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동: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 10점
김호동 (지은이)돌베개

1장 실크로드와 유목제국
2장 세계를 제패한 몽골제국
3장 팍스 몽골리카
4장 세계사의 탄생



65 그동안 우리가 익숙해져 있던 농경문화 중심의 역사관은 역사의 실상을 정확하고 균형 있게 파악하지 못한 채 상당한 왜곡을 낳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동아시아 지역의 역사에 관해서는 가장 영향력이 강한 중국 중심의 관점이 지금까지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 중국인들이 남긴 자료를 읽을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거기에 투영된 그들의 관점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젖어 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북방초원의 유목민이라고 하면 기마전에 능했던 민족, 그래서 군사적으로는 강력했지만 문화적으로는 후진적인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사의 전개과정에서 유목민은 농경민과 함께 가장 중요한 두 개의 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오늘날 거대한 중국의 뿌리는 유목민들이 건설한 왕조·국가들의 거대함에 근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몽골인이 세운 대원, 만주인이 건설한 대청을 한족이 건설했던 다른 왕조들과 동일한 계열에서 파악하여 그것을 '중국 왕조'의 하나로 인식하는 것은 심각한 역사 왜곡을 초래한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에 흔히 운위되던 '정복 왕조' conquest dynasties 라든가 최근 자주 오르내리는 '대중국'이라는 표현에는 미묘한 개념적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즉 '정복왕조'이든 '대중국'이든 모두 중국이라는 역사의 권역 안에서 논의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원'과 '대청'은 내륙아시아에서 발원한 정치세력이 중국을 정복하고, 중국이라는 지리적 영역과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역량을 그 안에 흡수·포용하면서 발전을 이룩한 제국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중국사'의 영역을 넘는 역사세계를 전제로 논의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66 유목민은 실크로드 융성에 매우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비록 그들 자신이 교역활동에 종사했던 것은 아니지만 실크로드 교역의 강력한 후원자 역할을 하였다. 중국이 정치적·군사적 이유에서 실크로드에 대해 관심을 보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유목국가는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동기에서 실크로드를 필요로 했다. 그들은 취약한 유목 경제를 보완하기 위해 실크로드 연변의 도시들을 장악하고 공납을 받아내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입수한 많은 양의 비단을 판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목민은 이러한 일을 자신들이 직접 하지 않고, 그 방면에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있는 국제상인들을 활용했다. 중세 때에 돌궐· 위구르인들과 소그드 상인들과의 관계는 이러한 메커니즘을 배경으로 생겨난 것이다. 유목민의 군사력과 국제상인의 상업력의 결합은 실크로드를 존속시킨 가장 중요한 힘이었다. 또한 이 양자의 결합관계는 세계사로 하여금 지역 단위의 개별성을 넘어서서 상호연관성을 지닌 과정으로 변모시키는 계기이기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몽골제국도 이 두 집단의 협력의 소산이었다. 몽골제국은 실크로드를 통한 지역 간 교류를 극대화시키면서 세계사의 통합에 결정적인 전기를 이룩하였던 것이다. 

125 칭기스 칸이 세운 '대몽골 울루스'는 그 성격이 처음에는 유목국가였다가 나중에는 초원지대와 농경지대를 모두 지배하는 세계제국으로 그 성격이 바뀌었는데, 그 과정에서 제국의 구조에도 변화가 발생하였다. 일반적으로 그 변화는 몽골제국의 '분열'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왔다. 즉 성공적인 정복전의 결과, 영토가 급격하게 확대되면서 지리적으로 어느 한 곳을 중심으로 효율적으로 통치하기가 어려워지게 되었고, 이와 더불어 대칸의 지위를 누가 계승하느냐 하는 문제를 둘러싼 분쟁이 격화되면서, 1인의 최고 군주가 지배하는 단일한 제국 체제가 무너지고 여러 개의 지역 정권, 즉 '칸국'khanate으로 분열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열의 분수령으로는 1259년 제4대 뭉케 카안이 사망한 뒤 벌어진 격렬한 내전과 쿠빌라이의 집권이 지목되어 왔다. 그 과정에서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에 있던 칭기스 칸의 후손들이 각각 독립하였고, 쿠빌라이도 제국의 수도를 몽골리아에서 북중국으로 옮겼으며 1272년에는 '원'이라는 중국식 왕조명을 채택함으로써, 원, 차가타이 칸국, 킵착 칸국, 일 칸국 등 소위 '4개의 칸국'이 나뉘어 정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이해는 몽골제국의 본질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뒤에서 보다 상세히 논의하기로 하겠다. 그런데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칭기스칸이 건설한 국가 '대몽골 울루스'는 이미 초기부터 여러 개의 울루스들로 이루어진 복합체였다. 각각의 울루스는 칭기스 칸이 나누어 준 유목민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 지배자는 칭기스 칸의 일족, 즉 자식과 동생들이었다. 아직 이 단계에서는 농경지대를 정복하고 그 주민들을 지배하지는 않았다. 그 뒤 전쟁이 확대되고 북중국과 중앙아시아와 같은 정주지대가 제국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게 되자, 대칸은 칭기스 칸의 일족에게 정복의 성과를 나누어서 공동으로 향유한다는 정신에 따라 이들 피정복 정주민들을 일족들에게 분배해 주었다. 그러나 정주지대의 주민들을 관할하고 그들로부터 세금을 걷는 것은 대칸의 독점적인 권한이었다. 정주민들은 제왕의 관할권 밖에 있었던 것이며, 제왕들은 대칸이 거둔 재정 수입 가운데 자신의 몫을 건네받을 뿐이었다. 

