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 타키투스의 역사
- 책 밑줄긋기/책 2023-26
- 2026.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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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키투스의 역사 | 한길그레이트북스 198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 -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 (지은이),김경현,차전환 (옮긴이)한길사 |
역사가 타키투스의 생애와 저작 | 김경현
타키투스의 『역사』에 대하여 | 차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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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타키투스의 역사서들
타키투스의 주저는 문필 활동의 후반기에 쓴 두 권의 역사서, 역사와 연대기다. 전자는 100~110년에 저술된 것으로 69~96년 사이, 즉 네로 황제의 사망부터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사망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후자는 110년 이후부터 아마 죽기 전까지 집필한 것으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사망부터 네로 황제가 사망할 때까지를 기술하고 있다.
『역사』
이 작품은 현재 극히 일부, 즉 첫 네 권과 제5권의 첫머리(제1~26장)만 남아 있다. 남은 부분은 69~70년간의 내전 다시 말해 네로 황제에 이어 갈바(Galba), 오토(Otho), 비텔리우스(Vitellius)가 불과 몇 개월씩의 간격으로 제위에 올랐다 내전의 제물이 된 경위 그리고 결국 내전을 끝낸 베스파시아누스 치세의 시작을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제5권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베스파시아누스의 큰아들 티투스 비니우스(Titus Vinius)가 유다이아인의 반란을 진압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유다이아인에 관한 흥미로운 민족지가 펼쳐진다.
「연대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역사』가 전체 몇 권으로 씌었는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여섯 권 단위의 구조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네 권 단위의 구조라는 견해도 있다. 여기서는 두 역사책의 분량이 모두 합하여 서른 권이었다는 히에로니무스(Hieronymus)의 증언을 따른다. 『역사』가 실린 가장 오랜 필사본, 이른바 '제2 메디치판' ─ '제2라우렌티아누스 판' ─ 이 그 증언을 뒷받침한다.
38 『연대기』
앞서 말했듯이, 연대기』는 『역사』보다 뒤에 저술된 것이지만, 좀 더 앞의 시기, 즉 아우구스투스에서 네로에 이르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가의 제정사를 다루고 있다. 전체 16권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처음 여섯 권(그나마 제5~6권은 불완전한 상태다)과 마지막 여섯권이다. 처음 여섯 권은 제1 메디치 필사본에서, 마지막 여섯 권은 앞에서 언급한 제2 메디치 필사본을 통해 남아 있다. 해마다 연초에 정규 집정관의 이름을 꼬박꼬박 기록하는 등의 연대기적 틀을 제외하면, 『연대기』는 사실 주제 단위로 파악할 수 있는 서사 구조를 갖는다. 분명히 제1~6권은 모두 티베리우스 치세에 할애된, 여섯 권이 하나의 주제 단위를 이루는, 이른바 헥사드(hexad) 구조다. 그 구조 안에서는, 중심인물의 사망이 권 사이를 가르는 지표 역할을 한다. 제2권의 끝에는 게르마니쿠스의 사망, 제4권 말에는 드루수스(Drusus)의 사망, 제5권의 초반에는 리비아(Livia)의 죽음이 이야기된다. 47-54년간을 다룬 제11~12권과 54~66년간을 다룬 제13~16권은 각각 클라우디우스와 네로 치세에 할애되어 있다.
「연대기』에는 제정에 대한 저자의 정치적 비전이 암울해지고 있음이 드러난다. 자유(libertas)와 원수정(principatus)의 조화에 대한 희망은 결국 트라야누스 치세를 겪으면서 환멸로 뒤바뀐 듯하다. 이는 타키투스가 몇 차례 공언한 동시대인 네르바와 트라야누스 치세를 쓰겠다던 계획을 단념한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마치 질병의 원인을 찾는 병리학처럼, 타키투스는 타락의 뿌리를 찾기 위해 과거를 섭렵한 것이다.
