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몬터: 칼빈의 제네바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5.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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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제네바 - ![]() 윌리엄 몬터 (지은이),신복윤 (옮긴이)합신대학원출판부 |
서문 : 2012년 재판본을 내면서
초판 서문
그림자료 목록
약어표
제1장 대성당과 시장
제1부 도시의 발전
제2장 제네바의 혁명
제3장 독립의 소란(1536-1555)
제4장 칼빈의 전성기(1555-1564)
제2부 칼빈 당시 제네바를 떠받치는 주요 기둥들
제5장 1564년까지으 제네바의 교회
제6장 세속 권력
제7장 망명 이주민들
제3부 칼빈주의의 유산
제8장 칼빈 이후의 제네바
제9장 제네바의 위대함
참고도서 목록
부록 : 목사들에게 행한 칼빈의 고별사 원본
색인(인명, 지명 및 주제)
148 목사들에 대한 칼빈의 고별사는 진기한 문서이다. 그것은 칼빈 생애의 가장 위대한 측면의 많은 부분에 대하여 침묵하고, 그의 많은 저작들에 대하여도 한 마디 말로 지나가고, 많은 나라의 국왕과 군주들과의 교섭을 완전히 도외시하고, 또한 목사회의 국제적 활동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은 제네바에서 목사회의 회원으로서의 그의 생활에 집중하고 있으며, 여기서도 그것은 충분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16세기 제네바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에 대한 최후의 논평, 즉 세르베투스, 볼섹크, 그리고 빼랭 등에 대한 한마디의 이야기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야기의 요지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칼빈이 죽음의 침상에서, 혁명을 하고 있는 제네바에 대하여(사람들은 우상을 찾아내어 그것들을 불태우고 있었으나, 거기에는 종교개혁은 없었다), 그리고 제네바 전반에 대하여(여러분은 고집과 불행한 국민 속에 살고 있습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던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역시 그의 신학의 요점 몇 가지와 그의 성격의 주요 특징의 많은 것들을 약술하였다. 즉, 자기중심주의의 완전한 결함과 인간의 능력에 관한 냉소주의(내가 한 것은 모두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들이며, 그리고 나는 불행한 피조물입니다), 그의 말의 표현의 순수성(나는 항상 단순성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오한 보수주의(나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변하지 않기를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변화라는 것은 모두가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등이 그것이다. 칼빈이 여기서 그리고자 한 자화상은 정직한 자화상이며, 인간의 그 무서운 고결성과 진정성이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150 칼빈은 마음의 여유를 가질 만큼의 사람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그는 자기 일을 위해서 살았다. 즉 가르치고, 설교하고, 저술하기 위해 살았다. 그의 일은 본질적으로 도덕적이고 지적이었으며, 그러므로 제네바에서의 그의 권위도 본질적으로 도덕적이며, 지적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칼빈의 영향력은 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었으며, 그것에 대하여 더 쉽게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였고, 그리고 자신의 의견을 좀처럼 바꾸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의 정신적 지식은 16세기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탁월하였다. 이것은 칼빈이 독창적인, 혹은 창의력이 풍부한 정신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의 탁월한 인문주의적 교사들은 그에게 현대적 변혁에 대한 혐오감을 서서히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칼빈은 종교개혁가로서, 새 교회를 세우려고 하지 않고, 옛교회를 개건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 세기의 다른 사람들과 같이 칼빈은 엄밀하게 논리적, 혹은 변혁적 정신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즉 그를 데카르트나 가장 우수한 스콜라 학자들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칼빈이 독창성에 있어서나, 논리적 엄밀성에 있어서 탁월하지 못했다하더라도, 그의 정신은 여전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상급의 두 개의 자산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는 성경에 관한 한 거의 완전한 최고급의 저장된 기억력이요, 다른 하나는 그를 프랑스 산문학의 초기 대가들 중 한 사람이 되게 한 표현의 유창함이 그것이다. 칼빈은 그의 주장을 놀랍도록 훌륭하게 설명하고, 또한 그 뜻을 명백하게 해석할 수 있었다.
152 칼빈과 그의 동료들은 제네바의 유일한 대중매체를 점령하고 있었다. 설교는 16세기에 있어서 공적인 전달의 주요형식의 하나였으며, 제네바에서는 설교의 횟수가 대단히 많았다. 1550년대에는 설교는 네 교회에서 평균 매주 12번이 있었다. 물론 칼빈과 동료들의 설교의 효과를 정확히 평가할 수는 없지만, 그 효과는 대단하였던 것이 틀림없다. 16세기의 사람들은 보는 것보다는 듣는 것으로 사물을 한층 더 잘 이해하였다고, 류시앙 훼브르는 주장하였다. 이 주장이 과장되어 있을 수도 있지만, 이 시대의 사람들은 주의 깊게 들었으며, 읽는 것보다는 듣는 것을 더 많이 하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적어도 프로테스탄트 사회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유일하며,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 말씀을 설교하는 것은, 칼빈이 동료들에게 상기시킨 대로, 매우 중요한 의미였다. 그것은 순수하고 단순하게, 혹은 장식이나 교묘함, 혹은 풍유와 같은 형식적인 고안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설교자로서의 칼빈 자신에 대하여는 매우 적게 알고 있다. 그의 설교의 많은 것은 그의 비서에 의해서 기록된 속기록으로 남아있으나, 그것들은 이제야 겨우 출판 중에 있다. 설교자로서의 칼빈의 유능함이 위대하다는 것은 틀림없이 확실하다.
