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보면 | 13 마이클 하워드의 평화의 발명 2


평화의 발명 - 10점
마이클 하워드 지음, 안두환 옮김/전통과현대


2017년 11월 4일부터 CBS 라디오 프로그램인 변상욱의 이야기쇼 2부에서 진행되는 "강유원의 책을 읽다보면"을 듣고 정리한다. 변상욱 대기자님과 강유원 선생님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팟캐스트 주소: http://www.podbbang.com/ch/11631




20180818_41 마이클 하워드의 평화의 발명 2

지난 시간부터 마이클 하워드의 《평화의 발명》을 읽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평화친화적인 사유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구를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인 미국은 전쟁 친화적 이데올로기를 계속 가지고 있는 것 아니냐, 그런 전략으로 계속 밀고 나가는 것 아니냐는 걱정도 했고, 평화를 어떻게 발명할 수 있는 지는 오늘 하나하나 보겠다. 지난 시간 부연을 한다면 계몽주의에 의해서 인간이 계속 진보해간다면 좋은 세상이 될 줄 알았는데 1,2차세계대전을 겪고 보니까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이 허망하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베르사유 체제가 성립했는데 그것이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 결정적으로 평화라는 것을 발명해내는 것이 어렵지 않나, 그런 좌절감을 사람들에게 깊이 안겨준 것 같다. 사실은 국제적인 평화를 만들어내는 것을 실패했는데 에드워드 카의 《20년의 위기》를 보면 1차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1919년부터 2차세계대전 발발한 1939년까지 그 20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에드워드 카의 이 책은 유럽의 자유민주주의나 또는 윌슨이 말한 민족자결주의 이런 것이 전쟁을 막을 수 없고 그 대신에 자유민주주의로 사람들이 떠들게 놔두니 대중추수주의로 되며 포퓰리즘이 되고, 또 극단적인 민족주의가 나대다 보니 파시즘이 등장한다는 것. 파시스트들에게 전쟁이라는 것이 질서가 된다. 


그래서 제1차세계대전을 통해서 세계질서를 유지할 힘이 유럽에는 없는데 그 와중에 제2차세계대전을 벌이게 되니 힘이 완전히 소진되었고 그러면서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냉전. 냉전이라고 하는 것이 얼핏 보기에는 자유민주주의 진영하고 공산주의 진영과의 이념 대결 같지만 개인적으로 모두 계몽주주의 후계자들이다. 공산주의도 사실도 이론구조를 보면 계몽주의다. 그들은 완강하게 자신들이 가진 이념의 힘을 신뢰하였기 때문에 사실 냉전기에는 평화라는 말이 어이없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가장 합리적인 이성에 의해서 내려진 결정이고 결론이라고 스스로들 각자 믿고 있는 것. 계몽주의적인 세계관이 극단에 달했을 때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 지가 냉전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내 이념이 옳다고 하면 계몽주의인데 그것이 부딪치게 되면 상대방이 완전히 멸망하기 전에는 끝장이 나지 않는다. 사실 냉전시대에 평화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상대편이 제거되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세계질서에 대한 구상을 지닌 두 세계의 대립. 그러니까 냉전시기에 평화라는 것은 전쟁을 안한다는 것뿐이지 아주 적극적인 의미에서 평화 개념은 아니다. 그래서 계몽주의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한계가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뚜렷하게 드러났고 그것이 현실화되었을 때 계몽주의의 두 후계자인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공산주의 체제가 대결한 냉전 역시 평화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1989년 이후에는 미국의 일극체제이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제2차세계대전 당시 미국사람들이 확실히 가지고 있었던 공통적인 생각이 전쟁이 돈이 된다는 것. 전쟁이 돈이 된다는 생각을 갖게되면 평화친화적으로는 될 수 없다. 전쟁이 돈이 된다는 생각이 굉장히 위험한 것이 일본근현대사를 보면 일본사람들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사이에 그 생각이 일본사람들에게 스며들었다. 그런데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은 패배해서 전쟁하면 쌍코피난다는 생각이 있어서 일본도 평화헌법을 무너뜨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베트남전쟁을 겪었어도 여전히 전쟁하면 돈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이클 하워드는 몇 가지 세계 평화가 아직 먼 이유를 거론하는데, 첫째가 의사소통의 자유, 즉 전 세계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늘어난다고 해서 또는 전 세계가 상업의 자유를 가져온다고 해서 평화를 가져오진 않는다. 아주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외국인 혐오와 민족주의가 권위주의와 결합해서 끊임없는 분쟁을 만든다. 누군가를 배재하고 혐오하다 보면 배제하지 않는 쪽은 뭉쳐야 되니까 그것이 민족주의로 이어진다. 근대의 국가는 전쟁 당사자이지만 동시에 평화도 가능케 하는 존재이고 이런 국가 내부의 민주주의가 공고하게 될 때에만 비로소 평화구축이 가능하다. 마이클 하워드의 글을 읽어보면 "전지구적인 평화로운 질서의 구축은 따라서 국내적인 질서를 가능케 하는 요소들을 공유할 수 있는 세계 공동체의 창출에 달려 있다." 계몽주의가 가지고 있는 한계가 미래의 평화를 구축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둔 상태에서 계몽주의를 읽어나가야 한다.


한국처럼 세계정세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나라는 국내 내부에서의 자잘한 분쟁들 또는 증오와 혐오범죄, 이런 것들도 사실 전쟁이다, 이런 것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친화적인 마인드를 갖게 하는 것을 정책의 초점으로 모아져야 한다. 사실 난민들에 대한 태도들이 곧바로 10년 20년 후에 북한 주민들에 대한 태도로 곧바로 바뀔 수 있으니까 지금부터 사실 훈련을 해야 한다. 이질적인 받아들이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에 대한 훈련을 지금부터 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평화의 발명》을 읽자고 한 것은,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이성적인 존재만은 아니기 때문에 계몽주의적인 이성이 지나치게 신뢰를 하지 말고 평화라는 것은 노력해서 애써야만 발명될 수 있는 것이고, 이런 것에 기대하는 것이, 평화라는 것을 발명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진짜 계몽주의적인 태도이겠다. 


평화저널리즘이라고 하는 것도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에 파시즘이 왔다는 것에 대한 유럽의 경험을 예리하게 통찰한 다음에 과연 한국사회에서는 과연 그럼 파시즘이 안 올 것인가 걱정을 해보고 그런 부정적인 것들을 해결해나가면서 적극적으로 평화담론을 구축하는데 나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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