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보면 | 15 움베르토 에코의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 13


움베르토 에코의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 1 - 10점
움베르토 에코.리카르도 페드리가 지음, 윤병언 옮김/arte(아르테)


2017년 11월 4일부터 CBS 라디오 프로그램인 변상욱의 이야기쇼 2부에서 진행되는 "강유원의 책을 읽다보면"을 듣고 정리한다. 변상욱 대기자님과 강유원 선생님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팟캐스트 주소: http://www.podbbang.com/ch/11631



20190112_62 움베르토 에코의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 13

지난 시간까지 한 것을 복습해보면 문명이란 것이 무엇인지, 그러다보면 지식이 무엇이고 철학, 철학자가 무엇인지의 물음, 비타 악티바를 설명했다. 어른들이 하는 진지한 활동, 활동적인 삶. 소크라테스, 플라톤은 진리를 설정해 놓았다. 자기를 들여다보는 성찰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소크라테스 같은 경우는 담론을 펼치는 학파가 있었다. 이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은 사실 희랍철학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철학 전공자들은 플라톤을 좋아한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좋아하다 보니 이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을 B급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민주정이라는 것이 전개되는 과정을 보면 민주주의이라는 것은 깊이 있는 지식보다는 풍부한 통찰과 상식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오면 자기를 성찰하는 삶이 아닌 백과전서적인 지식으로 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이 어떻게 연결되는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 사실상 서양에서의 근본학으로서의 철학은 플라톤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웠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할 수 있다.

자그마한 아테나이라고 하는 직접 민주주의도 가능했던 도시국가가 점점 소멸되고 거대한 제국이 등장하면서 철학자들은 통 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철학적 사유나 지식이라는 것이 한쪽으로 밀려난다. 어떻게 보면 견유학파 이래로 철학의 역할이라고 하는 것이 크게 사회의 전면에 나서지 못했고 항상 권력에게는 햇볕 한줌이면 충분한 그런 정도로 변했고, 그러다가 나타난 것이 신플라톤주의의 초월적인 것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겠다.

449 고대 말기의 철학을 지배했던 사조는 플라톤주의 혹은 신플라톤주의다(신플라톤주의라는 말은 플로티노스와 그의 후계자들의 사상을 가리키며 19세기초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서기 3세기에서 4세기에 이르는 동안 실제로 플라톤주의는 또 다른 종류의 사상들을 수용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정신적인 여력을 지닌 유일한 학파였다.

결국 철학이라는 것이 동떨어져있는 어떤 것이 아니고 사회의 변화, 정치체제의 변화, 또는 권력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름대로 그 시대에 맞추어서 벌어지는 일이다. 철학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역할 중에 하나가, 오늘 로마시대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로마 시대에 등장했던 것 중에 하나인데, 삶에 위안을 주는 것이다. 로마 시대에 철학이 있었는가라는 물음이 있다. 아주 고답적인 철학자들은 아니다라고 얘기한다. 특히 빈델반트라고 하는 철학자에 따르면 로마 제국은 아주 혼란한 시대였고 사람들은 그래서 행복과 만족을 얻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그러니 지식은 삶에 행복을 주는 한에 있어서만 의미있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 로마다. 그러니 로마는 성찰로서의 철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위로를 주는 일종의 실용적 기술로서의 철학만이 있었다. 삶이 고통스러울 때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고통을 없애주는 한에서만 받아들여진다.

361 포에니 전쟁의 종결을 기점으로 서로마 제국의 몰락에 이르는 시기에 지중해를 중심으로 발달한 철학을 라틴 혹은 로마 철학으로 분류하는 데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유가 저급한 철학 소개서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로마 철학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실제로 키케로나 세네카 혹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같은 사상가들이 그리스 문화의 주제들, 특히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을 답습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에게 지적 엄격함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아울러 루크레티우스와 같은 거인이 존재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로마 시대로 가서 스토아주의 학파라면 지식과 삶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스토아주의에 따르면 지식과 삶의 위계 관계가 대표적으로는 플라톤 같은 경우에는 지식이 있어야 삶이 의미가 있다. 신플라톤주의가 곧바로는 아니지만 여러 차례 변용을 거쳐서 기독교 초기 신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철학은 삶을 유지하는 기술이고 삶을 연습하는데 도움이 되는 지침서여야 되고 철학이라는 것이 행복의 수단이니까 삶의 행복이 목적이고 수단으로서의 지식이니 위계질서가 바뀌었다.

