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 종교의 의미와 목적

 

종교의 의미와 목적 | 종교학총서 4 |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 종교의 의미와 목적 | 종교학총서 4 |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 - 10점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 (지은이)분도출판사

<종교의 의미와 목적>의 한국어판 서문
역자 서문
머리말

제1장 서론
제2장 서양에서의 `종교`
제3장 타문화들, `종교들`
제4장 이슬람의 특별한 경우
제5장 적합한 개념일까?
제6장 축적적 전통
제7장 신앙
제8장 결론

 


11 이 책의 독창성은 종교라는 현상을 새로운 방법으로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스미스는 우리의 문화 속에서 형성되어 우리가 인간의 종교적 생활을 보아 온 지적인 안목을 우리로 하여금 의식하게 하고 있으며, 이러한 안목을 떠나서 종교를 다시 보는 실험을 해 보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지식사회학의 연구 성과들이 강조해 주듯이, 우리가 세계를 보는 방식들은 다양한 사건들을 추리고 묶어 주고 조직해 주며, 이러한 사건들 가운데서 우리의 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정합적인 의미를 식별하도록 도와주는 개념들에 의해서 깊이 영향을 받는다. 스미스는 이 책에서 지적하기를, 우리가 오늘날 일상적으로 인간의 종교적 삶을 보는 틀이 종교라는 현실의 영역을 인식하는 유일한, 혹은 그의 평가로는 가장 성과있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미스가 제안하는 개념과 시각의 전환이 지닌 실제적 중요성은 그것이 옛 사고와 시각에 의해 만들어진 얽히고 설킨 까다로운 문제들을 피하게 해주는 데 있다. 우리에게 버리도록 요구되는 시각은 인간의 종교적인 삶이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시크교, 조로아스터교, 유교, 신도, 도교 등 여러 개의 신학적·역사적 복합체로 나뉘어져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서구의 지적 전통에서 자라나서 종교의 세계를 이러한 식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종교생활을 한다는 것은 각각 자체의 독자적인 복음이나 교리 체계에 근거한 상호 배타적인 집단들의 어느 하나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함은 자명한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출발점으로부터 종교적인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중심적인 문제는 어느 종교가 참된, 혹은 가장 참된 종교인가 하는 질문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교가 참된 종교이며 따라서 다른 종교들은 고작해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진리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위에 언급된 최초의 시각적 틀에 근거한 이러한 자명성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교 종교 신학으로 하여금 헤어나올 수 없는 난제들로 빠져들게 했다. 만약에 하느님이 온 인류의 하느님이라면 어째서 하느님에게로 가는 올바른 길인 이 참된 종교가 인류 역사의 한 가닥에만 국한되어 인류 역사 이래 지금까지 살고 죽은 수십억 인구 대다수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는가? 만약 하느님이 모든 사람의 창조주요 아버지이면 그가 과연 이 참된 종교를 단지 선택된 소수만을 위하여 줄 수 있었을까? 어째서 하느님의 섭리는 인간의 종교적 삶으로 하여금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다양한 형태를 취하게끔 했을까? 

이와 같은 질문들은 '다른 신앙들'을 가진 경건한 사람들도 묵시적인 신앙을 가질는지 모른다거나, 익명의 그리스도인들로서 간주된다거나, 교회를 통하여 주어지는 '특별한' 방식과는 달리 그들도 세계 종교들을 통하여 '보통의' 방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현대의 신학적 이론들에 의해서 어느 정도 입막음되기는 하나 해답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이론들은 해결책이라기보다는 완화제로서의 기능을 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이론들은 경 건한 비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다만 과도적 지위만을 부여하다가 마침내는 현세 혹은 내세에서 그가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만나 온전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째서 온 인류를 사랑하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은 ─ 그리스도교 지역에서 태어난 일등 시민으로서, 또 어떤 사람은 ─ 비그리스도교 지역에서 태어난 ─ 이등 시민으로서 취급해 왔는가 하는 본래의 질문이 되살아난다. 성서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는 답변은 충분한 대답이 못된다. 왜냐하면 성서 자체에 관해서도 이와 유사한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성서는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온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결정적이고 유일한 말씀을 지니고 있는가? 아니면 오히려 많은 전통들 가운데서 한 전통에 속하는, 더군다나 세계 종교 공동체의 문제가 생겨나기 이전에 씌어진 경전일 뿐인가? 

