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랄드 호돈: 빌립보서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5.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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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 ![]() 제랄드 호돈 지음, 채천석 옮김/솔로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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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어표
참고문헌
서론
1.서론 부분
2.소식과 교훈
3.거짓 가르침에 대한 경고 및 따라야 할 모범으로서의 바울의 경험과 삶
4.조화와 기쁨과 정신적인 건전함에 대한 권면
5.빌립보 교인들의 관대함에 대한 감사
6.결론
63 우주에서, 세상에서 그리고 개인의 삶에서 그리스도 예수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빌립보서 전체에서 설명된다. 하지만 체계적인 방식으로 설명되고 있지는 않다. 심지어 위대한 그리스도의 찬미 (2:6-11) 가 단순히 그리스도인이 삶에서 이룩해야 하는 것, 즉 스스로를 낮추며 자신을 버리고 남을 위하여 사는 삶에 대한 실례로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바울에게서 그리스도가 의미하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증거는 겉으로 보기에는 거짓 스승들의 적극적인 위협이 가져다준 필연적인 결과였다. 만약 그토록 바울이 큰 자극을 받지 않았다면, 그의 내적 생명의 휘장은 완전하게 젖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한 삶, 즉 의의 열매로 가득 찬 삶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가능하다(1:11; 참조. 2:5-11).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해서 믿는 자에게 그것을 이루어 주시는가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2:8).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가 죽은 것이, 전통적인 복음처럼, "우리의 죄"를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고전 15:3). 오히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모범으로서 그리스도 자신이 보이신 복종의 모범이라고 말한다 (2:12). 신앙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 포함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함께 의롭게" 되는데, 이것은 "율법을 지킨 것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부터 온 의다"(3:9). 즉 그리스도는 남자와 여자로 하여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는 데 충분하다.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을 구원하시고, 또한 그들의 육신을 그리스도 자신의 육신처럼 변형시키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3:21). 그리스도가 돌아오시는 날은 변형의 날이며 그날은 가까이에 있다(4:6).
64 (1) 바울은 기도나 감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부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어떤 행위를 증거하기 위해 그리스도에게 호소하지 않으며 찬미를 드리지도 않는다. 심지어 바울의 마지막 인사말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4:23) 라는 말은 예수에 대한 직접적인 호소를 교묘하게 피하려고 한 것같이 보인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이 기도와 감사의 대상이고 (1:3, 4:6), 오직 하나님만이 그를 증거하는 분이시며 (1:8), 오직 하나님만이 찬미의 노래를 받으시고 (4:20), 오직 하나님만이 직접적인 호소의 대상이 되시는 분으로 언급된다. (2) 바울은 성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조심스럽게 구분한다.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다 (1:1). 빌립보서에서 예수는 한 번도 "하나님"으로 불리지 않는다. "의의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맺혀지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찬미를 위한 것이다(1:11, 참조. 2:11).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자녀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불린다(2:15). 의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함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3:9).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들을 부르신다(3:14).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들에게 화평을 주시는(4:7) 평강의 하나님이시다(4:9).
어떻게 해서 이러한 구분이 생겼을까?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그토록 확실하게 맡겼던 사람의 말에서 왜 그런 절제가 나타나는 것일까? 아마도 그 이유는 이전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의 유대교적 유일신론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참조. 고전 8:5-6).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등한 신적 존재이며(참조. 빌 1:1; 2:6, 11) 예배를 받아야 할 분(2:10) 임을 확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직 아버지의 호칭으로만 생각했던 것을 예수께 쉽게 이전시킬 수는 없었다.
94 "교제"(코이노니아)는 바울의 특징적인 용어로서. 신약에 19번 나타나는데 그 중에 13번이 바울에 의해 사용되었다. 빌립보서에서 이 단어가 빈번하게 사용되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 사이에 맺어졌던 친밀한 관계에 대한 증거를 제공해 준다. 이 단어는 폭넓은 개념을 지니고 있어서, 인간 사이의 가장 친밀한 관계인 부부 관계로부터 관대함이나 애타심(고후 9:13), 형제간의 화합의 증거, 즉 선물이나 헌금(롬 15:26), 어떤 것에 참여하는 것 등을 암시해 주는 표현이다.
95 "복음"(토 유앙겔리온), 유앙겔리온은 또 하나의 독특한 바울적 용어로서, 신약에 나오는 76번 중에서 60번을 사도 바울이 사용하고 있다. 원래 그것은 "좋은 소식에 대한 보답"을 의미했고, 나중에는 단순히 "좋은 소식”을 의미했다. 신약에서, 특히 바울 서신 가운데서 그것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람들의 죄를 사해 주시고 그들을 자신과 화해시키고자 하셨다는 구체적인 의미의 "좋은 소식"에 국한된다. 바울에게 복음은 입에서 나와 귀로 들어가는 말, 즉 좋은 이야기라는 의미에서의 좋은 소식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기도 했다(참조. 롬 1:16). 이 능력은 하나님이 복음의 창시자이기 때문에, 복음이 말하는 것을 실제로 일어나게 만드시는 효과적인 능력이다.
