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보면 | 15 움베르토 에코의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 11


움베르토 에코의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 1 - 10점
움베르토 에코.리카르도 페드리가 지음, 윤병언 옮김/arte(아르테)


2017년 11월 4일부터 CBS 라디오 프로그램인 변상욱의 이야기쇼 2부에서 진행되는 "강유원의 책을 읽다보면"을 듣고 정리한다. 변상욱 대기자님과 강유원 선생님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팟캐스트 주소: http://www.podbbang.com/ch/11631



20181229_60 움베르토 에코의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 11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 이제 11번째 시간이다. 지난 주에는 소피스트 얘기를 주로 했다. 아테나이 전통문화의 정통적 계승자라고도 했다. 소피스트들은 기본적으로 말하는 법, 즉 논쟁 기술로서의 변증법, 적절한 단어와 문장을 사용하고,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감정을 불러일으켜서 선동을 하고 더 나아가서 설득을 하는 기술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게 바로 아테나이의 전통이다. 그런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변방의 인물.


희랍세계에서 아테나이와 스파르타를 대립되는 국가로 보는데, 그 당대 희랍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테나이 사람들은 말이 많고 시끄러운 사람이고, 스파르타 사람들은 말이 없는 사람들. 말 잘하고 말 많은 것이 소피스트가 가르치는 방법이니 그게 아테나이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게 바로 시끄러운 민주정의 전통이라고 하겠다. 


오늘은 아테나이의 민주정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다. 흔히 소크라테스는 민주정의 반대하는 사람이었다고 말을 하곤 하는데 사실은 그것도 사태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규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것이 민주주의에 반대해서 그랬다고 말하는 것은 1/10 정도만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시대에 또는 소크라테스가 죽을 무렵에 아테나이가 참주정체와 민주정체 사이에 엎치락뒤치락하였다. 민주정이 극단적으로 가면 탄생하는 것이 참주정이다. 이를테면 히틀러도 민주주의에 의하여 탄생한 독재자이다. 그런 사람을 참주라고 부른다. 사실 참주라는 말은 혈통의 정통성이 없는 사람들이 민중의 지지를 받아서 독재적인 권력을 갖게 되면 참주라 불린 것이다.


참주정이 있을 때 부역한 사람이 있는데 참주정이 무너진 다음에 민주정이 정권을 잡았을 때 부역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었다. 함부로 죽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민주정의 집권자들도 또다시 참주정이 되면 자신들도 어찌될지 모르는 것이다. 즉 독재체제가 무너진 다음에 정권을 잡은 민주헌정체제가 그 독재 기간 동안 이루어진 범죄행위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이 문제는 지나간 시대의 부정의함을 오늘날 헌정체제에서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공식적으로 주제화되지는 않은 것 같다.


소크라테스를 둘러싼 문제 중에 하나가 악법도 법이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고, 소크라테스가 굉장히 법을 잘 지킨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어떤 법을 어떻게 지켜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소크라테스가 모든 법에 대해서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아니다. 더 심각한 것은 아테나이의 민주정이라고 하는 것이 인류역사상 최초의 민주정이라는 것이다. 아주 오랜 세월을 거친 것. 기원전 461년에서 대개 322년 사이 150년 정도. 대한민국 역사가 2번 정도 돌아가야 하는 기간. 특히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나면서부터 민주정에 관한 아주 복잡다단한 논쟁들이 벌어졌음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철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끝내버리기 때문이다. 거기에 담겨있는 소크라테스의 민주정체에 대한 여러 철학이 담겨있을 텐데 그 말은 안했어 라고 하면서 끝내버리는 것. 


145 어떤 식으로든 민주주의(역사학자 루치아노 칸포라가 주목한 것처럼, '민중의 지배'를 뜻하는 민주주의는 민중 정부의 폭력적이고 자유 파괴적인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용어다)가 도래한 정확한 시기를 밝히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가장 적절한 해를 고른다면 기원전 461년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해에 에피알테스와 페리클레스는 혁명을 통해 아레이오스 파고스를 실각시키고 이 기구가 행사하던 대부분의 권력을 폐지시키면서 공공사업에 대한 귀족들의 통제권을 제도적으로 축소시켰다. 물론 민주주의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했다. 예를 들어 공직자들의 보수 체제는 몇 세대가 지난 다음에야 완전히 정립되었다.


우리가 지난 번 알렉시 드 토크빌의 <아메리카의 민주주의>을 읽었다. 민주정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은 조건들의 평등이다. 신분질서가 없어지거나 약화되거나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야 기본적으로 평등한 사회가 되고 거기서 민주정치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민주정이라고 하는 것은 신분제도 가 없어지거나 약화되어야 하고 거기에 덧붙여서 신분의식이 자체가 사라져야 한다. 그런데 아직 우리나라는 신분의식은 남아있다. 적어도 예전에는 혈통을 가지고 따졌다면 지금은 아파트 평수를 가지고 따진다. 