175 몽골이 세계를 지배하던 13~14세기는 '대여행의 시대' 였다. 15~16세기의 '대항해의 시대'는 바로 그것에 선행했던 대여행의 시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물론 그 전에도 지역 간 거리의 벽을 넘어 여행했던 사람들은 있었다. 이미 서기전 2세기에 '서역'을 답파한 저 유명한 장건을 위시하여 지중해 연안의 '조지'(시리아 지방)를 다녀간 감영, 그 후 인도로 구법 여행을 갔던 수많은 불승들이 있었다. 또한 서방에서 중국을 방문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중앙아시아는 말할 것도 없지만 저 멀리 서아시아 지방에서 온 상인과 종교인들이 있었다. 7세기 전반에 장안을 찾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선교단이 그러했고, 해로를 통해 중국에 들어와 상업활동에 종사하던 대식(아랍)과 파사(페르시아) 상인들이 그러했다. 그러나 몽골 시대의 여행과 그 이전 시대의 그것과는 몇 가지 중대한 차이점을 보여준다. 

177 원거리 여행의 이면에 몽골제국의 정치적 통합성, 즉 그것이 만들어낸 '몽골의 평화'Pax Mongolica가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유라시아 전체가 하나의 정치적 시스템으로 포괄되었던 적은 없었다. 더구나 유목민 출신이었던 몽골 지배층은 '이동'에 대해서 별다른 제약을 가하지 않았다. 쿠빌라이와 카이두 사이에 벌어진 전쟁처럼 때로는 몽골 세력들 사이의 군사적 충돌이 내륙을 통한 장거리 이동에 불편을 주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서로 적대하는 두 국가가 그러하듯이 국경을 닫고 통행 자체를 금지하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해상을 통한 여행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이처럼 몽골 시대의 여행은, 참가한 사람들의 숫자는 물론이거니와 거리라는 측면에서도 과거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다. 그 결과 많은 여행기들이 쓰였던 것이고, 그것은 종래 사람들이 갖고 있던 외부세계에 대한 관념을 바꾸기 시작했다. 지역에 따라 세계관의 변화는 큰 폭의 편차를 보였다. 가장 큰 변화를 보였던 것은 유럽이었고, 유럽인들은 13~14세기 몽골의 시대가 남긴 유산을 토대로 대항해의 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

244 13세기 초에 건설된 몽골제국은 70년에 가까운 끊임없는 정복전쟁의 결과, 유럽과 인도 일부를 제외하고 유라시아 대륙 거의 대부분을 석권하였다. 전쟁은 초기의 약탈적· 파괴적인 성격이 점차로 희석되어 갔고 농경지대의 경제와 문화에 대한 몽골 지배층의 이해도 그만큼 넓어졌다. 그들은 점차 정주 문명의 후원자로 변신하기 시작했고 역사상 전례 없는 광역적인 교통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세계 각지의 사람들과 문물이 교류하고 융합하는 장을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팍스 몽골리카'를 배경으로 '대여행의 시대'가 가능하게 되었고, 사신, 종교인, 상인들은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남북을 종횡으로 누볐던 것이다. 그것은 결국 이제까지 무지와 설화의 영역으로만 남아 있던 대륙의 가장 먼 지역에 관해서도 소상한 정보를 갖게 해주었다. 

이렇게 볼 때 몽골제국의 시대에 아프리카 대륙을 포함한 상세하고 정확한 '세계지도'가 처음으로 제작되었고, 각 지역에 거주하는 민족들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서술한 '세계 역사'가 처음으로 편찬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의외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이제까지 소통의 부족으로 인한 공간의 한계와 시간의 장벽을 비로소 뛰어넘게 되었고, 이것은 세계가 비로소 하나의 실체로 온전하게 인식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계사의 탄생' 이라 불러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물론 세계에 대한 당시의 지식이 오늘날 우리의 기준으로 볼 때는 여전히 엉성한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전체적인 윤곽과 얼개를 갖추었다는 면에서 그 이전 시대에 비해 질적인 도약을 보여준 셈이다. 

245 13~14세기에 성취된 '세계사의 탄생'은 몽골제국의 영역 내부뿐만 아니라 그 외부에 있던 유럽까지도 같이 공유할 수 있었던 역사적 경험이었다. 그것은 당시 유럽이 '팍스 몽골리카'에서 유리되어 고립된 채로 남아 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 질서에 동참한 결과였다. 동아시아나 서아시아가 유럽에 대해서 갖게 된 정보가 과거에 비해 현격하게 달라진 만큼, 유럽이 다른 지역에 대해 갖게 된 정보 역시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풍부해졌다. 그러나 이들이 공유했던 몽골 시대라는 역사적 체험이 동일한 결과를 그들에게 가져다 주지는 못했다. 유럽은 아시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계기로 '대항해의 시대'로의 진입에 성공했고 해외식민지의 개척과 산업혁명으로 가는 길을 밟아 갔지만,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그렇지 못했다. 유럽과 비유럽의 차이를 몽골제국의 지배가 남긴 약탈과 파괴의 결과라고 해석한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논리일 것이다. 몽골제국 시대에 내륙과 해양을 통한 교역은 어느 때보다 활발했고, 문물의 교류는 그 폭과 깊이에서 전 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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