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토 아키라 외: 공과 중관 ─ 시리즈 대승불교 6

 

공과 중관 공과 중관 - 10점
기시네 도시유키,사이토 아키라,고시마 기요타카,게이라 류우세이,아카바 리츠,미야자키 이즈미,요시미즈 지즈코,오쿠노 미츠요시 (지은이),남수영 (옮긴이)CIR(씨아이알)

제1장 중관사상의 성립과 전개 - 용수의 사상사적 위치를 중심으로 사이토 아키라
제2장 나가르주나작 『십이문론』과 그 주변 고시마 기요타카
제3장 찬드라키르티의 중관사상 기시네 도시유키
제4장 카말라실라의 중관사상 게이라 류우세이
제5장 즈냐나가르바의 중관사상 아카바 리츠
제6장 아티샤의 중관사상 미야자키 이즈미
제7장 티벳의 중관사상 요시미즈 지즈코
제8장 중관사상의 중국적 전개 - 길장의 중관사상 오쿠노 미츠요시


3 중관사상은 일반적으로 나가르주나(150-250년경)가 확립한 중관학파의 사상이라고 말해진다. 티벳의 전승에서 나가르주나는 제자인 아리야데바(170-270년경)와 함께 중관학파를 기초 지은 이른바 개조의 위치에 놓여 있다. 한편 「중론」, 「백론」, 「십이문론」을 중시하고, 길장(549-623)이 그 교학을 대성한 중국의 삼론학파에서도 「중론」과 「십이문론』의 저자인 용수는 「백론」의 저자인 아리야데바와 함께 중관의 사상을 설한 논사라는 의미에서 문자 그대로 중관사상의 확립이다. 이상과 같이 중국과 티벳에 전해진 중관사상을 중심으로 한 전승에는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인도불교사상사에서 나가르주나의 역할과 위치를 고찰해보면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혹은 사상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나가르주나를 중관학파의 조사로 보는 것이 옳은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이다. 나가르주나는 스스로를 초기 반야경전의 사상을 해명하고, 공의 논증에 노력한 공성론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중관파라는 호칭을 처음으로 분명하게 사용했던 것은 나가르주나가 아니라 바비베카(490-570년경)이다. 그것은 다만 단순한 명칭의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대승불교사상사에서 나가르주나와 아리야데바의 영향은 매우 커서, 현존하는 주석 문헌에 한정한다고 해도, 아상가(395-470년경)와 스티라마티(510-570년경)는 나가르주나의 「중론」에 대한 주석을 지었고, 다르마팔라(530-561)는 아리야데바의 사백론 후반부에 대한 방대한 주석인 「대승광백론석론」을 남겼다. 아상가와바수반두(400-480년경)로 대표되는 초기 유가행파도 나가르주나의 「중론」을 바탕으로 하여, 설일체유부로 대표되는 전통부파와 교리적 논쟁, 비판적 섭취, 그리고 상호영향을 거쳐서 유식학설을 포함하는 사상을 형성하였다. 초기 유가행파에서 사용되었던 논서 가운데 보살지는 나가르주나가 설한 공 사상과 이제, 그리고 번뇌의 근원으로 간주되는 분별과 개념[화], 즉 확산의 이론을 부각시켜서 오사설과 삼성설이라는 유가행파의 주요 교리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4 중관사상이란 중도를 관찰하는 불교의 사상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초기 불교에서 유래하는 비유비무의 중도설을 기초로 하는 불교사상(=중도사상)을 확대한 것이 되지만, 일반적으로 '중관사상'은 용수의 '「중관론」, 즉 「중론」에 입각한 사상', 혹은 그런 흐름을 형성한 학파인'중파의 사상'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본장에서는 그와 같이 중론에 입각한 사상을 초기(2-5세기)중관 사상이라 부르고, 6세기 전반 학파로서 성립한 이후 중관파의 사상을 중기 중관사상, 그리고 8세기 이후 샨타락시타(725-784년경)와 카말라실라(740-797년경)를 중심으로 한 중관파의 사상을 후기 중관사상으로 부르고자 한다. 초기 중관사상은 중관파의 성립 이전으로서, 용수의 「중론」과 그에 대한 논서및 초기의 「중론」 주석서에 의해서 특징지어지는 시대이다. 한편 중기와 후기는 티벳의 전승에 따르면 중관파가 학파로서 성립하여, 바비베카에 의해 형성된 경부중파 와샨타락시타와 카말라실라를 중심으로 하는 유가행파의 학설이 성립한 시대를 말한다. 한편 바비베카의 「중론」에 대한 주석 방법과 내용을 비판하고, 「중론」과 「사백론」 등에 대한 방대한 주석을 지은 찬드라키르티(600-650년경)는 이후 티벳의 전승에서는 종종 귀류논증파의 개조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의 인도에서의 활동은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또한 찬드라키르티가 「중론」에 대한 8대 주석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전승도 있지만, 실제로 그의 영향이 현저하게 나타난 것은 아티샤(982-1054), 니마닥(1055-?), 자야난다(11세기경)가 활약한 11세기 이후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선 '중관사상'이라고 할 때의 '중관'의 의미를 재고찰하고자한다. '중관'이란 문자 그대로 '올바른 견해'로서 불교가 전통적으로 중시했던 '중'(中, madhya, majha)과 '중도'(中道, madhyama pratipat, majhima patipadi)에 대한 관찰을 의미한다. 

10 「중론」에서 발견되는 나가르주나의 논의를 한마디로 말하면, 대승 특유의 술어에 과도하게 의지하지 않고, 초기 팔천송계 반야경전의 사상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확립'이란 공을 비존재로 간주하는 당시의 오해를 바로잡고, 연기와 무자성과 공 각각의 의미와 상호관계를 논하면서, 공의 사상이 초기불교 이래의 전통에서 기인함을 입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중론」 제24장제에서 공자체와 공의 의미, 그리고 공인 여러 사물의 유용성이라고 하는 공을 둘러싼 세 가지 항목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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