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역사 고전 강의 — 마지막 시간

 

⟪역사 고전 강의 - 전진하는 세계 성찰하는 인간⟫, 마지막 시간

 

2022.03.26 역사 고전 강의 — 마지막 시간

오늘은 ⟪역사 고전 강의⟫ 마지막 시간이다. 오늘로 ⟪역사 고전 강의⟫ 해설을 끝내고, 앞서 예고한 것처럼 엥겔스의 책을 읽어나가려고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역사 고전 강의⟫에서 엥겔스 부분을 자세히 읽지 않았다. ⟪역사 고전 강의⟫와 연결되는 것이 북리스트에서 20세기 읽기를 하려고한다. 그래서 오늘은 제40강에 있는 부분은 아주 간략하게 이야기하고, 마지막 시간, 역사책을 왜 이렇게 읽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는 미합중국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시대이다." 사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미합중국의 헤게모니가 아주 두드러지게 또는 아주 뚜렷하게 관철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세계에 드러나보였다. 그리고 여러번 말했듯이 인류세라고 하는 이 시기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던 때가 바로 이때이다.  ⟪역사 고전 강의⟫를 쓸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마지막 시간에 있는 것처럼 역사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철학을 전공했지만,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한 학문이라고 얘기하는데, 사실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꿈에 불과하고, 우리는 짧은 인생을 살면서 그보다 조금 길다고 하는 시대에 대해서 경험하고, 그리고 경험하지 못한 것을 역사책을 보면서 날마다 고민하면서 살고 있다. 470페이지에 있는 것처럼 "지금 시대는 어느 때보다도 앞날을 장기적으로 내다보는 안목이 요구되는 시기입니다." 장기적으로 내다보는 안목이라는 것은 사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불가능한 것을 계속 해보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장기적으로 내다보는 안목을 가져서 뭘 할 것인가 싶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굉장히 짧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그것을 알면 뭐할 것인가, 그냥 순간순간을 살다가 죽으면 그만 아닌가 라는 그런 생각도 하게 된다. 그래서 ⟪역사 고전 강의⟫를 예전에 강의를 할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역사책을 보면서 과연 역사책을 보면서 뭘 할 것인가 하는 회의가 마음 한 편에 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역사에 대한 어떤 공부 또는 역사적인 흐름, 앞 날의 흐름에 대한 예측과 비슷한 것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한다. 그냥 역사 공부를 왜 하느냐고 물어보면 긴 흐름 속에서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펼쳐졌던 인간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각자가 뭔가를 터득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자신의 사는 짧은 삶에 적용해 보면서 그 짧은 삶이라고 할 지라도 조금은 보람있게,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한다면 조금은 덜 잘못을 저지르면서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희망때문이라고 말하겠다. 그러면 더 한편으로는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잘못을 덜 하고 하는 것이 좀 나은 삶인가. 사실은 인간은 삶에서 엇이 잘된 일이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궁극적으로 판별해 낼 수 있는 일은 없을 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윤리학적 허무주의이다. 그런 윤리학적 허무주의가 바탕에 놓여 있기 때문에 막사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 해도 그런 윤리학적 강박관념 이런 것들이 있어야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만 산다면 괜찮지 않겠는가 하는 소극적인 생각을 버리고 좀 더 적극적으로 잘 사는 삶, 에우다이모이아, 그런 삶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도움이 되는 아주 일차적인 학문이 역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역사로부터 윤리적인 삶을 이끌어 내는 것, 또는 삶의 지침을 이끌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연 세계를 살펴보면 자연이 어떻게 움직여가는가를 보고 인간은 그것을 본받아서 인간도 자연적 존재의 하나이기 때문에 인간의 살아가는 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통찰이 있다. 이것이 바로 윤리학적 자연주의라고 불리는 것이다. 18, 19세기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들이 한 얘기가 그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자. 보면 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허구적인 것에 불과하고 인간의 감정의 존재이고, 자기의 쾌·불쾌를 충족시키는데 인간은 뭐든지 한다. 그러니 그것에 근거해서 인간의 삶의 행위 지침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쾌를 증진시키고 불쾌를 감소시키는 것이 인간의 행위의 동기니까 그것에 기여하는 학문들을 해보자. 그런 것들이 아담 스미스 같은 사람들의 경제학 원리이다. 그게 바로 흄이라고 사람의 형이상학 또는 존재론적 자연주의, 그런데서 이끌어져 나온 것이다. 그것이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실들로부터 당위를 이끌어 내는 것이 자연주의적 오류이기는 하지만 결국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라고 하는 것을, 그런 윤리적인 명령을 도출해내는 궁극적인 기반은 팩트들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논리적으로는 오류라고 할지라도. 그런데 그것보다는 역사를 통찰하면서 인간이 살았는가, 그리고 역사 속에 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많은 사례가 있다. 윤리학적 자연주의를 논반까지는 아니더라도 반증 사례가 많이 있다. 따라서 역사적인 통찰을 해보고, 사람이 그런 위기의 상황에서 또는 극단적인 이기심을 발휘할 만한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인간은 서로를 돕고 또 자기의 이익을 포기하면서도 공동체를 위해서 기여하고 그런 사례들이 발견된다. 그래서 역사적 윤리학이라까, 또는 역사적 사례에 근거해서 인간의 행위의 지침을 이끌어 내고자 하는 역사적인 통찰에 기반한 윤리학을 해봐야 하지 않겠나, 그게 바로 역사책을 계속 보는 이유이다. 여러분들도 역사 책을 계속 보면서 우리의 삶의 지침을 역사로부터 이끌어 내는데 노력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소박한 바람이다. 그러면 결국 역사란 무엇인가. 아주 흔한 규정이 있다. 우리의 삶에 귀감을 준다. 역사에 교훈을 얻는다. 역사는 삶의 스승인가 라는 물음이 있다. 아주 낡은 관념이지만 아주 중요한 새롭게 다시금 들여다봐야 할 명제가 아닌가 한다.

제40강 460 제2차 세계대전 이후는 미합중국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시대이다. 황금시대도 있었으나, 더욱 짧아진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의 순환고리는 다시 저점을 향하고 있다. 대규모의 체제 전환기라는 조짐은 있는데, 인간 행위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직 모르고 있는 듯하다.

마지막 시간 470 지금 시대는 어느 때보다도 앞날을 장기적으로 내다보는 안목이 요구되는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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