40 타키투스는 역사에 대한 예리한 정치적 분석을 제공할 수 있는 심오한 사상을 지녔다는 점에서 로마의 위대한 역사가임이 틀림없다. 그는 역사를 항상 사건의 단순한 연쇄가 아니라 생각이나 사람을 대비시키는 방식으로 제시한다. 가령 그는 전통(mos maiorum)의 이상적 가치를 고수하면서, 타락한 현실을 가차 없이 비난하는 자신의 세계관을 부단히 드러낸다. 구원의 전망이 없는 까닭에, 그는 역사 속에서 패덕이 판치는 냉혹한 현실에 대해 더욱 염세적으로 된다.
42 마지막으로, 간결(brebitas)과 변조(variatio)에 입각해 아무도 견줄 수 없는 독특한 문체를 모색했던 점에서도, 타키투스는 세네카(Seneca)는 물론 살루스티우스의 영향을 받았다. 타키투스의 서술에서 끊임없이 감지되는 또 다른 중요한 모델은, 특히 세네카의 비극과 제정기 수사학에서 비롯되는 비극성에 대한 취향이다. 예컨대 크레모나(Cremona) 약탈에 대한 묘사, 게르마니아족의 수장 아르미니우스(Arminius)와 싸운 로마 장군 카이키나 알리에누스(Caecina Alienus)의 꿈속에 나타난 피범벅이 된 퀸틸리아누스 바루스(Quintilianus Varus)의 환영, 로마의 화재에 대한 묘사 등이 그렇다.
그렇지만 이 점에서 타키투스는 자신의 모델들을 단연 압도한다. 그의 문체의 특징을 요약할 만한 용어를 찾자면, 아마도 '진지함'을 뜻하는 라틴어 'gravitas' 가 적당할 것이다. 사실 그 자신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42 타키투스의 문체는 농축되고 장엄하며, 그래서 귀족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제1권
1 나는 이 역사책을 세르비우스 갈바(Servius Galba)가 두 번째 집정관으로, 티투스 비니우스(Titus Vinius)와 함께 취임한 해(69년)부터 시작한다. 로마시 창건 이래 오늘까지 820년의 세월을 숱한 역사가가 다루어왔다. 로마 공화정기를 기술할 때, 그들은 너나없이 웅변조였고 또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악티움 해전으로 내전이 끝나고 평화가 중시된 나머지 1인의 수중에 권력이 집중된 뒤에는 그처럼 재능 있는 작가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그와 동시에 여러 가지 이유로 역사 기술의 신빙성이 훼손되었다. 처음에는 국정을 마치 남의 일처럼 여겨 그에 관해 무지해졌기 때문이지만, 오래지 않아 아첨하기를 갈망하거나 거꾸로 지배자를 증오하게 된 것이 원인이었다. 그 결과 불타는 반항심 때문이든 아니면 비굴함 때문이든 후세의 귀감이 되도록 역사를 쓰는 배려가 사라졌다.
사람들은 시세에 영합하는 역사가에게는 즉각 등을 돌리지만, 중상과 질투에는 쉽게 귀를 기울이는 법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갈바, 오토(Otho), 비텔리우스(Vitellius)에게서 은전도 해악도 입은 바 없다. 나는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덕분에 공직을 시작해서, 티투스 때 승진하고,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때 더 고위직에 올랐음을 부인하지 않겠다. 그러나 불편부당의 신념을 공언한 자들은, 어떤 인물에 대해서든 친애의 감정이나 증오심을 버리고 말해야 한다. 여이 충분하다면, 자료가 더 풍부하고 덜 위험한 시대인 신격 네르바(Nerva)의 원수정과 트라야누스(Trianus)의 치세는 노후에나 쓰려한다. 그것은 실로 원하는 바를 느끼고, 느끼는 것을 말할 수 있었던 드물게 복된 시절이었다.
2 내가 여기서 다루려는 것은 재난이 많았고, 전란으로 참혹했으며, 내전으로 반목하고, 평화 속에서도 공포가 만연했던 시절의 역사다.
4 그러나 내가 뜻한 작업에 착수하기에 앞서, 당시 로마시의 사정이 어떠했는지, 군대의 기풍이나 속주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온 세상에서 어디가 강했고 어디가 약했는지를 소급해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야 사건의 경위나 결말뿐 아니라 대개는 우연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원인과 이유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처음에 희열에 휩싸여 네로의 죽음을 반겼지만, 이윽고 수도의 원로원 의원들, 인민, 근위대는 물론 속주의 전 군단병과 지휘관들까지도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왜냐하면 로마 외의 곳에서도 황제를 옹립할 수 있다는 제국의 비밀(arcanum imperii)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원로원 의원들은 환호하며, 즉각 로마에 없는 새 원수를 상대로 자유를 만끽하며 대담하게 행동했다. 기사층의 지도급 인물들 역시 원로원 의원들 못지않게 고무되어 있었다.