193 그리스도께서 엔 모르페 데우로 존재하셨다는 말은, 그 분이 자신의 인성 밖에서는 "하나님의 형체"로 존재하는 방법, 즉 하느님께 속한 모든 특성과 자질을 지니는 것 외에는 다른 존재 방법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다소 수수께끼 같은 이 표현을, 저자는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면서 신중하고도 은밀하게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본성을 지니신 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엄격한 유일신론자로 자랐기 때문에 스스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여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의 효과로 인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에게서 나온 말로 보인다. 이것이 정확한 해석이라는 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하나님과 동등됨(토 에이나이 이사 데오_이라는 표현에 의해 확증된다. 토 에이나이에 나오는 정관사는 두 번째의 표현이 첫 번째의 표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여기서 정관사의 기능은 앞에서 언급된 것을 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70 비록 바울이 팔레스틴 밖에서(다소에서) 태어났고, 또 그렇기 때문에 헬라파 유대인이라 불릴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러한 호칭을 본질적으로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는 바리새인의 아들로서(행 23:6), 예루살렘의 히브리인 선생 밑에서 유대 율법을 정확하게 배웠다는 것을 항상 유념하고 있었고, 또한 그 자신이 기꺼이 히브리어를 자신의 언어로 채택했고(행 21:40; 22:2), 그의 선조들의 관습과 생활 방식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행 26:4-5).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가계가 다소를 넘어 팔레스틴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즉 그의 민족의 엘리트에 속하는 사람, 다시 말해서 유대 전통의 보호 벽에 의해 헬라의 영향으로부터 보호된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70 이제 바울은 출생과 교육의 결과로 향유했던 것들에서 떠나, 그 자신의 선택과 근면 덕택에 향유했던 이점을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연속적인 세 개의 간결한 어구로 그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동사를 갖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두가 다 전치사 카타로 시작되고 있다. 그것들 중 첫 번째 것은 카타 노몬 파리사이오스(축자적으로는 "율법에 따르면 바리새인", 의미는 "유대 율법으로 말하자면 나는 바리새인이었다")다. 비록 "바리새"라는 단어가 신약에서 99회 사용되고 있지만, 이것은 그 단어가 복음서와 사도행전 밖에서 나타나고 있는 유일한 경우다. 바울 시대에 바리새파는 "작은" 종파였다. 그러나 율법의 고수에 관한 한 유대 종파들 중에서 가장 엄격한 종파였다(26:5). 바리새파는 단순히 모세의 율법을 복종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서기관들의 해석적 전승인 구전 율법에 포함되어 있는 무수한 계명들을 반드시 모두 지켜야만 하는 의무로 자신들을 옭아맸다. 바리새인들 중에서 가장 열성적인 자들은 무심코 율법을 어기는 행위조차 피하는 세심함을 보였으며, 그들에게 명령된 것 이상으로 행했다.
271 바울이 여기서 "교회"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에클레시아다. 구약(칠십인역)에서는 때때로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데 이 단어가 사용되기도 하며, 언약을 체결하기 위해 시내 산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 즉 야웨께서 지키라고 주신 규례에 의해 그와 결합된 야웨의 백성을 지칭하는 데도 그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고도 유익한 일이다. 그러므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바울이 본 단락을 쓴 아이러니를─아마도 다른 어떤 단어보다도 더─잘 나타내 준다. 바울은 비록 자신이 열렬한 바리새인, 즉 새로운 비느하스로 교회(즉 거룩한 공동체인 하나님의 옛 이스라엘)의 순수성을 보존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교회(즉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고 진정한 상속자이며 후사인 새 이스라엘)를 박해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283 바울은 이 한 구절 속에서 중대한 기본 교리인 이신칭의의 교리를 요약해 놓고 있다. (1)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소원한 관계에 있다. (2)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재정립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3) 그런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데는 하나님이 주도권을 쥐어야만 한다. 참된 의의 원천은 하나님 자신의 구속 행위이기 때문이다. (4)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즉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 주도권을 가지셨다. (5) 하나님의 주도권은 인간의 반응과 마주쳐야만 한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의해, 즉 없어서는 안 될 참된 의를 얻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계속적으로 고백함으로써 설립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신뢰하고 그에게 복종함으로서 성립된다. (6)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 즉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인격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과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에 의해 수용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330 바울이 왜 예수의 칭호로서 이 말을 그토록 드물게 사용했으며, 또한 그가 왜 여기서 이 말을 사용했는가에 대해서는 대답하기가 어렵다. 그것이 드물게 사용된 이유는 아마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1)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이방 신이나 황제를 가리키기 위해 소테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처럼 유일하고도 특별하신 분을 지칭하기 위해 그렇게 평범한 용어를 사용하는 데 주저했을 것이다. 또는 (2) 신자가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는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 바울이 "구원"이란 말을 잘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바울은 신자가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들어가게 될 상태를 가리키기 위해 "구원"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리스도인은 "의롭다 함"은 받았으나 아직 "구원"을 얻은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얻고 있는 중에" 있다(고전 1:18). 구원은 그리스도의 재림시까지는 완성되지 않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 그리스도인에게 이미 일어난 일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의인"이란 말을 더 선호한다. 그러나 그는 아직 이루어져야 할 일을 묘사하기 위해 "구원"이라는 말을 남겨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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