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큉: 신은 존재하는가 1

신은 존재하는가 1 신은 존재하는가 1 - 10점
한스 큉 (지은이),성염 (옮긴이)분도출판사

서언
가. 이성이냐 신앙이냐?
1.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 르네 데카르트
2.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블래스 파스칼
3. 합리성을 위한 합리주의 반박

나. 새로운 신이해
1. 세계 안에 있는 하느님: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2. 역사 안의 있는 하느님
3. 세속적이고 역사적인 하느님

다. 무신론의 도전
1. 하느님: 인간의 투사(投射)?: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2. 하느님: 기득권에 이바지하는 위안?: 칼 마르크스
3. 신: 유치한 환상인가?: 지그문트 프로이드

라. 허무주의 - 무신론의 결말
1. 허무주의의 대두: 프리드리히 니체
2. 허무주의의 극복?



266 신은 초세계적 존재, 구름 위에, 물리적 〔형이하학적〕 천계에 자리잡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순진하고도 의인화된 관념은 시대에 뒤진 것이다. 신은 자의적이고 공간적 의미에서 세계 "위에" ─ "더 높은 세계에" ─ 사는 "최고유"가 아니다. 인간의 존재와 행위를 두고 이러한 신관은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진다. 신은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자기 마음내키는 대로 무제한한 권력을 휘두르는, 전능하고 절대적인 통치자가 아니다. 

신은 외(外)세계적 존재, 성좌 저편에, 형이상학적 천계에 자리잡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합리주의적이고 이신론적인 신개념은 시대에 뒤진 것이다. 신은 정신적 또는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세계 "밖에 있지 않다. 외세계적인 피안에 ─ "차후의 세계"라고 하겠다 ─ 대상화되고 물질화된 반립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존재와 행위를 두고 이러한 신관은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진다. 신이란 자연법 또는 도덕법에 나름대로 매여서 행동하는, 다시 말해서 입헌군주가 아니다. 세계와 인간의 구체적 생활로부터 대부분 거리를 두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신은 세계 안에 있고 세계는 신 안에 있다. 실재에 대한 획일적 이해가 필요하다. 신을 실재의 일부인 것처럼 생각하여 다른 유한자들과 나란히 있는 하나의 (최고의) 유한자로 보면 안된다. 그는 사실상 유한자 속에 있는 무한자요. 내재 속에 있는 초월이며, 상대자 속에 있는 절대자이다. 바로 절대자로서 신은 세계와 인간과의 관계 속에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이 관계는 부정적 의미의 약함, 의존, 상대성을 가리키는 관계가 아니라, 힘, 한없는 자유, 절대적 주권을 가리키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신은 절대자로서 상대성을 내포하고 창조하며, 자유로운 존재로서 관계라는 것을 가능케 하고 현실화한다. 신은 절대자이자 상대자로서, 차안이자 피안으로서, 초월자이자 내재자로서 모든 것을 포괄하고 모든 것에 삼투하는 자로서 가장 실재적인 실재이다. 사물들의 심부에, 인간 안에, 인류 역사 안에, 세계 안에 있는 가장 실재적인 실재이다. 그러므로 세계 안의 절대자가 세계를 지탱하고 세계를 유지하고 세계를 동행한다. 세계의 기저이자 중심이자 정점이다.  

268 그리스도교 신학은 불변성에 관한 그리스 개념을 상당히 수정하였다. 교부들과 위대한 교부시대의 신학은 언제나, 신을 살아 계시는 하느님으로 보았다. 그렇지만 당대 신학이 불변성에 관한 그리스 개념과 자꾸 결부됨으로 인하여, 살아 계시는 하느님이라는 주장이 갈수록 부정되었다. 그리하여 신에게 부여되는 실재적 변화는 신에게 결핍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데카르트는 물질세계에서의 운동에 관하여 새로운 이론을 내세웠으나 신의 문제에는 아무런 해결도 보여주지 못하였다. 계몽주의 ─ 그리고 라이프니츠의 역동적인 단자론 ─ 이후로 철학자들은 무엇보다도 우주의 생성 (칸트의 초기 사상), 인류 역사의 생성(럿싱), 자연과 인류 역사의 생성(헤르더)에로 관심을 돌렸다. 그러나 신이 해에 있어서 철학적으로 유조한 역사적 출발점을 최초로 구축한 인물은 ─ 피히테와 쉘링을 계승한 헤겔이었다. 그리고 그 관점에 입각하여 헤겔은 생성, 생명, 발전, 역사에 관한 일관되고 포괄적인 철학을 기획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생물학적 진화에 입각하여 발전과 진보가 신에게 갖는 의의를 구명한 최초의 인물은 떼이야르였다(어느 점까지는 화이트헤드도 여기 해당한다). 세계의 발전과 진보, 세계의 생성과 자기 해명, 세계의 상승과 전진이 신에게 갖는 의의를 그는 고찰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헤겔이 신과 세계 과정을 동일시한 표현에는 유보적이면서도, 이 위인들이 도달한 사고의 단계는, 적어도 근대적인 신학적 사고라면 그 이전으로 후퇴해서는 안되는 경계선이라고 천명하는 바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다음과 같이 간단히 그 내용을 총괄하여야겠다. 