153 칼빈의 계획은 제네바에서 철두철미 교화에 의해서 실행되었다. 제네바의 어린이들은 신앙의 본질을 반복하여 기억할 수 있을 때까지 매 주일 오후에 요리문답서로 엄격히 훈련을 받았다. 성인들도 역시 같은 방법으로 종교교육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1557년 말, 감독원은 아직도 "자기 신앙을 설명할 수 없었던" 5인의 노인을 발견하고, 가정교사를 채용하여 다음에 있을 공식 성찬 예식 때까지 요리문답서를 공부하도록 명령하였다. 어린이와 성인 모두는 칼빈의 권징체계에 저항하는 것보다는 순종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분명히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그들의 교사들에게 반대하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그리고 반대하면 반항 죄로 처벌되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154 의심의 여지없이, 많은 평범한 제네바 시민이 이웃의 잘못을 교회 당국에 보고하도록 한 것은, 주로 제네바 시에 하나님의 진노가 내릴 것이라는 공포 때문이었다. 한편 이 교회 당국은 죄를 처벌하는 것보다는 경고하기로 하였다.
212 1555년 이전에, 주기적으로 제네바를 혼란에 빠뜨리게 한 당파의 논쟁 중에, 목사들이 한 일은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된 극히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온건한 행동을 권장하고, 시민의 일치를 증진시키는 것이었다. 1555년 이후에는, 그들은 애국적 저항의 역할을 담당하고, 세속권력을 비판하며, 제네바 통치자들에게는 이전보다 더 주의 깊이 그들의 책임을 다 할 것을 명심하도록 당부해줄 것을 요청받았다. 목사회는 제네바에서 국외자로 있으면서, 사상과 행동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의 독립을 유지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그들은 때로는 흔히 하급 협력자로서 시 당국자들과 공동으로 일하였으나, 그러나 칼빈의 제네바의 세속권력은 자주 단독으로 행동하였다.
242 칼빈의 제네바에서, 어느 시점에 살고 있던 망명자의 총수를 계산하고자 할 때, 「주민등록부」에 상당수의 사람들을 추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기서 또한 상당수의 사람들을 삭감해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도 역시 기억할만한 가치가 있다. 많은 망명자들은 제네바에서 오랫동안 머물지 않았다. 제네바 시는 절망적일 정도로 인구과잉으로 혼잡하고, 그 경제적 기회는 제한되어 있었으며, 종교적 분위기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제네바 정부는 중혼, 방탕한 생활, 방랑, 혹은 재세례파라는 이유로 새로 들어온 망명자 중의 몇 사람을 1557년 말에 추방하였다. 많은 인쇄업자와 서적상은 수년 후에 리용에 있는 자기 집으로 되돌아갔다. 왜냐하면 상당한 생활비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종교전쟁이 일어난 1562년 봄에는 적은 수의 사람들이 위그노 군에 가담하여 싸우기 위해 가버렸다.
253 이들 망명자들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 자신의 특별한 교회를 가지는 것이었다. 이미 보았지만, 사람과 교리의 문제에 관한 한, 제네바의 국가교회는 제네바 사람들의 교회라기보다는 프랑스 인 망명자들의 교회였다. 1560년 후에는 장로회도 그러했다. 제네바의 프랑스인 이민자들의 생활의 중심은 분명히 교회와 그 해외선교기관인 제네바의 인쇄업이었다.
254 영국, 이태리, 스페인까지 이보다 작은 이민들도 그들 자신의 교회를 가지고 있어, 자기들 자신의 지적 활동의 핵심이 되었다. 칼빈 당시의 제네바는 사람들이 여러 나라 언어로 설교를 하고, 저술한 사도시대적 교회였다고 말하였다. 1550년대에 이들 제네바의 외국인 교회가 이루어 놓은 업적은 각자가 다 유사하였으며, 일반적으로 프랑스 인 망명자들에 의해서 확립된 양식에 충실하였다.
255 이들 외국인 교회의 지적 활동은, 특별히 그 출판물에 반영되어 있는 대로, 제네바에서 소비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들은 거룩한 요새에서 조국을 향해 던져진 무기들이었으며, 설득, 혹은 개종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267 어떤 사람에게는, 제네바는 그들의 조국에서의 종교적 박해로부터 피할 수 있는 피난처였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 대단히 소극적인 특징(몇몇 제국의 자유도시와 개혁파의 다른 도시들이 갖고 있던 특징)은 이 비범하고 신성한 도시의 적극적인 자산 때문에 훨씬 더 무게가 주어졌다. 다른 말로 하면, 많은 사람은 공포 때문이 아니라, 희망을 품고 제네바를 찾아왔다.
333 칼빈은 제네바를 크게 예찬하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가 얻을 수 있었던 최대의 후원자였다. 그의 많은 전기 작가들이 일치하게 인정하고 있는 그의 기초적인 업적은, 전통적인 정신적 지도자들을 뿌리째 뽑아버리고, 고질적이며 혁명적이기까지도 한 사람들에게 기독교적 훈련을 서서히 가르치는데 있었다. 훈련(권장)은 칼빈이 기독교강요 제4권 제12장에서 말하고 있는 대로, 종교의 신경이다. 그는 루터가 신앙을 믿고 있었던 것처럼, 훈련을 강하게 믿고 있었다. 한 유명한 역사가는 다소 과장된 문장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칼빈의 체계의 본질은 설교와 선전이 아니라, (물론 이들은 풍부하게 포함하고 있지만) 교회인 동시에 국가이기도 한 가시적 사회의 일상생활 중에서 도덕적 이상을 구체화하려고 한 시도였다. 수도원 제도를 전복했기 때문에, 그 목적은 세속적 세계를 거대한 수도원으로 바꾸려는데 있었다. 그리고 제네바에서 짧은 시간 안에 그것은 거의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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