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보면 | 15 움베르토 에코의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 14


움베르토 에코의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 1 - 10점
움베르토 에코.리카르도 페드리가 지음, 윤병언 옮김/arte(아르테)


2017년 11월 4일부터 CBS 라디오 프로그램인 변상욱의 이야기쇼 2부에서 진행되는 "강유원의 책을 읽다보면"을 듣고 정리한다. 변상욱 대기자님과 강유원 선생님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팟캐스트 주소: http://www.podbbang.com/ch/11631




20190119_63 움베르토 에코의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 14

지난 시간까지 그리스를 중심으로 철학을 공부하다가 로마로 건너왔다. 스토아주의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보았고, 키케로도 나왔다. 오늘은 진정한 위안을 주는 종교, 특히나 로마제국과 초창기 기독교의 성립과, 전파를 본다. 카톨릭의 시대이기 때문에 개신교 CBS 방송에서는 전혀 다루지 않는다. 재미있는 것은 철학과에서도 이 부부는 잘 얘기하지 않는다. 이 부분은 종교이니 신학에서 다룰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에서 서양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중세는 거의 다루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 다음에 바로 데카르트로 간다. 기독교라고 하는 것이 예루살렘에서 생겨난 종교이니 동방종교이다. 오리엔트의 종교인데 에게 해라는 희랍전통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서 로마로 전파된 다음에 동방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져 버린다. 그런 다음에 유럽의 사상적 토대가 된다. 이 경로를 굉장히 중요하게, 거의 400-500년 정도에 걸쳐서 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서기가 시작되면서부터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국립대학을 만든 400년 무렵까지, 이 사이의 역사가 아주 복잡한 요소가 겹쳐있다.

이 것이 2018년도 한국 개신교에서 어떤 화두 중에 부분이다. 오리엔탈 동방종교인데 그것이 에게해를 통해서 그리스로 건너가서 그리스의 사변적 철학과 만났고 로마로 건너갔는데 여기서 갈라진다. 바울이 그리스 철학과 묶는 역할을 했다고 해서 바울을 상당히 격하하는 흐름이 하나 있고, 지난 2018냔 같은 경우에는 바울이 그 복잡한 제국주의 상황에서 어떻게 기독교를 나름대로 지켜낼 수 있었나 하는 가치를 높이는 재평가하는 작업도 있었다.

바울이 희랍철학과의 연결고리를 만들 것도 사실이고, 고유한 독자성을 만든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이미 동방종교로서의 기독교가 형성될 당시에 예루살렘이라는 지역 자체가 이미 헬레리즘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그런데 가톨릭교도들도 이런 부분을 잘 읽지 않는다. 어쨌든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면 기독교가 하나의 역사적 형성물이다. 이것을 염두에 두어야만 현대 한국사회에서 기독교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도 생각할 수 있다.

472 그리스도교는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로마 제국이 인정하는 종교로 선포되었고 그 다음에야 지배 계층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이시기의 그리스도교는 (비록 같은 시기에 테르툴리아누스, 클레멘스, 오리게네스와 같은 중요한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이 활동했지만) 여전히 노예들의 종교였고 철학자들의 눈에는 수많은 신비주의 종파들 가운데 하나로 비춰졌을 뿐이다.

472 회의주의나 박애정신 외에도 고대 말기의 종교 사상을 특징 짓는 또 다른 요소는 신비주의였다. 철학자들 역시 지극히 난해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이성적인 차원의 진실을 제시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따라서 이성을 초월하는 신의 계시나 환상을 통해 직접적인 깨달음을 줄 수 있는 계시적인 성격의 진실이 필요했다.

여기서 어려움이 있는 것이 개신교에서는 역사적 형성물로 말하면 인본주의에 속하는 것이다. 사람을 위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성령을 위주로 생각해야 한다. 기독교는 이래저래 치이고 정치적으로 영향을 받고 사회적으로 영향을 받아서 그때그때 모양을 받아서 살아왔다고 하면 약간 신성모독에 해당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사실로서의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형성되어가는 정신적 문화적 산물이다 라는 것을 인정해야 공부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이 약해지는 것도 아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로마총독 폰티우스 필라투스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당한 후에 자기의 스승을 부활한 자로 보았고, 예수의 부할, 아주 중요한 교리 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의 공동체는 부름을 받을 마지막 때의 에클레시아로 되어 있다. 이 당시에 어떻게 해서 로마로까지 가게 되었는가를 볼 때 주목해야 할 점은 기독교도 신자의 구성이다. 

474 예수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이 차지하던 비중과 이들이 모세의 율법을 반드시 지킬 필요는 없다는 확신이 바울의 강력한 영향으로 더욱 확고 해지면서 그리스도교와 유대교가 차별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당연히 처음에는 초기 기독교신자들은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중에서는 예수를 묻지만 모세의 율법도 지키는, 그 사람들은 예수를 메시아가 아니라 인간 선지자로 생각하는 유대인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선교에 의해서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이 신자가 되는 비율이 늘어났다. 이를테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사실은 히브리어도 잊혀졌고 규율도 엄하게 안지켜졌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도 널리 퍼졌고, 그렇게 해서 초창기 오로지 유대인들으로만 구성된 신자들과 바울의 선교로 생겨난 비유대인 신자들과 뒤섞이는 상황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다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최초로 어디에 있는 사람들이 불린 것인가, 안티오키아에 있는 사람들이 불리게 되었다. 게리트 타이센의 <예수 운동의 사회학>, 예수운동이라고 밖에는 그 당시 볼 수 없고, 기독교 운동은 아니었다. 어찌보면 유대교 예수파, 유대교 안의 예수파이다. 그런데 이제 사도행전 11:26을 보면 안티오크의 신도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되어있다. 이것은 분명 바울의 업적이다.