신은 절대 부동하고 불변하는 자, 자기만을 인식하고 여타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런 행위나 행동을 취할 수 없는 자가 아니다. 신은 변화하고 시간적인 "형이하학적"〔=물리적〕 세계로부터 떨어진, 불변하고 영원한 "형이상학적" 세계에 거처하는 자가 아니다. 신의 비역사성 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그리스적 형이상학적 신개념도 없다. 인간의 존재와 행위를 두고 이러한 신관은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진다. 신이란 부동의 원동자가 아니며, 인간과 세계 및 그들의 역사성과 아무 관련이 없는 신의 불변하는 이념도 아니다. 

신은 정적 존재 자체가 아니다. 신은 생성을 일체 배제하고 본연적인 미래를 일체 배제하는 존재 자체가 아니다. 그는 자신은 부동하고 불변하는 존재로 머물러 있으면서도 세계를 알고 사랑하는 신이 아니다. 신의 초역사성 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중세적 · 형이상학적 신개념은 없다. 인간의 존재와 행위를 두고 이러한 신관은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진다. 신이란 자기 창조 능력에 의해서, 역사상의 인간과 민족들에게 하강하여, 세계와 자연의 질서와 법칙을 위반하면서까지 위력을 발휘하는 초역사적 인격체가 아니다. 

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이며, 항상 여일하면서도 역사 속에서 역동적으로 현실적이고 부단히 활동한다. 영원히 완전무결함과 동시에, 또한 "역사적" 존재가 될 "가능성"까지도 취할 만큼 신은 자유롭다. 그러므로 "가능성"은 미완성이나 가능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강력함과 충만함과 전능함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신은 영원한 자요, 역사를 기초짓고 지탱하고 완결하는 분이며, 세계와 인간의 실재 전체의 역사적 일차 원인이고 일차 의미이다. 따라서 역사 속에 있는 영원한 신이 곧 근본 역사성이자 역사 속에 있는 능력이자 궁극 역사성이다. 세계와 인간의 중심이자 미래요. 알파요 오메가다. 말하자면, 역사에 내재하면서 역사를 초월하는 신의 능력, 이것이 근대의 역동적인 신이해이다. 인간의 존재와 행위를 두고 이러한 신관은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진다. 신이란 살아 계신 하느님, 자기의 개방 자세와 자유를 모두 발휘하여 인간을 알고 사랑하며, 인간의 역사 속에서 움직이고 끌어당기는 분이다. 

583 허무주의는 가능하다. 실재의 철저한 불확실성, 바로 이것이 허무주의를 가능하게 만든다. 그것이 실제 생활에 있어서든(실천적 허무주의) 아니면 철학적이거나 비철학적 반성에 있어서든(근본적 허무주의)간에.  

