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칸트: 윤리형이상학 정초

윤리형이상학 정초 윤리형이상학 정초 - 10점
임마누엘 칸트 (지은이),백종현 (옮긴이)아카넷

제1부 『윤리형이상학 정초』 해제
제2부 『윤리형이상학 정초』 역주

역주의 원칙
유사어 및 상관어 대응 번역어 표
『윤리형이상학 정초』 역주
제1절 평범한 윤리적 이성인식에서 철학적 이성인식으로의 이행
제2절 대중적 윤리 세계지혜에서 윤리 형이상학으로의 이행
제3절 윤리 형이상학에서 순수 실천이성 비판으로의 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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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고대 그리스 철학은 세 가지 학문, 즉 물리학, 윤리학 및 논리학으로 나뉘었다. 이 구분은 사태의 본성에 완전히 알맞은 것으로, 사람들은 이것에 가령 구분의 원리를 덧붙이는 일 같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개선할 것이 없다. 이렇게 하여, 한편으로는 구분의 완벽성을 확보하고, 한편으로는 필연적인 하위 분과들을 올바르게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이성인식은 질료적인 것으로 어느 객관을 고찰하거나, 또는 형식적인 것으로 객관들의 구별 없이, 순전히 지성과 이성 자신의 형식 및 사고 일반의 보편적 규칙들만을 다룬다. 형식적 철학을 일컬어 논리학이라 한다. 그러나 특정한 대상들과 그 대상들이 종속하는 법칙들을 다루는 질료적 철학은 다시금 두 겹이다. 왜냐하면 이 법칙들은 자연의 법칙이거나 자유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전자의 학문을 물리학이라 일컫고, 후자의 학문이 윤리학이다. 또한 저것은 자연이론이라고 불리고, 이것은 윤리 이론이라고도 불린다. 

114 철학이 경험의 근거들에 발을 딛고 있는 한, 모든 철학은 경험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론들을 오로지 선험적 원리들에서 개진하는 철학은 순수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후자가 만약 순전히 형식적인 것이라면, 논리학이라고 일컫지만, 그것이 지성의 특정한 대상들에 제한되어 있다면, 형이상학이라 일컫는다. 

이렇게 해서 두 겹의 형이상학의 이념(개념), 즉 자연 형이상학의 이념(개념)과 윤리 형이상학의 이념(개념)이 생긴다. 그러므로 물리학은 경험적 부분을, 그러나 또한 이성적 부분을 가질 것이고 윤리학도 마찬가지일 것인데, 그럼에도 이 경우는 그 경험적 부분을 특별히 실천적 인간학이라고 그러나 이성적 부분은 본래 도덕학"이라고 일컬을 수 있겠다. 

118 하나의 윤리 형이상학은 불가결하게 필요하다. 선험적으로 우리 이성 안에 놓여 있는 실천적 원칙들의 원천들을 탐구하기 위한 사변적 동인에서도 그러하지만, 윤리 자신이 그것을 올바르게 판정할 실마리와 최상의 규범이 없는 한, 갖가지 부패에 굴복하기 때문에도 그러하다. 무릇, 어떤 것이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라면, 그것이 윤리 법칙에 알맞은(따른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것은 또한 윤리 법칙을 위하여(때문에) 일어난 것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저 알맞음(따름)은 단지 매우 우연적이고 불안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비윤리적 근거는 때로는 합법칙적인 행위들을 불러일으키지만, 더 자주는 법칙 위배적인 행위들을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릇 윤리적 법칙은 그것의 순수성과 진정성 실천적인 것에서는 바로 이것이 가장 중요하거니와에 있어 순수철학이 아닌 어떤 다른 곳에서 찾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 순수철학(형이상학)이 선행해야만 한다. 이것 없이는 도무지 어디에서도 도덕철학은 있을 수 없다. 저 순수 원리들을 경험적인 것들 가운데다 섞는 그런 것은 철학이라는 이름조차 쓸 수 없다. 

120 나는 순수 실천이성 비판을 위해서는, 만약 그것이 완수되려면, 실천이성의 사변 이성과의 통일이 어떤 공동의 원리에서 서술(현시)될 수 있어야 함을 요구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마침내는 단 하나의 동일한 이성만이 있을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이 순전히 적용되는 데서만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전혀 다른 방식의 고찰을 끌어들여 독자를 혼란시키지 않고서는 그런 완벽함을 성취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나는 '순수 실천이성 비판'이라는 명칭 대신에 '윤리 형이상학 정초'라는 명칭을 썼다. 