474 유대교는 이어서 73년과 135년 두 번에 걸쳐 패배로 끝난 로마와의 전쟁(절정에 달했던 해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70년이다) 이후에 율법을 토대로 재건의 길을 걸었다. 그리스도교도들과 그리스도교도가 아닌 유대인들은 고유의 관습과 이데올로기를 선택적으로 정립하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다.

476 '그리스도교도'라는 명칭은, 아마도 1세기말 혹은 그 이후에나 집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도 행전」의 내용을 기준으로, 안티오키이아의 예수 추종자들을 부를 때 주로 공동체 외부인들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했고(11장 26절) 따라서 얼마든지 유대교 내부의 종파를 일컫는 용어로 사용될 수 있었다.

사도행전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여기까지는 공존이 가능한데 요세푸스가 쓴 <유대전쟁사>를 보면 유대인들이 로마와 전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유대교가 살아남으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대개 우리 집단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려면 그때부터 조금이라도 집단성의 정체성에 해가 되는 것들을 배척하고 잘라내기 시작한다, 그게 예수를 메시아로 여기고 율법을 거부하는 유대인 기독교들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들이 기록된 것이 대체로 유대전쟁을 전후로 해서 쓰여졌다고 추정되는 요한복음에 기록이 되었다. 유다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회당에서 쫓아내기로 작성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비방을 통해서 상대방의 정체성을 구축해내고 이를 통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과정이다.

477 이러한 선별과 배척 과정은 장소와 배경에 따라 상이한 방식과 속도로 진척되었다. 서기 100년경에 요한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복음서는 예수를 신의 계시자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과 예수의 대척 관계를 언급한다. 이러한 종류의 시대착오적인 설정이 이 복음서에 고정된 예수의 이미지를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발견하던 신도들 무리가 서기 100년경에 직접적으로 경험했던 상황이 예수의 삶에, 즉 과거에 그대로 투영되었다는 전제하에 설명 될 수 있다. 요한은 이러한 상황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회당에서 쫓아내기로 작정했다."(9 장 22 절) 예수가 살아 있었을 당시에는 상상하기 힘들었을 상황을 토대로 하는 이런 식의 표현은 66년에서 73년 사이에 일어난 유대인 반란이 처참하게 실패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던 시작된 참담한 시대에 예수를 메시아로 바라보기 시작한 유대인들을 향해 유대 사회가 표명했던 적대감을 그대로 반영한다.

요한복음 9: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기독교 교리가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그러니까 교리라고 하는 것은 이런 상황 속에서, 좀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현실사회의 세력싸움에서 교리화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실 초기 기독교가 형성되는 과정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상황이 있고 그 상황에 따라 교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상황과 사상이 오고가는 과정에 대한 하나의 전형적인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그 당시 로마에 들어와 있는 잡다한 종교들이라고 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 신비주의이다. 사실 로마에 전파될 초창기에 다양한 신비주의 종교들이 퍼져있었고 기독교도 그것들 중에 하나로 간주되어 있었다. 그런데 왜 기독교가 강력한 종교로서 로마에 자리잡게 되었는가. 이것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자들을 위한 체계적인 구호활동을 펼친 것이 가장 주요했다라고 하는 것이 오늘날 사회사적인 연구에서 거의 합의가 되었다.

이를테면 전염병이 퍼지면 사람들이 다 도망가는데 기독교인들은 오히려 선교지로 여기고 뛰어간다. 그런 것들이 기독교의 강력한 점이다. 심지어 로마황제도 저 종파는 도대체가 병에 걸리지 않는 놈만 모여있단 말이냐 하는 얘기를 했다. 사실 국가가 나서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구제해야 하는데 사회적인 보장장치가 체계적으로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가 꽤 오랫동안, 그게 기독교가 전파되는데 가장 강력한 요소였다고 할 수 있다.

495 물론 복음은 사회적으로 아주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서도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 비록 본격적인 사회 혁명을 예고했던 것은 아니지만 신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가난한 자와 약자들을 위한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빌레몬서」에서 읽을 수 있듯이 바울은 도망쳤던 노예 오네시모를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 보낸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보다 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부유한 일원들의 후원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의 봉사를 통해 약자와 가난한 자들 누구보다도 과부와 고아들을 도왔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활동이었다. 사회보장제도나 연금제가 전혀 없었던 시대에 이러한 후원과 봉사활동은 상당히 매력적이었고, 예수를 믿는 이들이 기근이나 전염병과 같은 재해가 닥쳤을 때 서로를 돕는다든지 강제 노역을 하던 죄수들과 노예들을 돕고 가난한 자들의 장례를 치러주는 활동 역시 비슷한 효과를 발휘했다.

로드니 스타크가 쓴 <기독교의 발흥>을 읽어보는 것을 권한다. 오늘날의 기독교도가 어떻게 하면 기독교를 널리 퍼뜨릴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한다면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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