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그린블랫: 세계를 향한 의지

세계를 향한 의지 세계를 향한 의지 - 10점
스티븐 그린블랫 (지은이),박소현 (옮긴이)민음사

추천사
셰익스피어 400주기 기념사: 한 시대가 아니라 영원히 남을 작가
서문: 세계 최고의 작가가 된 시골 청년
감사의 말
독자에게

1 원색 장면들
2 재건의 염원
3 거대한 공포
4 연애, 결혼식, 후회
5 다리를 건너며
6 도시 근교에서의 삶
7 무대를 흔들다
8 주인/애인
9 사형대에서 터진 웃음소리
10 망자와의 대화
11 왕에게 마법 걸기
12 일상적인 것의 승리

참고 문헌


13 1616년 4월 23일에 일어난 셰익스피어의 죽음은, 그와 아주 가까운 몇몇 동시대인들에게만 알려졌을 뿐 거의 주목받지 못한 채 지나갔다. 스트랫퍼드(Stratford)의 홀리트리니티 교회 (Holy Trinity Church)에 그의 유해가 안식을 찾아 누웠을 때 온 세계가 애도하며 전율하는 일 따위는 생기지 않았다. 아무도 그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초서나 스펜서 가까이에(그의 동료 극작가 프랜시스 보몬트가 같은 해에 묻힌 곳이며, 벤 존슨 역시 몇 년 후 묻힌 곳이었다.) 매장되어야 한다며 들고일어나지도 않았다. 셰익스피어의 죽음이 당시의 외교 서신이나 유럽을 떠도는 소식지에 언급된 적도 없었다. 고전 애가(哀歌)들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법한 "그의 숨결의 스러짐"을 애통해하는 표현을 담은, 격식 차린 라틴어 추도문이 물밀듯이 밀려오지도 않았다. 유럽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의 동시대 작가들 중 어느 누구도 그의 천재적 재능에 존경 담긴 헌사를 바치지 않았다. 셰익스피어의 상실은 전적으로 영국의 국지적 사건에 그쳤고, 심지어 그 테두리 안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1619년 유명 배우 리처드 버비지(Richard Burbage)의 죽음은 곧바로 그리고 멀리 퍼져 폭발적인 비탄을 이끌어 냈다. 영국은 확실히 위대한 인물을 잃었던 것이다. "그는 떠났다." 한 익명의 애가 시인은 이렇게 통탄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한 세계도 죽었구나
그가 되살렸으나, 이제 다시는 되살아나지 못할지니
젊은 햄릿, 나이든 히에로니모
친절한 리어, 슬픔에 빠진 무어인, 그리고 또 다른 인물들
그의 안에서 살아 숨 쉬던 그들이 이제 영영 죽고 말았다.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허버트는 배우의 죽음에 지독히 상처받은 나머지, 몇 달이 지난 후에도 극장으로 발걸음하지 못했다. "내 지인 버비지를 잃고 난 뒤 얼마나 되었다고." 윌리엄 허버트와 그의 동시대인들이 대중적으로 주목했던 건 바로 이 배우의 죽음이었다. 버비지가 그토록 관객들의 기억에 남도록 생생하게 읊었던, 그 대사들을 썼던 저자의 상실보다 훨씬 더 말이다. 버비지를 향한 애가를 살펴보면, 셰익스피어의 동시대인들 중 일부는, 어쩌면 대부분은 연극의 등장인물들과 거기에 담긴 진정한 "삶"은 희곡의 글자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장을 직접 연기하고 공연하는 데에 있다고 믿었던 듯싶다. 종이에 적힌 글자들은 재능 있는 배우의 힘으로 되살아나기 전에는 그저 죽어 있는 문자들에 불과했다. 이 믿음은 우리를 별로 놀라게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요즘 대부분의 관객들이 연극들과 영화에 반응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18 반면 셰익스피어는 자신을 알리려고 하거나 자기가 만들어 낸 최종 작품에 집요하게 매달리려는 욕구를 그다지 느끼지 않은 듯하다. 따라서 셰익스피어의 연극들을 이해하거나 사랑하기 위해 그의 삶을 속속들이 알 필요는 없다. 물론 셰익스피어가 자기 작품의 모든 행간에서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없앴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집필을 위해 반드시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살려야만 했다. 그가 기존의 원전들을 그토록 잘 활용했다는 것은, 결국 그가 원전의 절묘한 분량만 취해 자신이 직접 읽고 관찰하고 소화해 낸 것들과 완벽히 뒤섞어 내는 데에 능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전문가였다. 

19 셰익스피어는 자신에게서 수백 명의 부차적인 창조 대행자들, 즉 등장인물들을 창조해 냈다. 그들 중 일부는 심지어 자신들에게 할당된 역할을 수행하게 하는 특정한 서술 구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부유하며, 마치 우리가 보통 생물학적 인간들에게만 할애하는 대행성을 부여받기라도 한 듯 생생히 다가오기도 한다. 예술가로서 그는 문자 그대로 자신의 삶을 우리에게 주었다. 