121 이 정초는 다름 아닌 도덕성의 최상 원리의 탐색과 확립이다. 이것만이 그 의도에 있어서 전적인 그리고 다른 모든 윤리적 연구들과 차별화되는 과업을 이룬다. 이 중요한. 그리고 이제까지 전혀 충분하게 해명되지 못했던 주요 물음에 대한 나의 주장들은 동일한 원리를 전체 체계에 적용함으로써 한껏 명료함을 얻고, 이 원리가 곳곳에서 시사하는 충분성에 의해 훌륭한 확증을 얻을 것이다. 

123 이 세계에서 또는 도대체가 이 세계 밖에서까지라도 아무런 제한 없이 선하다고 생각될 수 있을 것은 오로지 선의지뿐이다. 지성, 기지, 판단력, 그 밖에 정신의 재능들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들, 또는 용기(의기), 결단성, 초지일관성 같은 기질상의 성질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많은 관점에서 선하고 바람직스럽다. 그러나 이런 것들도, 만약 이런 천부의 자질들을 사용하는, 그 때문에 그것의 특유한 성질을 성격이라고 일컫는 의지가 선하지 않다면, 극히 악하고 해가 될 수도 있다. 행운의 천부와 관련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권력, 부, 명예, 심지어 건강도, 그리고 행복이라는 이름 아래서의 자기 상태에 대한 전적인 편안함과 만족도 의기를 불러일으키고, 그럼으로써 자주 사람을 오만방자하게 만든다. 이것들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을, 그리고 그와 함께 행위하는 전체 원리를 올바르게 하고, 보편적으로-합목적적이게끔 만들어주는 선의지가 없는 곳에서는 말이다. 이성적이고 편파적이지 않은 관객은 순수하고 선한 의지의 특징을 갖추지 못한 자가 부단히 무사 번영함을 보는 것만으로도 결코 흡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언급할 것도 없이, 선의지는 행복할 만함(품격 있음)의 필요불가결한 조건을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132 의무로부터의 행위는 그것의 도덕적 가치를 그 행위를 통해 달성해야 할 의도에서 갖는 것이 아니라, 그에 따라 그 행위가 결의되는 준칙에서 갖는 것으로, 그러므로 의무로부터의 행위는 행위 대상의 현실성에 의존해 있는 것이 아니라, 욕구능력의 모든 대상들과는 무관하게 행위를 일어나게 한 의욕의 원리에 순전히 의존해 있는 것이다. 우리가 행위들에서 가질 수 있는 의도들과 그리고 의지의 목적들 및 동기들인 그 행위들의 작용들이 행위들에게 무조건적인 도덕적 가치를 부여할 수 없음은 앞서의 설명으로 명백하다 

133 의무는 법칙에 대한 존경으로부터 말미암는 행위의 필연성이다. (의무는 법칙에 대한 존경에서 비롯한 필연적 행위이다.) 내가 뜻하는 행위의 결과로서의 객관에 대해 나는 물론 경향성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러나 결코 존경을 가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바로 그 결과는 한낱 하나의 의지의 결과이지 활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경향성 일반에 대해서도, 그것이 나의 것이 됐든 다른 누구의 것이 됐든, 존경을 가질 수는 없다. 나는 기껏해야 나의 경향성에 대해서는 시인을 할 수 있을 뿐이고, 다른 이의 경향성에 대해서는 때때로 좋아할 수 있을 뿐이다. 

165 정언명령은 오로지 유일한 즉, 그것은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그 준칙을 통해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오직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는 것이다. 