13 스미스의 연구는 이러한 일련의 문제들을 점차로 해체시키는 효과를 지닌다. 그는 충분한 역사적인 증거를 들어, 상호 대립적인 이념 공동체로서의 종교들이라는 관념이 서양이 과거 200여 년 동안 여타 세계로 수출해 온 하나의 근대적인 발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세계의 신앙인들은 어디서나 자신들을 다른 공동체들에 대해서 배타적인 구원을 제공하는 공동체의 성원들로서 생각하게 되었다. 스미스는 하나의 분명한 울타리를 지닌 공동체에 속한 특정한 교리 체계로서의 종교라는 관념은 근세 이전에는 없었다고 한다(비록 서력 기원 초에 일찍이 그와 유사한 현상이있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고대 힌두교와 대승불교 경전이 씌어진 산스크리트어나, 상좌불교 경전의 팔리어나, 고대 이집트어, 고전 한문, 유대교 경전의 히브리어, <신약성서>의 그리스어 그 어느 것도 우리 현대인이 사용하고 있는 종교 혹은 종교들에 해당하는 단어를 지니고 있지 않다. 이런 문헌들은 다만 신앙, 복종과 불복종, 경건, 예배, 진리 그리고 길 등과 같은 생생한 주제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 공동체들이 소유하고 있는 신념 체계로서의 종교들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유럽 전통에서도 라틴어 'religio'라는 말은 현대적 의미에서 종교를 뜻하지는 않았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De Vera Religione라는 책 이름은 <참된 종교에 관하여> ─ 곧 다른 종교에 대비되는 그리스도교 ─ 라고 번역해서는 안되며 <참다운종교성에 대해서> 혹은 <참다운 경건에 대해서>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상황은 천 년 후에도 역시 마찬가지여서 쯔빙글리가 그의 책 De Vera et Falsa Religione를 썼을 당시에도 그가 다루었던 주제는 거짓된 종교들과 구별되는 참된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혹은 거짓된 'religio', 즉 '경건'이었다. 

또 칼빈의 위대한 저서 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는 올바로 번역하자면 <그리스도교 종교의 강요>가 아니라 <그리스도적 경건성의 기초> 혹은 <그리스도적 경건성의 구조>로 번역되어야 한다. 교리 체계로서의 종교의 관념이 확고하게 형성된 것은 열화와 같이 솟아오른 위대한 종교 개혁가의 체험과 사상이 그후 17세기의 추상적인 신학적 논쟁들로 냉각되고 난 후의 일이었다. 이에 곧이어 이와 같은 교리들을 고백하고 보존하는 인간 집단이라는 생각이 발생했고, 그리하여 18세기에 와서는 '종교들'을 상호 배타적인 이념 공동체에 담겨진 선택 가능한 교리 체계들로서 이해하는 생각이 통용되게 되었다. 19세기에는 여기에다 역사적 차원을 첨가하게 되어 이제는 이슬람교, 힌두교, 그리스도교, 불교라 불리는 현상들을 각각 오랜 역사를 가진 복잡한 유기체들로 간주하게 되었으며, 19세기와 20세기의 학문들은 이러한 유기체들을 점점 더 세부적으로 추적하고 연구하게 되었다. 스미스는 이와 같은 근세 서양의 종교 개념이 어떻게 발달되었는지 그 전모를 해박한 지식으로 명쾌하게 밝히고 있으며, 많은 흥미있는 세부 사항들을 이 책 끝에 있는 수많은, 그리고 때로는 매우 긴 주해에 담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는 신적인 것에 대한 인간의 응답과 관계가 지닌 속성들인 어떤 형용사적인 것이 서양 사상과 언어에 있어서 어떤 실체적인 것, 이른바 그리스도교, 힌두교 등으로 통하는 경쟁적 실체들로 응고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상황의 일환으로서 서양의 그리스도인들은 세계의 다른 민족들을 그들의 종교로부터 개종시키고자 그 종교들의 이름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예컨대 '힌두교'는 인도인들의 종교적인 삶, '불교'는 불타에 의해서 깊이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가는 길을 지칭하는 서양의 용어로서 쓰여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서양의 여행가들은 중국에서는 한 사람이 유교, 불교, 도교라는 세 개의 다른 종교들에 동시에 '속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종종 의아심을 감추지 못했다. 중국인들은 그것들을 서양 사람들의 안목처럼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할 종교들로 보지않고, 중국의 종교적인 삶의 흐름 속에서 세 개의 상호 침투적인 힘의 장들에 유사한 어떤 것으로 보고 있음을 서양인들은 나중에 가서야 점차 깨닫게 되었다. 