25 작은 시골 마을 출신의 한 젊은이가 있다. 독자적인 재산도 없고, 강력한 가문 출신의 인맥도 없으며, 대학 교육도 받지 못한 이 젊은이가 1580년 후반에 런던으로 상경한다.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 안에, 그 자신의 시대뿐 아니라 인류 역사상 모든 시대를 아우르는 가장 위대한 극작가가 된다. 그의 작품은 학식 있는 사람들과 문맹자들, 도심의 세련된 감상자들과 난생처음으로 극장 구경을 나온 시골 촌부들을 동시에 매료시킨다. 그는 관객들을 웃기고 울린다. 그는 무거운 정치적 주제를 우아한 시로 바꿔 읊는다. 그는 천박한 어릿광대짓 속에 철학적 섬세함을 과감하게 버무린다. 그는 제왕들과 걸인들의 생동감 넘치는 삶의 모습을 어느 한쪽에 편향되는 일 없이 공정하게 통찰한다. 그는 어느 한순간에 법학에 통달한 학자처럼 보이다가, 다음 순간에는 신학 부문에서 조예를 나타내고, 그다음 순간에는 고대사적 지식을 드러낸다. 동시에 그는 무지한 촌뜨기의 시골 억양을 아주 능숙하게 흉내 내고, 노파들 사이에서 흔히 떠도는 어리석은 미신이나 잡설을 묘사하는 일도 굉장히 즐겁게 받아들인다. 이렇게 드넓은 범위를 망라하는 위대한 성취를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26 셰익스피어는 치열한 경쟁 속에 있는 연예 산업 종사자로서 상업성에 입각한 대본들을 집필하고 연기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현실이 강렬하게 반영된 대본들도 함께 썼다.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 자신이 주주로 참여한 극단이 도산하지 않고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하루에 1500명에서 2000명에 달하는 유료 관객을 매일같이 원형 극장의 목재 벽 안쪽으로 끌어들여야 했으며, 경쟁 극단들의 맞불 또한 매우 극심했다. 극단의 유지 비결은 당대의 화제나 시사 문제를 과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본질적 흥미를 강력하게 포착하는 것이었다. 

132 공식적으로 존 셰익스피어의 신분을 가리키던 말은 자작농(yeoman)이었는데, 그가 농작지를 떠나 사업가로 자수성가를 한 후에도 이 칭호는 그대로 쓰였다. 자작농에서 신사(gentleman)가 되는 것은 상징적으로 대단히 큰 한 걸음이었으며, 기존의 사회적 신분에서 완전한 변신을 꾀하는 시도였다. 엘리자베스 시대 사회의 신분 계층은 아주 자잘하게 나뉠 수 있었으나, 핵심적인 구분은 상류층과 '평민' 또는 '천민' 사이에 놓여 있었다. 이 구분은 혈연의 문제, 불변성과 세습성과 같은 특징을 통해 절대 침범할 수 없는 것인 양 관례적으로 신비화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구분선을 넘어가는 것도 가능했으며, 모든 사람들이 이 장벽을 뛰어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당대의 약삭빠른 관찰자인 토머스 스미스 경(Sir Thomas Smith)은 이렇게 쓰고 있다. 