민주정이라고 하는 것은 신분제가 없어져야 하고 거기서부터 따라오는 원리들이 있다. 신분제가 있을 때는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공직을 맡는가가 정해져 있다. 모두 다 신분질서가 없어져버리면 아주 자연스럽게 공직자를 선출하는 문제가 생긴다. 그런 다음에 예전에는 신분에 따라서 공직이 생기니 월급도 알아서 챙겼는데 이제는 월급을 주는 문제가 생기고, 이 사람들을 어떻게 감시할 것인가의 문제도 생긴다. 즉 신부제가 없어지면 공직자를 선출하고, 보수를 지급하고, 시민들이 공적인 의사결정에 참여할 것인가, 이 세가지 문제가 신분주의 타파로부터 나온다.


147 아테네 민주주의의 기반은 네 가지 원칙, 즉 (1) 평등, (2) 선거, (3) 보수, (4) 참여에 의해 구축되었다고 볼 수 있다. 


148 공동체와 관련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시민의 권리는 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간을 낼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이를 해결할 목적으로 등장한 것이 공직자들에게 소액의 보수를 지급하는 정책이었다.


민주정이라고 하면 머릿속에서 다수결이다 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 보다 중요한 것은 신분질서를 타파하는 것이고, 어떻게 보면 전 국민이 공무원이 되는 것이다. 주권자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정을 유지하는 데에는 공무원 수를 늘리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마르크스와 막스 베버를 볼 때 이런 점에서는 막스 베버가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현명한 대책을 내놓지 않았나 한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것은 노동조합인데, 노동조합은 중세 길드적인 것이다. 그런데 막스 베버는 전 국민의 공무원화를 얘기했다. 그것이 오늘 날에는 더 볼만한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민주정의 치명적인 문제는 모두다 평등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게 큰 문제다. 조건들의 평등이 저절로 유지되지는 않는다. 아테나이 민주정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굉장히 노력했는데 일단 페리클레스 시대를 거치면서 전 시민의 공무원화를 노력했다. 그럴려면 월급을 줘야 하는데, 돈이 필요하니까 외부에서 뜯어오는 방식을 썼다. 그게 바로 아테나이의 제국주의다. 그러니까 민주정 아테나이와 제국주의 아테나이가 같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영국이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방법이기도 하다. 내부에서는 자원을 만들어 낼 수 없으니 대영제국이 발전하는 과정이 영국 내의 민주주의 발전과 같이 일어난다. 이 문제가 사실은 굉장히 큰 딜레마라고 할 수 있다.


아테나이 민주주의와 현대 민주주의는 다르다. 아테나이 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이고 현대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얘기를 누군가 얘기한다면 그건 심각한 것이 아니다. 정말로 본질적인 것은 민주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외부로부터 뭔가를 원시적 축적을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민주정 유지의 핵심이다. 어떻게 해서 유럽의 19세기에 제국주의가 발전했는가를 볼 때 사실 유럽 각국 내부에 민주정의 발전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우리나라 안에서 민주정을 하기 위해서 외부로부터 착취해서 들어와야 하는 매커니즘이 있었던 것. 그것이 아테나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을 꼭 생각해야 한다. 


152 패권을 장악한 아테네는 민주주의 체제를 선호함으로써 하나의 구체적인 정치적 방향을 제시했다. 하지만 도시국가들의 입장에서 가장 두려웠던 것은 델로스 동맹에서 탈퇴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이유, 즉 탈퇴가 아테네의 즉각적인 군사개입이라는 위협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152 페리클레스 시대의 광명은 이처럼 빛과는 정반대되는 어두운 측면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모두 폭력적이고 냉소적인 제국주의의 특징이었다. 기원전 300년 대에 드러나게 될 온 갖 어려움을 고려했을 때 사실상 유일한 해결책은 '제국'이었다.


아테나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문명의 표준이라고 생각했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보면 그 유명한 페리클레스의 장례식 연설이 있다. 이것이 링컨의 게티스버그의 연설 등의 표준이 되었는데 거기서 펠리클레스는 아테나이가 헬라스의 학교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지중해 세계 문명의 표본이라고 자부를 했던 것. 중국이 오랫동안 세계의 표준이라고 얘기했다. 중국한테 인정을 받지 못하고 당나라 이후로 오랫동안 고립되어 지내왔던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이기면서 자기네들이 아시아 문명의 표준이라고 얘기한 것. 아테나이 민주정을 간단하게 생각하면 안되고 이 사람들이 당시 문명의 표준이라고 생각했던 것이고 이것이 페르시아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쟁을 이끌어간 하나의 정신적인 토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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