8 사람이 많았던 로마의 정서는 그처럼 다양했다. 속주들의 사정은 어땠을까? 히스파니아는 클루비우스 루푸스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는 웅변가요 평화의 학예에 조예가 깊은 반면, 전쟁 경험은 없는 자였다.
9 브리타니아 주둔군에는 갈바에 대해 아무런 적대감이 없었다. 사실내전의 온갖 혼란 속에서 이 주둔군만큼 사심 없이 행동한 군단도 없었다. 그것은 아마 브리타니아가 외진 곳에 있는 데다가 대양 너머에 있었기 때문이든지, 아니면 숱한 원정을 치르면서 정작 미워해야 하는 것은 적군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리리쿰도 평온했다.
11 이집트와 그곳의 병력은 신격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로마 기사들이 관할해왔다. 곡물이 풍부한 이 주는 로마에서 접근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미신과 방종 때문에 무질서와 혼란에 빠지기 십상인 데다가, 법도 모르고 행정제도에도 익숙지 않은 터라, 황제 직속령으로 삼는 편이 더 낫다고 여겨졌다.
49 갈바의 몸통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야간의 방종한 분위기에서 숱한 모욕을 받았다. 이윽고 한때 그의 노예였던 집사 아르기우스가 그것을 거두어 갈바의 집 정원에 초라하게 묻어 주었다. 갈바의 잘린 머리는 종군상인과 종군노예들의 막대기에 꽂혀 난행을 당하다가, 마침내 그다음 날 (갈바에게 처벌받았던 네로 황제의 해방노예) 페트로비우스의 무덤 앞에서 발견되어, 앞서 묻힌 몸통 곁에 안치되었다. 갈바의 최후는 그와 같았다. 향년 73세였다. 운 좋게 다섯 명의 황제를 거쳤으나, 그는 자신이 제위에 있을 때보다는 다른 황제들의 치세에 더 행복한 편이었다.
그의 집안은 유서 깊은 명망가에다 상당한 재력을 갖고 있었다. 갈바 자신으로 말하자면 범용한 인물로, 미덕을 갖추었다기보다는 결함이 없는 쪽이었다. 그는 평판에 무심하지도 자만하지도 않았다. 타인의 돈을 탐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돈을 절약하고, 국고의 지출에는 인색했다. 일단 신임하게 된 친구와 해방노예에게는 한없이 관대했고, 부정직한 자들의 경우에도 죄를 저지를 때까지는 묵인했다. 그러나 그의 고귀한 출신성분과 공포가 만연한 시대 풍조 때문에 그의 무력함이 현명함으로 불리었던 것이다.
50 오토의 최근 만행뿐 아니라 해묵은 그의 행실 때문에 공포에 떨고 있던 수도를 더욱 경악케 한 것은 비텔리우스에 관한 전갈이었다. 갈바가 살해당하기 전에는 쉬쉬해온 터라, 시민들은 그때까지 고지 게르마니아 군대만 항명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비텔리우스가 반란했다는 소식에, 원로원과 (역시 공화국의 한 부분으로 그 존망을 우려하던) 기사층은 물론, 평민들까지도 공공연히 이런 걱정을 했다. 파렴치하고, 비겁하며, 방탕하기로 세상에서 가장 극악무도한 저 두 인간은 혹시 제국의 파멸을 위해 숙명적으로 선택된 자들이 아닐까?
사람들은 벌써, 비록 폭력으로 얼룩지긴 했지만 최근까지 누려왔던 평화보다 거듭된 내전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수도가 여러 차례 자국 군대에 점령당한 일, 이탈리아가 황폐화되고 속주가 약탈당하던 사태, 그리고 파르살리아(Pharsalia), 필리피(Philippi), 페루시아(Perusia), 무티나(Mutina) 등 내전이 벌어졌던 유명한 전쟁터를 화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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