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05 토마스 만, 선택받은 사람

 

2023.03.25 문학 고전 강의 — 05 토마스 만, 선택받은 사람

Thomas Mann, Der Erwählte
Diese Erzählung gründet sich in den Hauptzügen auf das Versepos »Gregorjus« des mittelhochdeutschen Dichters Hartmann von Aue, der seine »Geschichte vom guten Sünder« aus dem Französischen (»Vie de Saint-Grégoire«) übernahm. 

토마스 만, 선택받은 사람
이 이야기의 핵심 부분은 주로 중세 고지 독일의 시인 하르트만 폰 아우에의 중고독일어로 된 서사시 <그레고리우스>를 토대로 하고 있다. 하르트만은 그의 <선한 죄인의 이야기>를 프랑스어로 된 <성 그레구아르의 생애>에서 차용하였다. 

 

《문학 고전 강의》 해설 녹음을 하려고 하는데, 정직하게 말하면 다른 책을 해설 녹음하는 것보다 이것을 하는 것이 굉장히 즐겁다. 즐겁다는 말에 여러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감안하고 어쨌든 즐겁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면 저는 소설을 읽지 않는다. 그렇다고 애초에 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고 지난 십년동안 이른바 소설이라는 장르로, 범주로 분류되는 책, 서사시도 소설이라면 여러 번 읽었는데, 분류된 것으로 치면 단 한 권 읽었다. 소설이라는 것을 처음 읽은 것은 미디어오늘이라고 하는 매체평론지에 [강유원의 북소리]라고 하는 평론도 아니고 칼럼도 아니고 자의식 과잉의 글들을 쓴 적이 있다. 그때 소설 얘기를 한적이 있는데 그때 처음 읽은 책이 한수산의 밤의 찬가이다. 고등학교 때 아침마다 신문이 오면 소설을 읽고 학교를 가곤했다. 그 무렵에 사촌 형님이 재수를 하느라고 함께 살았는데 아침마다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소설은 한국소설이든 외국소설이든 꽤 많이 읽었던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대학원을 가면서부터 소설을 안읽기 시작한 것 같다. 90년대에 운동권이자 시인이었던 분이 신경숙 작가의 소설을 권해서 풍금이 있던 자리를 읽어보았는데 나중에 그분을 만났을 때 잘 모르겠다고 얘기했던 것 같다. 삶의 자잘한 일상들을 읽고 싶지 않다고 얘기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점점 소설에서 거리가 멀어지고 그 다음에는 한때는 일본소설을 열심히 읽었다. 그것은 읽고 싶어서 읽은 것이 아니라 단테신곡강의를 번역한 이영미씨가 읽어보라고 준 책들을 읽은 것뿐이다.

 

