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첫 시간

 

2023.03.10 문학 고전 강의 — 첫 시간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첫 시간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 역사, 철학은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른가


《문학 고전 강의》를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읽어나가겠다. 지난번에는 《문학 고전 강의》를 해설하겠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 해설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한 공지사항 정도를 얘기했다. 지난 시간에 말한 것처럼 《문학 고전 강의》 안에 들어있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만이 아니라 좀 더 포괄적이고도 풍요로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렇지만 출발점으로서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런 문학을 어떤 방식으로 접근할 것인가에 관한 얘기는 개념 규정이니까 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의 "첫 시간"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부터 읽겠다. 이번에 《문학 고전 강의》 해설을 하기 위해서, 이 책이 출간된 이후 한번 읽어 본 후 다른 곳에서 문학고전 텍스트들을 강의할 때 조금씩 참조하기도 했는데 통독을 다시 해본 것은 처음이다. 자신이 쓴 책을 읽는 것은 굉장히 쑥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그 쑥스러움을 견디기 어려워서 잘 읽지 않는데 이번에 읽어보니 모자란 점도 여전히 유지해볼 만한 견해라고 생각되는 부분도 있다. 그런데 첫 시간에 담겨있는 문학에 관한 규정은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책의 19페이지부터는 어떤 작품들을 다룰 것인가 작품들에 관한 간략한 소개가 있는데, 그 바로 앞에 비평에 관한 얘기가 있다. 이 부분부터 설명해보려고 한다.  "작품을 읽은 다음 우리가 파악한 바를 서술하면 그것이 비평입니다. 비평은 자신이 작품에서 얻은 막연한 감동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시인이 드러내고자 했던 '진리 닮은 것'과 그것을 전개하는 방식의 파악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비평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문학 고전들을 읽어나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번에 설명하고자 하는 《문학 고전 강의》라는 책은 비평이다. 길가메쉬 서사시, 호메로스의 서사시, 욥기 더 나아가서 허먼 멜빌의 모비딕에 이르기까지 이런 작품들을 창작한 사람들은 모두 다 시인이라고 지칭을 하고 있다. 시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짧은 단문이나 서사시를 쓰는 사람만이 아니라 또 소설가는 빼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라는 말은 모든 창작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창작자를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poiētikēs》이라고 불리는 책에서도 비극 드라마 작가라고 하지 않고 시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시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창작을 하는 모든 이들을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창작예술론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당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시론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겠나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시인이라고 하는 이미 창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들어있다. 그리고 그가 만들어 내는 것이 예술작품Kunstwerk이니까 시인이라고 부르면 어떤가, 시학이라고 부르면 또 어떤가, 시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된 개념이 있고 고정된 대상이 있어서 그렇지 그것을 옆으로 치워버리면 시라고 부르는 것이 훨씬 더 괜찮지 않겠는가, 단테를 시인이라고 한다면 정말 멋있지 않는가. 《신곡》은 《인문 고전 강의》에 들어있는데 《신곡》도 그 뒤로도 읽은 바도 있어서 책에는 없지만 해보려고 한다. 

첫 시간 18 작품을 읽은 다음 우리가 파악한 바를 서술하면 그것이 비평입니다. 비평은 자신이 작품에서 얻은 막연한 감동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시인이 드러내고자 했던 '진리 닮은 것'과 그것을 전개하는 방식의 파악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비평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문학 고전들을 읽어나갈 것입니다. 

 

