 설명할 수 있다. 관념에 관한 경험론자들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단순 관념(simple idea)은 경험으로부터 받은 인상(impression)으로부터 오며, 그리고 복합 관념 또는 복합 개념은 (단순 관념들의) 조합으로 생겨난다: 우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유니콘이나 황금산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은 단지 말, 뿔, 산 그리고 황금으로 만들어진 여러 사물뿐이다. 인식에 관한 경험론자들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인식, 즉 사태 (matter of fact)와 실재(real existence)에 대한 우리의 모든 유용한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온다. 경험론의 이 두 가지 이론(관념과 인식에 관한)은 흄 철학을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이기에 이것을 떠나 흄 철학을 생각할 수 없다. 만약 다른 입장에 서 있는 철학자가 경험을 넘어선 주장을 할 경우 흄은 그것이 검증 가능하지 않다고, 즉 우리가 그것을 이해한다고 해도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 방도가 없다고 말하거나, 아니면 그런 주장에 대해 우리가 어떤 관념도 갖고 있지 않기에 그것은 사실상 무의미한 주장이라고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인간 본성에 관한 연구』와 『인간의 이해력에 관한 탐구』에서 흄은 의미-경험주의 (meaning-empiricism)를 옹호하는 매우 강력한 논증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데는 주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4 ‘자연신학이란 용어는 일반적으로 계시신학(Revealed Theology)의 대립된 의미로 사용되어왔다. 계시신학은 특별한 경험의 형태로 전해지거나 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특별한 텍스트(성경이나 꾸란)로 제시되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근거로 한다. 계시신학의 문제는 참된 계시를 판별하는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다수의 주장들이 서로 신의 계시라고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그중에 참인 계시가 있다면 믿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 계시된 진리라고 주장되는 교리가 다른 교리와 상충한다면 우리는 이 중에서 어떤 것을 믿어야 할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은 (신비롭게) 세 분이자 한 분이며, 인간(예수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한편 무슬림은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며 인간은 하나님일 수 없다고 말한다.  

25 자연신학은 특별계시에 관심을 두지 않으며 보편적인 인간 이성과 경험에 근거해 신학적 주장을 한다. 자연신학자라면 (제일원리로부터) 선험적(a priori)으로 또는 (경험으로부터) 후험적(a posteriori)으로 논증을 전개해야 한다. 자연신학자는 신학을 자명한 제일원리로부터 시작해 신의 존재를 선험적으로 논증하는 형이상학의 한 분과로 다룰 수 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4/5-74), 르네 데카르트(1596-1650),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1646-1716), 그리고 사무엘 클라크(1675-1729) 가 바로 이런 유(類)의 신학자에 해당한다. 한편 자연신학자는 경험으로부터 시작해 자연이 지적 설계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보여주고 있기에 지적 설계자(신)가 존재한다고 논증할 수 있다. 데미아가 선험적 논변 중 하나(사무엘 클라크가 제시한 우주론 증명)를 소개하고 있는 9부를 제외하고 흄의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는 자연신학의 이 두 번째 유형, 즉 자연에 대한 경험을 근거로 하여 신의 존재와 속성을 논증하는 방식을 주로 다루고 있다. 

26 18 세기 유럽에서 기독교를 옹호한 지식인들은 일반적으로 자연신학의 온건하면서도 부수적인 역할을 인정했다. 자연신학은 신의 존재(때로는 비물질적 영혼의 존재)를 입증하고자 했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아가지 않고 인류를 향한 신의 섭리와 죽은 후 우리 영혼의 운명에 대해 설명을 해줄 계시신학의 여지를 남겨놓았다. 만약 내가 나의 이성과 경험에 근거해 인간의 운명을 관장하는 신이 존재하며 육체의 죽음 후에도 살아 있는 영혼이 있음을 믿게 된다면 기본적인 교리에 대해 의심이 드는 경우 (이런 것에 관해 계시적 진리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제들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고 순종할 것이다. 그러나 자연신학이 이런 부수적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어떠한 신학도 전제로 삼지 않아야 하며, 신학적인 교리도 현상을 근거로 타당하게 도출하는 등, 공정하게 논의를 이끌어가야만 한다. 그러므로 자연신학을 통해 우리가 기독교의 신, 즉 하나님을 입증할 수 있을지는 끝까지 알 수 없는 문제이다. 

192 우주의 질서의 원인 또는 원인들은 아마도 인간 지성과 먼 유비의 관계를 갖고 있다. 다신교를 부인하고 일신교를 옹호하는 증거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판단을 중지해야 한다. 만약 여기서 주장하는 것이 '인간 지성과 먼 유비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라면 이것은 어떤 것도 배제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썩은 순무는 인간의 정신 작용과 어떤 유사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명제는 확장되거나 변경되거나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 신이나 신의 본성에 대해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이 명제는 어떤 종류의 신앙이나 종교적 교리와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삶에 영향을 주거나 행동이나 관용의 원천이 될 수 없다 즉 이런 자연종교는,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어떠한 가르침도 주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자연종교에는 기도, 단식, 제의에 대한 근거가 없으며 또한 세속적인 도덕을 바꾸어야 할 정당한 근거도 없다. 그 유비는 인간 지성에만 적용될 수 있고 어떤 형태로든 정신의 다른 속성에는 적용될 수 없다. 우리가 인간의 정신 또는 지성과 같은 어떤 것을 추론한다 해도 그것은 우리의 정신처럼 열정과 염려 그리고 도덕적 속성을 지닌 정신은 아니다.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주 그 명제에 대해 분명하게 철학적 동의를 해야 한다. 즉 우리 모두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에 동의하나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여기서 우리가 동의하는 것은 세계 질서의 원인 또는 원인들과 우리에게 친숙한 인간의 예술과 기술에서의 질서의 원인(즉 지적 설계) 간에는 '어떤 먼 유비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200 유신론은 흄이 말하는 강한 의미의 자연적 신념이 아니다. 흄이 의인화에 대한 우리의 성향을 우리가 통제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자연적 취약성을 넘어선 어떤 것(즉 자연적 믿음)으로서 간주했다고 생각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유신론의 가설은 최종적으로 의인화 성향이 야기한 부산물 중의 하나일 뿐이다. 참된 자연적 믿음(외적 세계, 타인의 정신, 자연의 일양성에 대한)과 비교해 보면 유신론은 개스킨이 말하는 4개의 핵심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유신론이 자연적 믿음이 아니라면 그것은 증거주의의 범주에 들어오며 따라서 증거의 정도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을 결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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