그런데 지난 10년 동안에 돈을 주고 책을 산 책이 바로 토마스 만의 《선택받은 사람》이다. 학술명저라고 하길래 소설이 명저야 그러면서 읽은 것이 토마스 만의 《선택받은 사람》이다. 이 책을 읽은 까닭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가 쓴 서평집 《작가의 얼굴》에서 토마스 만과 하인리히 만에 대해서 써놓은 것이 있다. 그것을 보고 《선택받은 사람》을 아주 극찬을 해서 읽어본 것이다.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에 따르면 토마스 만은 해학가이고 그의 형제인 하인리히 만은 풍자가라고 한다. 해학과 풍자가 어떻게 다른가 그것은 토마스 만을 읽으면 해학이고 하인리히 만을 읽으면 풍자라는 것이다. "풍자는 세상을 비난하고 폭로하며 공격적으로 보여준다면, 해학은 포용적이고 호의적이며 웃음으로써 그려낸다.  해학이 넘친다고 하면 호의적이고 웃음이고, 풍자는 세상을 비난하고 폭로하며 공격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풍자는 해학에 의존하지만, 해학은 풍자에 기대지 않는다." 포섭관계로 얘기하면 해학이 풍자보다 범위가 넓다는 것이다. 그리고 "풍자의 근원이 적의와 원한이라면, 해학의 원천은 공감과 애정이다. 풍자는 증오에서, 해학은 사랑에서 나온다. 풍자의 이면에는 노여움과 분노가 숨어 있다면, 해학의 이면에는 아픔과 우수가 있다. 풍자는 그 대상을 경멸하게 하고, 해학은 이해하게 한다. 풍자는 명민할지 모르나, 해학은 현명하다. " 이렇게 경구처럼 써놓은 것이 있다. 그런데 풍자와 해학 중간쯤에 냉소가 있지 않겠나, 냉소도 아주 차가운 냉소가 있고 그냥 약간은 자학적인 냉소가 있고 또는 약간은 공격적인 냉소가 있고, 해학에 가까운 냉소가 있고 풍자에 가까운 냉소가 있다. 그 냉소가 중간 어디쯤에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을 읽고 토마스 만의 《선택받은 사람》을 읽어봤다. 그런데 이게 정말 포용적이고 호의적이며 웃음으로써 세상을 그려내는 것일까 생각하다가 이것은 좀 냉소적이지 않나, 역시 읽는 사람이, 저는 해학쪽에 가까웠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 냉소가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어쨌든 공감할 부분이 있겠다 생각하고 읽어봤는데 사실 이것을 어제 다시 읽어봤다. 그런데 이것은 해학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다가 어떤 문장이 또는 단어가 어떤 뉘앙스로 쓰였을까, 카프카는 10년보다 그 전에 읽었다. 이것을 읽으면서 카프카도 《성》을 읽을 때도 그랬는데 뉘앙스를 정확히 알고 싶은데, 번역하신 분이 토마스 만 학회가 있다. 얼마나 연구를 열심히 했겠는가. 소설을 번역을 한다는 것은 철학책을 번역하는 것과 다른데, 그래도 어떤 단어를 옮겼을까 궁금하기도 해서 선택받은 사람의 원서를 샀다. FISCHER 출판사에서 나온 것인데, FISCHER가 어부, 낚시꾼이라는 뜻이다. 출판사 마크가 물고기 세 마리를 좌우로 선으로 그려놓은 굉장히 좋아하는 마크이다. 원서와 함께 읽어보았으나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가 쓴 감흥은 느끼지 못했다. 해학의 코드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어떤 지점인지 모르겠으나 어제 그래서 생각나서 다시 읽어보았다. 그런데 소설을 읽어보면 전체는 몰라도 그 부분은 좋더라 하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심지어 이 소설은 그런 부분도 없었다. 그러니 독후감을 쓸 때 감명 깊은 구절 이런 것을 쓰는데 그런 곳에 적을 만한 공간도 없는, 그렇다고 해서 읽는 것이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도대체 왜 읽는지는 모르겠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말을 믿고 한번 더 도전을 해봐야겠다 하고 생각을 해서 찔끔찔끔 군데군데 가끔씩이라도 읽는다.  

《작가의 얼굴》169 이렇게 표현해도 되겠다. 토마스 만은 해학가였고, 하인리히 만은 풍자가였다고.