비평이라고 하는 것은 이 《문학 고전 강의》는 비평이라는 입장을 말했다. 비평은 자신이 작품에서 얻은 막연한 감동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감상문이다.  예를 들어 위르겐 오스터함멜의 《식민주의》를 읽고 독서감상문을 쓴다고 하면 좋았다, 별로였다 이런 것들, 막연한 감동을 표현한 것. 책의 내용을 그렇게 충실히 담고 있지 않아도 괜찮다. 말그대로 감상문이니까 그렇다. 그런데 지금 《문학 고전 강의》에서 하고자 하는 것은 감동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햄릿》을 읽고 독서 토론을 한다고 하면 '이 구절이 마음에 들더라' 이런 것은 독서 토론이 아니다. 자신이 비평을 가지고 와서 토론을 해야 그것이 독서토론이다. 마찬가지로 그냥 감동은 각자의 가슴 속에 담아두고 비평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한다. 《문학 고전 강의》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바은 바로 이런 지점이다. 그런 일반적으로 문학작품을 읽고 그 문학작품으로부터 감동을 얻고 그런 감도을 나누고자 하는 모임이 독서토론이다라고 한다면 그런 모임을 주로 떠올리는 이들에게는 《문학 고전 강의》가 '이게 문학에 대한 설명인가 철학책과 다르지 않네'라고 생각할 수 있다. 비평Kritik이라고 하는 것을 뭐라고 하는가, "시인이 드러내고자 했던 '진리 닮은 것'과 그것을 전개하는 방식의 파악"을 비평이라고 본다. 시인이 드러내고자 했던 것을 일반적으로 주제라고 부른다. 주제가 무엇이고 그 주제를 어떤 방식으로 전개하는가 그리고 하나 덧붙이자면 그 전개하는 방식에 더해서 어떠한 언어로, 즉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수사학이다, 그것을 전개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비평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비평을 한다 라는 입장에서 문학작품을 읽을 때는 주제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 주제를 어떤 방식으로 직조해서 전개하는 지를 파악해야 하고 그 직조에서 전개하는 과정에서 어떤 스타일의 언어를 또는 어떤 종류의 언어를 구사하는가 그리고 그가 주로 사용하는 수사학은 어떤 방식들인가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는 것이 《문학 고전 강의》를 읽는 태도이기도 하겠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문학 고전 강의》 뿐만 아니라 모든 텍스트를 읽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문학 고전 강의가 되었든 역사 고전 강의가 되었든 역사 고전 강의가 되었든 그냥 일반적으로 관례적으로 또는 관행에 따라 철학책, 역사책, 문학고전으로 나뉠 뿐이지 모두 다 똑같은 방식으로 읽는다. 즉 텍스트라고 하는 것에는 별로 차이가 없고 그냥 똑같은 방식으로 읽는다. 다만 문학 고전 강의, 역사 고전 강의, 역사 고전 강의로 나누어 놓은 것은 요즘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그런 분류가 통용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따라 나누어 놓은 것일뿐 그것이 텍스트를 읽는 방식이라고 것, 그리고 비평이라고 것은 문학에서 많이 사용되니까 그 용어를 사용했을 뿐이지 여기다가 "비평은 자신이 작품에서 얻은 막연한 감동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시인이 드러내고자 했던 '진리 닮은 것'과 그것을 전개하는 방식의 파악입니다." 문장에다가 비평이라는 자리에 "해석"을 집어넣을 수 있다. 철학 고전 강의에서는 "해석은 철학자가 드러내고자 했던 '진리 닮은 것'과 그것을 전개하는 방식의 파악입니다."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기》가 있다. 그러면 펠로폰네소스 전쟁기를 읽고 우리가 뭐라고 할 것인가, 그것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에서 드러내고자 했던 것 또는 그가 드러내고자 했던 시대, 그러면 역사책의 이해는 "역사 서술자가 드러내고자 했던 시대와 자신의 사상, 그리고 그것을 전개하는 방식의 파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비평이라는 말을 여기에 개념 규정을 해놓았는데 이것은 철학책에도 역사책에도 마찬가지로 해당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면 다시 앞으로 와서 16페이지에 그러면 문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할 때 거론하는 것은 "《길가메쉬 서사시》의 첫째 도판"이다. 거기에 보면 "우루크의 성벽을 세운 길가메쉬가 자신이 겪은 고난을 돌기둥에 새겼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신이 겪은 고난, 겪은 일들이 문학의 내용을 규정하는데 세상에 겪지 않은 일을 쓰는 사람은 없다. 망상은 안겪은 일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겪은 일의 범위를 굉장히 적게 하는 것이 된다. 머릿속에서 망상이 굴러간 것도 겪은 것이다. 그게 바로 문학의 내용을 규정한다. 그런데 돌기둥에 새길 때 구구절절 모든 것을 새기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뭔가를 새긴다는 것 자체는 지나간 일들을 반성적으로 회고하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서 취사선택하여 새긴다는 것을 말한다. 겪은 일을 적되 취사선택해서 적는다고 하면 이미 취사선택이라는 행위 자체가 재구성을 의미하게 된다. 남김없이 적는다는 것은 문학이 아니라 일기장이다. 그 다음에 돌기둥은 매체를 가리킨다. "문학은 자신이 겪은 일을 반성적으로 회고하여 불멸을 목적으로 매체에 기록한 것", 그런데 꼭 그것만이 문학인가. 문학이라는 단어를 영어로 literature라고 하는데, 이 말은 문헌이라는 말이 먼저이다. literature라는 단어에서 문학보다는 문헌의 뜻을 더 생각한다. literature라는 문헌의 뜻에다가 문학으로까지 이해를 하려면 뭔가가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그것이 뭐가 있을까를 생각해보기 위해서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뒷세이아》를 한번 본다는 것이다. 《오뒷세이아》에서는 "들려주소서, 무사 여신이여!"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그 남자에 대해 들려주소서", 헬라스 원문은 "그 남자"라고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오뒷세이아》는 앞으로 길게 얘기하게 될 것이다. 지금 《문학 고전 강의》에서 《오뒷세이아》의 비평은 한 단면이고, 《오뒷세이아》는 말할 수도 없이 많은 단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때 문학 고전 강의 전에도 그렇고 강의 준비할 때도 그렇고 강의한 다음에도 《오뒷세이아》에 관한 책들을 읽어보고 그런 것을 보면 《오뒷세이아》라는 것은 엄청난 많은 단면들을 가지고 있다는 보는데, 여기서 보면 들려달라고 하는 것은 형식적으로 보면 시인은 아무 것도 모르고 무사 여신이 들려주는 얘기를 우리에게 전달해주니까 진정한 창작자는 무사 여신이고, 시인은 전달자일 뿐이다. 그런데 신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인데 신이 들려준 순간 인간이니까 신의 말을 다 알아듣지는 못한다. 그래서 그것은 모방물이고, 우리에게 들려준 것은 재현물이다. 재현한 것을 들려준다는 것이 주제이고, 그 다음에 어떠한 방식으로 전달할 것인가를 고민했는데 그것이 바로 형식이다. 그래서 그 둘을 묶어서 진리라는 내용과 그 진리를 구조화한 형식 이 두가지가 반드시 갖춰져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형식이 없는 것도 하나의 형식이 아닌가, 무형식의 형식 이런 얘기를 할 수도 있다. 혼성모방이라든가 포스트모던덕 문학 이런 것도 있다. 오랫동안 전해져온 형식을 파기한 시인이 호르헤 보르헤스이다.  이런 것들이 어떤 주제, 즉 내용과 형식이라는 것이다. 구조를 잘 찾아봐야 한다. 햄릿은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고 또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고, 셰익스피어라는 사람이 또는 호메로스라는 사람이 거기서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가를 찾아봐야 한다.  