296 왜 그는 존슨이나 던이나 그 외 많은 그의 동시대 작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소유하던 책에 본인의 이름을 써넣지 않았을까? 왜 그의 거대하고 영광스러운 전 작품을 통틀어도, 정치나 종교 그리고 예술에 대한 작가 자신의 사상이나 생각을 직접적으로 흘려 놓은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을까? 왜 그가 썼던 모든 것들은 심지어 소네트조차도 일정 부분은 애매하게 흐려 두어 작가 본인의 얼굴과 내면의 생각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숨겨 버린 것일까? 학자들은 오랫동안 그것이 무관심과 우연한 사고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해 왔다. 동시대의 인물 중 그 누구도 이 극작가의 개인적인 관점들이 이들을 따로 보관하고 기록할 만큼 중요한 가치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의 편지들을 굳이 보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큰딸 수재너 앞으로 남겨진 그의 생전 문서들을 보관한 상자들은 결국 어딘가로 팔려 버렸다. 그 속에 들어 있던 문서들은 어딘가에서 생선을 싸는 종이로 쓰였거나, 새로 찍어 내는 책에 풀을 먹이는 용지로 쓰였거나, 아니면 더 단순하게는 쓰레기로 취급되어 소각되었을 수도 있다. 모두 가능한 얘기다. 그런데 어쩌면 런던에 처음 들어오던 날에 본 장대에 꽂힌 머리들로부터 받은 강렬한 경고를 그는 죽는 날까지 충실하게 따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365 셰익스피어는 이 대학 재사파에게서 일부 비쳐 나오는 속물적인 우월의식을 감지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들이 그를 은근히 낮춰 보지 않았다면 그건 매우 놀라운 일이었을 테고, 그가 그들의 얕잡아 보는 태도를 인식하지 못했을 리도 만무하다. 1580년대 후반과 1590년 대 초에 그들이 출간했던 책들 중 그 어느 권에도 그의 추천사는 실리지 않았다. 그가 누군가에게서 그러한 부탁을 받았던 적은 분명 없을 것이다. 그 역시 서로 돌아가면서 각자의 문집에 써 주는 식의 추천사를 그들에게 간청한 적도 없었던 듯싶다. 실제로 그런 경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의 문학 논쟁에 끼어들지 않았으며, 그들의 시끌벅적한 작은 사회 바깥쪽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조용히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바로 이 셰익스피어는 바로 얼마 지나지 않아 직접 그의 극단 업무를 돌보게 되고, 거의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성실하고 꾸준한 집필 활동을 하면서(그의 작품들이 엄청난 성취를 이루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돈을 모으고 또 유지했고, 감옥에 투옥되거나 거친 법정 공방을 겪는 일도 한 번 없었으며, 농경지와 런던의 부동산에 안전한 투자를 하고, 자신이 태어난 고향 마을에 아주 좋은 저택을 사 두고, 그리고 40대 후반에 은퇴하여 그곳으로 돌아간 사람이었다. 

387 1593년 이후 그린, 왓슨, 말로는 이미 죽어 버렸고, 서른 살이 채 되지 않은 셰익스피어에게는 사실상 경쟁자가 없었다. 그는 헨리 6세의 주된 성공에 이어서 또 다른 훌륭한 작품인 리처드 3세를 써냈다. 그는 거칠지만 정력적으로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에서 유혈 복수극을 실험했고, 『베로나의 두 신사』, 『말괄량이 길들이기』, 『실수연발』을 통해 희극 작가로서도 위대한 강점들을 보유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그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씁쓸한 뒷맛이 뒤따르는 상황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린은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도 글을 썼거나 적어도 그랬다고 전해지는데, 이 주장 자체는 믿기 힘든 말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존재 전체를 1페니짜리 싸구려 폭로물로 만들어 버리는 부류의 작가였으니까.  

452 이렇게 영국에서 추방당한 뒤 300년쯤 지난 후에, 유대인이라는 대상은 사람들의 일상적인 대화나 이야기 속에서 경멸적인 형상으로 유통되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는 특히 처음 경력을 쌓기 시작하던 시기에, 이러한 유통 상태를 극중에 반영하고, 나아가 이러한 현상을 추가적으로 만들어 가기도 했다. 분명히 도덕적 가치 판단 같은 것은 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관객은 베네딕, 폴스타프, 랜스, 그리고 코스타드에게서 다양한 정도의 환멸이나 거리감을 느끼도록 구상되었지만, 그들의 희극적인 에너지에 내재한 부수적인 특징으로써 평이하게 표출되는 반유대 정서는, 관객들에게 별로 거리감을 주지 않았다. 사실상 유대인들은 그 연극들에 등장하지 않았고, 등장인물이 말하는 대사 중에서도 중요한 소재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그들은 모두 보이지 않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으며, 이는 그들이 언급되는 몇몇 소소한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셰익스피어는 자신이 살던 시대의 모습을 충실하게 반영했던 것이다. 16세기 후반 영국의 유대인들은 사실상 실체가 없는 존재들이었다. 독일어에서 그토록 구변 좋게 표현하는 '무화(Vermichtung)', 즉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던 것이다. 

564 그는 비극을 어떻게 조립할 것인지 다시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비극적 줄거리가 가장 효과적으로 기능하는 데에 사건의 인과 관계 설명이 얼마만큼 필요한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했고, 한 인물을 설득력 있게 드러내기 위해 그의 행동을 설명하는 명쾌한 심리적 근거 또한 얼마만큼이나 필요한 지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셰익스피어는 연극의 효과를 헤아릴 수 없이 심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만약 그가 줄거리에서 핵심적인 설명이 되는 요소를 빼 버린다면, 그래서 현재 일어나는 행위들을 뒷받침할 만한 합리적인 이유, 동기, 또는 도덕 원칙이 설명되지 않도록 가로막아 버린다면, 오히려 관객과 그 자신에게 특히나 열정적이고 강렬한 반응이 솟구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극작의 중요한 핵심은 풀어야 할 수수께끼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설명되지 않는 불투명성(opacity)을 전략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이 불투명성이야말로 기존의 논리적 설명이 속박 · 수납하고 있던 엄청난 양의 극적 에너지를 방출한다는 사실을 셰익스피어는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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