《작가의 얼굴》169 풍자가와 해학가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풍자는 세상을 비난하고 폭로하며 공격적으로 보여준다면, 해학은 포용적이고 호의적이며 웃음으로써 그려낸다. 풍자는 해학에 의존하지만, 해학은 풍자에 기대지 않는다. 풍자의 근원이 적의와 원한이라면, 해학의 원천은 공감과 애정이다. 풍자는 증오에서, 해학은 사랑에서 나온다. 풍자의 이면에는 노여움과 분노가 숨어 있다면, 해학의 이면에는 아픔과 우수가 있다. 풍자는 그 대상을 경멸하게 하고, 해학은 이해하게 한다. 풍자는 명민할지 모르나, 해학은 현명하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토마스 만의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소설은,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 봐야 하는데, "이 이야기의 핵심 부분은 주로 중세 고지 독일의 시인 하르트만 폰 아우에의 중고독일어로 된 서사시 <그레고리우스>를 토대로 하고 있다. 하르트만은 그의 <선한 죄인의 이야기>를 프랑스어로 된 <성 그레구아르의 생애>에서 차용하였다." 그러니까 이 서사시의 제목은 그레고리우스이고 주인공도 그레고리우스이다.  그것까지는 읽어보지는 않았다. 읽어보면 좋을텐데 중고독일어로 된 서사시를 읽어낼 자신이 없고 번역되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찾아보지는 않았다. "하르트만은 그의 <선한 죄인의 이야기>를 프랑스어로 된 <성 그레구아르의 생애>에서 차용하였다." 그러면 지금 《선택받은 사람》 소설은 토마스 만의 소설인데 토마스 만은 중고독일어로 된 서사시 <그레고리우스>를 토대로 하고 있다. 그러면 <그레고리우스>로부터 뭔가 작품의 동기를 얻어내서 썼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레고리우스>를 쓴 독일의 시인 하르트만 폰 아우에는 프랑스어로 된 <성 그레구아르의 생애>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차용했다고 했다. 그러면 토마스 만의 이 소설은 원천은 <성 그레구아르의 생애>일테고, 그것을 하르트만이 <선한 죄인의 이야기> 또는 <그레고리우스>로 쓰면서 차용한 것을 읽고 그것을 다시 자신의 《선택받은 사람》으로 쓴 것이다. 적어도 중간에 두번은 번형이 되었다. 단순히 그냥 넘어온 것이 아니라 변형이 된 것이다. 지하철3호선을 타고 가다가 4호으로 갈아타려고 하면 그것은 transfer이다. 갈아타는 나는 아무런 변화없이 옮겨가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transfer, 변형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transformation은 form이 바뀐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 그레구아르의 생애>이라고 하는 것이 <선한 죄인의 이야기>로 차용될 때 분명히 하나의 transformation이 일어났다. 그리고 transformation이 일어난 <그레고리우스>를 토대로 하고 있는 《선택받은 사람》는 또한 transformation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성 그레구아르의 생애>와 《선택받은 사람》는 어떤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는가. 우리가 《선택받은 사람》를 표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분명히 <선한 죄인의 이야기>으로부터 어떤 모티브를 차용해왔다. 선한 죄인이라는 말 자체가 벌써 아이러니가 있다. 선하다는 것은 죄인과 양립할 수 없고, 죄인은 선하다는 것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 형용모순인 것을 그 자리에 갖다놓은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시미치를 떼고 있는 셈이다. 이런 것을 아이러니라고 한다. 아이러니는 시치미 떼기이다.

 

 

