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내 무덤 푸르고

 

내 무덤 푸르고 | 문학과지성 시인선 133 | 최승자 내 무덤 푸르고 | 문학과지성 시인선 133 | 최승자 - 10점
최승자 (지은이)문학과지성사

마흔
서른이 될 때는 높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지.
이 다음 발걸음부터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끝도 없이 추락하듯 내려가는 거라고.
그러나 사십대는 너무도 드넓은 궁륭 같은 평야로구나.
한없이 넓어, 가도가도
벽도 내리받이도 보이지 않는,
그러나 곳곳에 투명한 유리벽이 있어,
재수 없으면 쿵쿵 머리방아를 찧는 곳.

그래도 나는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어서
이 마흔에 날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

 

세기말
칠십년대는 공포였고
팔십년대는 치욕이었다.
이제 이 세기말은 내게 무슨 낙인을 찍어줄 것인가.

한계가 낭떠러지를 부른다.
낭떠러지가 바다를 부여잡는다.

내가 화가 나면
나를 개 패듯 패줄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오 맞아 죽은 개가 되고 싶다.
맞아 죽은 개의 가죽으로 만든 양탄자가 되고 싶다.

그리하여 이십일세기 동안
당신들의 발밑에 밟히며 넝마가 되어가고 싶다.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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