이와 같은 주장에 부분적인 예외가 되며, 이슬람에 관한 뛰어난 전문가인 스미스에게 있어서 특별한 흥미를 끄는 이슬람의 특수한 경우는 별도의 장에서 상세히 논해지고 있다. 이슬람을 제외하고는 스미스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말해 종교들이 처음으로 이름을 지니게 되고 상호 구별되는 실체로서 취급되게 된 것은 그 종교를 믿지 않는 투쟁적 정신을 지닌 이교도들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에다 독자적 이름을 지닌 종교의 개념을 붙인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었으며, 서양에서도 그리스도교 전통이 이러한 식으로 취급되기 시작한 것은 근세의 회의주의와 불신앙의 대두와 더불어서였다는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17 스미스 교수에 의할 것 같으면, 상호 대립적인 신학을 지닌 사회적 실체로서의 종교는 물론이요 정의할 수 있는 본질로서의 종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식으로 종교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종교적 언술의 세계가 보여주는 다양한 사실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겠는가? 스미스의 제안은 인간의 종교적 삶의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을 형성하고 있는 이른바 신앙(faith)과 축적적 전통 (cumulative traditions)이라는 두 가지 다른 실재로써 종교를 말해 보자는 것이다. 그가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은 ─ 이 말이 지니고 있는 의미가 때로는 적합하고 때로는 도움이 안되는 면이 있지만 그보다 더 좋은 말을 찾기는 매우 힘들다 ─ 개인이나 혹은 여러 개인들이 지닌 신적인 초월성 ─ 이것이 인격적이든 비인격적이든, 하나이든 여럿이든, 도덕적 성격을 지녔든 그렇지 않든, 은총의 존재이든 명령하는 존재이든 ─ 과의 관계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신앙은 종교적 체험, 누멘(numen)적인 것에 대한 감각, 사랑과 경외, 회망과 두려움의 종교적 감정, 숭배하려는 마음, 그리고 보다 높은 실재와 가치에 봉사하려는 의지의 헌신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영어로 우리가 하느님이라 부르는 우리보다 위대한, 아마도 한없이 위대하면서도 신비로운 실재와의 체험적 관계에 직접적 · 내면적 · 개인적 · 생동적 그리고 실존적으로 참여함을 뜻하는 것이다. 

개인의 내면적 신앙과 구별되는 축적적 전통들은 역사라는 것이 항상 다소 문제거리였다는 점에 있어서 신앙과는 전혀 다른 면에서 문제가 되는 영역이다. 왜냐하면 축적적 전통들이란 역사가의 영역 안에 들어오는 것이며, 한 역사가가 종교적 신념을 가졌는지의 여부에 관계없이 그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축적적 전통들은 제도, 관습과 법률, 신조, 교설 그리고 특정한 공동체의 신학적 체계들과 같이 그 안에서 신앙의 생활이 표현되어 왔고 또 표현되고 있는 문화적 틀들이다. 비록 전통은 그 자체가 신앙생활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항시 변하는 것이지만 ─ 때로는 혁명적으로 그러나 보통은 아주 점차적으로 ─ 신앙이 발생하는 것은 언제나 그러한 전통 안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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