165 그에 따라 결과들이 일어나는 법칙의 보편성이 본래 가장 보편적인 의미에서 (즉 형식의 면에서) 자연이라고 일컬어지는 것. 다시 말해, 그것이 보편적 법칙들에 따라 규정되어 있는 한에서, 사물들의 현존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을 형성하므로, 의무의 보편적 명령도, "마치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너의 의지에 의해 보편적 자연법칙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하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171 이에 이르려고 의도함에 있어 극히 중요한 것은. 이 원리의 실재성을 인간 자연본성의 특수한 속성으로부터 도출하고자 하는 생각조차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왜냐하면 의무는 행위의 실천적-무조건적 필연성(실천적-무조건적으로 필연적인 행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무는 모든 이성적 존재자─도대체가 명령이라는 것은 이러한 존재자에게만 해당될 수 있는 것이다─에게 타당해야 하고, 오로지 이 때문에 모든 인간 의지에 대해 법칙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인간성의 특수한 자연 소질로부터, 어떤 감정이나 성벽으로부터, 심지어는 가능한 경우, 인간 이성에 고유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에 타당하지는 못한 특수한 성향으로부터 도출된 것, 그것은 우리에게 준칙은 제공할 수 있어도, 그러나 법칙은 제공할 수 없다. 즉 성벽과 경향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우리가 그에 따라 행위하는 주관적 원리는 제공할 수 있어도, 그러나 설령 우리의 모든 성벽과 경향성, 자연적 성향이 반대하더라도, 그에 따라 우리가 행위해야만 하도록 지정된 객관적 원리는 제공하지 못한다. 

175 인간은, 그리고 일반적으로 모든 이성적 존재자는 목적 그 자체로 실존하며, 한낱 이런저런 의지의 임의적 사용을 위한 수단으로서 실존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그리고 일반적으로 모든 이성적 존재자는 그의 모든 자기 자신을 향한 행위에 있어서 그리고 다른 이성적 존재자를 향한 행위에 있어서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서 보아야 한다. 경향성들의 모든 대상들은 단지 조건적인 가치만을 갖는다. 왜냐하면 만약 경향성 및 그에 기초한 필요들이 없다면, 그것들의 대상은 아무런 가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향성들 자신은 필요의 원천들로서, 그 자체를 소망할 만한 절대적 가치를 갖지 못한 것으로, 오히려 그러한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 그것이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보편적 소망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로 얻어질 수 있는 모든 대상들의 가치는 항상 조건적이다. 그것들의 현존이 비록 우리의 의지에 의거해 있지 않고, 자연에 의거해 있는 존재자들이라 하더라도, 만약 그것들이 이성이 없는 존재자들이라면, 단지 수단으로서 상대적 가치만을 가지며, 그래서 물건들이라 일컫는다. 그에 반해 이성적 존재자들은 인격들이라 불린다.  

176 네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255 자연에 관련한 이성의 사변적 사용은 세계의 한 최상 원인의 절대적 필연성에 이른다. 자유에 관한 이성의 실천적 사용 역시 절대적 필연성에 이른다. 그러나 다만 (그것은) 이성적 존재자 그 자신의 행위들의 법칙들의 필연성이다. 무릇, 그 인식을 필연성에 대한 의식까지 밀고 가는 것이─필연성이 없으면 인식은 이성의 인식이 아닐 터이니 말이다─, 우리 이성의 모든 사용의 본질적 원리이다. 그러나 만약 현존하는 것, 또는 일어나는 것, 또는 일어나야만 할 것의 조건이 근저에 놓여 있지 않으면, 이성은 현존하는 것, 또는 일어나는 것의 필연성도, 일어나야만 할 것의 필연성도 통찰할 수 없다는 것 또한 그 동일한 이성의 똑같이 본질적인 제한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조건에 대한 끊임없는 조회에 의해 이성의 충족은 단지 언제나 계속해서 뒤로 미뤄질 뿐이다. 그래서 이성은 쉼 없이 무조건적으로- 필연적인 것을 찾고, 그것을 개념화할(이해시킬) 어떤 수단도 없이, 그것을 상정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이 전제와 화합하는 개념만 발견할 수 있다면, 충분히 행복하다. 그러므로 이성이 무조건적인 실천법칙─정언명령은 그러한 것임에 틀림없다─의 절대적 필연성을 개념화(이해할) 수 없음은 도덕성의 최상 원리의 우리의 연역에 대한 불평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인간 이성 일반에 대해서 할 수밖에 없을 질책이다. 무릇, 이성이 이것을 어떤 조건에 의해서, 곧 근저에 놓여 있는 어떤 이해 관심에 의거해서 하지 않으려 함을 나쁘게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에 그것은 자유의 도덕적, 다시 말해 최상의 법칙이 아닐 것이니 말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비록 도덕적 명령의 실천적이고 무조건적인 필연성을 개념화(이해)하지는 못하나, 그럼에도 우리는 이것을 개념화(이해) 못함을 개념화(이해)하는바, 이것이 인간 이성의 한계에까지 원리적으로 나아가려 하는 철학에 대하여 당연히 요구될 수 있는 것의 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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