로마의 철학자라고 하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도 있지만 다른 한 사람으로는 키케로도 있다. 키케로는 정말 실용적인 학문으로서의 철학, 그리고 마음의 위로는 주는 아우렐리우스, 이 두 사람을 로마의 철학자로 기억해두면 될 것 같다. 키케로는 아테나이 유학파이다. 그 당시에는 로도스 섬이 오늘날로 치면 미국쯤 된다. 학문의 전당이자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의 그 로도스다. 키케로는 수사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플라톤의 대화편을 공부했고, 아리스토텔레스도 공부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키케로가 힘을 기울인 것은 당시 모든 로마인들에게 정치인에게 필요한 논쟁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다.

키케로가 철학책을 쓰기 시작한 것은 카이사르의 독재가 시작되면서부터이다. 키케로에 대해서 몇 가지 생각해보면 그 당시 일급 지식인이다 라고 하면 일단 아테네에 유학을 한다. 그 다음에 오늘날 많이 읽는 은 키케로의 저작은 <수사학>인데 그래도 힘을 기울여서 쓴 것은 철학적 저작들이다. 사실 키케로의 <수사학>을 읽어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을 정리해서 또 그 당시 희랍의 수사학을 정리해서 이를테면 단 권 정리본으로 나온 것이 키케로의 수사학이다. 글쓰기를 공부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키케로를 권한다. 국가론이나 법률론은 플라톤의 형식을 모방한 것인데 내용을 읽어보면 플라톤 급은 아니다. 키케로에 이어지는 후대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은 것이 <호르텐시우스>이다. 그 유명한 아우구스티누스도 이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희랍철학을 로마화하는, 문명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배울만한 것이다. 특히나 키케로는 희랍어로 되어 있는 철학용어들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374 키케로는 플라톤의 대화록을 공부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출판된 저서들뿐만 아니라 여러 철학자들의 많은 저서들을 직접 읽고 섭렵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엇보다도 변증법적인 방법론과 수사학에 있어서 그의 스승이 되어 주었다. 키케로는 야심에 찬 당시의 모든 로마인들처럼 정치인에게 필요한 논쟁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375 비록 철학에 관한 그의 관심이 어렸을 때부터 또렷이 드러났고 살아가는 동안에도 계속 유지되었지만 키케로는 말년이 되어서야 (기원전 46-44년), 다시말해 카이사르의 독재가 시작되면서 정치 활동을 그만 둘 수밖에 없었을 때부터 철학 책을 쓰기 시작했다.

375 「호르텐시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로펨티콘』을 모델로 쓰였고 철학을 권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희랍어 어떤 단어가 있으면 그 단어를 라틴어로 번역할 때 너무 어려운 단어들은 쉬운 일상에서 사용하는 라틴어로 옮겼다. 그것이 첫 번째 방법이다. 한 단어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희랍어와 딱 맞아떨어지는 단어가 없을 때에는 여러 단어로 번역을 했다. 세번째 경우는 그에 상응하는 단어가 정말로 없으면 희랍어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나중에 보면 불경이 서역에서 중국으로 전해질 때 중앙아시아에 있는 불전 번역자들이 사용한 방법들이 그런 것들이 있다. 키케로가 만들어 낸 철학용어들이 그 당시에는 어떠했는지는 몰라도 오늘날에는 이 용어들이 사실상 철학업계에서는 표준용어들이 많다. quality라는 말을 쓰는데 키케로가 만든 용어이다.

378 키케로가 고안해 낸 수많은 용어들, 예를 들어 qualitas(특성), perceptio(인식), evidentia(명료함), morals(윤리적인), indifferens(무관심한), probabilitas(개연성) 등이시간이 흐르면서 본격적인 철학 용어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키케로가 아무리 철학적인 것을 만들려고 노력했다고 하여도 역시 로마는 실용적인 학문의 나라였고 키케로가 죽은 지 한참 뒤인 425년에 로마 학술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에 하나인데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에 일종의 국립대학을 설립했다. 아마도 서양에서는 처음 국립대학이었을 것이다. 그 교수 구성이 철학과 교수가 1명이고, 법학과 교수가 2명이고, 라틴어, 수사학, 문법 교수가 여러 명이었다. 철학이라는 학문이 국립대학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를 차지했는지를 이것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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