그러니까 실재의 일성이니 진리니 선성이 도무지 입증될 수 없는 무엇이라면 그런 것들이 실제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가능하다. 사실적 실존이라는 것마저 의미없는 실존될 수 있다. 무릇 의심이라는 것은 창조적 힘만 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파괴적인 힘될 수도 있으며, 따라서 의심은 ─ 단지 방법론적 의심에 불과할지라도 ─ 실존적 절망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Cogito, ergo non sum("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이라는 발설이 가능하다. 프로이트가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죽음 본능" 그 존재를 두고 많은 심리학자들이 의문을 제기한 이 본능은 본능적 구조의 문제로보다도 오히려 삶의 실존적 위협이라는 문제로 제기될 수 있겠다. 그래서 허무주의가 가능하다고 한다면, 우리는 여기에 덧붙여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허무주의는 논박되지 않는다. 허무주의의 가능성 자체를 반박할, 이성적으로 결론적인 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사는 이 인생이란 결국에는 의미없는 것이라고, 우연, 맹목적 운명, 혼돈, 부조리와 착각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결국은 만사가 모순적이고 의미없고 가치없고 허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모든 것이 모순적이고 의미없고 가치없고 허무라고 하는 논술 자체가 용어상으로 모순이라는 주장이 나올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형식논리학적 반박이 허무주의에 대해서는 거의 설득력이 없다. 또 일체가 모순적이고 의미없고 가치없고 허무라고 하는 주장은 용어상의 모순이 아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논술이 모든 존재의 허무에 관해서 진술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허무주의자에게는 의미없고 가치없기 때문이다. 허무주의의 필연적 귀결은 자살이라는 말도 나왔다. 그러나 허무주의에 대한 이 실제적 논거도 설득력이 없다. 허무주의자에게는 생명이 절대가치가 아니다. 따라서 본인이 생명을 버리든 냉담과 냉소와 불신 속에 계속해서 살아가든 그에게는 무관심한 것이다. 그렇더라도 허무주의자는 자살을 자제하는 것 같다. 그리고 여기서 죽지 않고 사는 것이 최종적으로 의미있는 행동이라고 이해한 듯하다. 그런데 허무주의가 논박되지 않는다면 정반대되는 주장도 할 수 있다. 

허무주의는 또한 입증되지 않는다. 허무주의를 받아들여야 할 필연성을 제시하는 합리적 논거는 없다.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의미없는 것이 아니라고, 우연, 운명, 부조리와 착각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고, 모든 것이 모순적이고 의미없고 가치없고 결국 허무가 결코 아니라고 하는 말도 가능하다. 이와 정반대되는 입장을 그 누가 입증해 보였던가? 우리가 본 것처럼 니체의 명석한 수사학은 쉽사리 사람을 현혹시킨다. 그의 언어는 체험을 보여주지만 내용을 실체화하지는 못한다. 만약 실재가 불확실함을 인정해야 한다면, 실존자의 존재가 부정될 수 있다고 한다면, 부정될 수 있는 바로 그것이 실제로는 하나의 존재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불확실하다. 그렇지만 그 이유만으로 그것이 선험적으로 허무일까? 만약 존재라는 것이 선험적으로 허무라면, 허무주의자는 그것을 부정할 필요가 없고, 이를 부정하는 입장을 고집할 필요도 없다. 만일 존재라는 것이 단지 허무에 불과하다면. 존재는 이러한 부정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허무 속으로 해소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 언어 자체가 "존재가 비존재이다"라거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식으로 허무주의자를 배반하는 결과를 빚는다. 비록 그것으로 형식논리학적 논증이 정당화되지 않겠지만, 그러나 존재라는 것이 허무의 온갖 위협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제기하는 절대적 부정에는 늘상 새로이 저항한다는 사실, 인간이 존재를 전적으로 허무로 환원시켜 버릴 때에 새삼 꾸준하게 이에 항거한다는 그 사실을 통찰하는 일은 가치가 있다. 존재가 결론적으로, 명료하게 자체를 존재로 우리에게 부과하지 않음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존재가 부정되는 바로 그 순간에 그 부정에 항거함으로써 존재는 자체를 존재로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그래서 만약 허무주의의 불가능을 입증하는 합리적 논거가 없다면, 그 역으로 합리주의를 정당화하는 논거도 또한 없다. 만약 일체의 것이 결국은 모순적이고 의미없고 가치없고 허무라면, 그 반대도 선험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결국 일체의 것이 동일하고 의미있고 가치있고 실재한다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이것이 논쟁의 출구요 결산이다. 허무주의는 입증되지 않으나 그 반대 역시 입증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쌍방이 다 승부수가 없는 패착인가? 아마 그런 것 같다. 여하튼 우리로서는 우리가 설정한 질문을 두고 문제의 밑바닥까지 내려왔다. 그렇다면 이제 전환점에 도달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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