첫 시간 16 인류 최초의 서사시로 알려져 있는 《길가메쉬 서사시》의 첫째 도판을 보면, 우루크의 성벽을 세운 길가메쉬가 자신이 겪은 고난을 돌기둥에 새겼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첫 시간 16 길가메쉬가 돌기둥에 새긴 것은 그가 세상에서 겪은 일들입니다.

첫 시간 16 자신이 겪은 일을 돌기둥에 새길 때쯤이면 그는 자신이 겪은 일을 돌이켜보고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뭔가를 새긴다는 것 자체는 지나간 일들을 반성적으로 회고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겪은 일을 하나도 남김없이 새기기 보다는 취사선택하여 새긴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첫 시간 16 여기서 돌기둥은 매체를 가리킵니다.

첫 시간 16 문학은 자신이 겪은 일을 반성적으로 회고하여 불멸을 목적으로 매체에 기록한 것을 가리키게 됩니다. 

첫 시간 17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뒷세이아》는 "들려주소서, 무사 여신이여!"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시인이라는 자가 "주제를 정하고 그것을 드러낼 구조를 설계하며, 그 구조에 맞게 잘 짜인 이야기를" 유려한 또는 정교한 또는 아주 독특한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수사법과 언어를 구사해서 우리에게 내놓는다. 그러면 문학이라는 것이 그것이니까 우리가 문학작품을 읽을 때 파악해야 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라고 첫 시간에 얘기해 두고자 한다.

첫 시간 18 시인은 주제를 정하고 그것을 드러낼 구조를 설계하며, 그 구조에 맞게 잘 짜인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내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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