그런데 굳이 토마스 만이 자기 이야기를 이렇게 어디에서 차용하고 뭘 토대로 했다는 것을 써놓은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다. 호르헤 보르헤스도 어디에서 차용해왔다, 그리고 그것을 썼다고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표절이라고 하지 않고, 위대한 문학적 성취라고 말한다. 그냥 모르척 해도 되는데 굳이 밝힌 이유가 뭘까. 무슨 학술논문도 아니고 말이다. 학술논문이라면 분명한 출처를 밝히는 것, 그리고 그 출처가 훌륭할수록 그 출처에 대한 해석이 독창적일수록 자기자신의 논문의 탁월함을 높힐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들이 《선택받은 사람》을 읽을 필요 없이 <성 그레구아르의 생애>을 읽으면 될텐데 왜 이것을 읽어야 하나. 막상 읽었는데 그것과 별 관계가 없는데 왜 이렇게 써놨을까 이렇게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점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분명히 《선택받은 사람》, <그레고리우스>, <성 그레구아르의 생애> 이 세가지는 토마스 만이 이것을 밝혔을 때는자신의 소설과 <그레고리우스>, <성 그레구아르의 생애> 이 하나의 이어지는 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암시도 아니고 명시하고 있는 셈이다. 어떤 연속성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드러내 보였을까. 흔히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얘기를 한다. 서사시가 그런 것의 전형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 토마스 만의 《선택받은 사람》도 "중고독일어로 된 서사시" <그레고리우스>이다. 서사시 제목이 <그레고리우스>이다. <그레고리우스>라고 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서사시가 《길가메쉬 서사시》이다. 그러면 서사시는 제목이 아니니까 제목이 길가메쉬이다. 주인공 이름을 제목으로 삼았다. 그리고 프랑스어로 된 것도 <성 그레구아르의 생애>니까 생애는 그냥 붙은 것이고, 성 그레구아르겠다. 그런데 토마스 만은 주인공 이름을 쓰지 않은 선택받은 자라고 해놨다.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인가,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뒤에 옮긴이 해제를 읽어보면 문학 연구자들이 써놓은 옮긴이 해제를 읽어보면 이해가 어렵다. 오이디푸스가 나올 줄 알았는데 지금 오이디푸스를 가져다 놓는 것은 좀 아닌 것 같다. 주인공이 자기 어머니와 결혼했기 때문에 그런 측면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서사시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뒤에 토마스 만이 이런 프랑스어로 된 <성 그레구아르의 생애> 그리고 <그레고리우스>라는 서사시를 얘기한 것은 독자들에게 자기가 쓴 《선택받은 사람》소설도 하나의 서사시라는 장르를 읽는, 서사시를 읽는 독법으로 읽어주었으면 하는 것을 은근히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치미 떼고 슬쩍 던져보는 것이다. 독자들에게 소설의 작가가 슬쩍 이렇게 읽으면 좋지 않을까 라는 암시를 준 것이 아닐까. 그러면 《선택받은 사람》를 서사시를 읽는 방식으로 읽어보면 좀 잘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얼핏해보게 된다. 미국의 소설가 제임스 미치너가 쓴 《소설》이라는 소설이 있다. 그런데 제임스 미치너가 소설 작법을 쓴 것이 있는데 소설의 첫 부분에서 독자들로 하여금 질리게 만들어서 독자를 떨어뜨려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있다. 그렇게 해야만 진정으로 독자가 소설을 끝까지 읽어내면서 초반을 견딜 수 있는 자만이 소설을 읽을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하라는 얘기가 있다. 박상용의 《죽음의 한 연구》가 거의 그런 것이다.  첫번째 문장이 엄청 길고 도대체 어떤 얘기를 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는 그런 것. 어쨌든 제임스 미치너처럼 첫 문장에서 독자를 최대한 떨어뜨려야 한다, 견딜 수 없는 자는 떨어뜨려야 한다 라고 하는 사람은 애초에 이 소설을 어떻게 읽어라 라고 하는 독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조차도 하지 않은 굉장히 불친절한 소설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토마스 만은 우리가 《선택받은 사람》을 읽을 때 맨 뒤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네 하고 그러면 서사시처럼 읽으면 되겠구나 하고 읽을 수도 있는데 맨 뒤를 보지 않고 맨 앞페이지부터 읽어나간다고 생각해 보겠다. 그러면 처음에 누가 종을 울리는가로 되어있다. 독일어로는 Wer läutet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읽고 다 읽었다고 해보자. 맨처음부터 끝을 모르는 상태로 일직선으로 읽어왔다고 가정해보자. 다 읽은 독자가 도대체 제대로 읽었는지 알 수가 없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맨마지막에 Diese Erzählung gründet sich in den Hauptzügen auf das Versepos »Gregorjus« des mittelhochdeutschen Dichters Hartmann von Aue, der seine »Geschichte vom guten Sünder« aus dem Französischen (»Vie de Saint-Grégoire«) übernahm." 이렇게 되어있다. 중고독일어라는 것이 중세 고지 독일어를 말한다. Versepos라는 것이 서사시라는 말이 나와있고, 그 다음에 guten Sünder, 선한 죄인이다. 죄인이라는 말로는 구별이 안된다. 형법상의 죄를 지은 사람인지 아니면 도덕적인 죄인인지 구별이 안된다. Sünder이기 때문에 도덕적 죄인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라고 번역한 것이 Geschichte, 역사이다. 그 다음에 übernahm, 차용했다, 간취했다는 말이다. 왜 epic이라고 하지 않고 Versepos라고 했을까. Versepos는 운문으로 되어있는 서사시, epic는 서사시 일반을 가리킬 때 쓴다. 이런 것을 보기 위해서 독일어 원문을 샀다.

 

지금 Erzählung, Versepos, Geschichte, Vie 네 가지 종류의 단어가 등장하고 있다. 지금 《길가메쉬 서사시》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냐하면 이 부분이 갑자기 생각이 나서 그렇다, 서로 호환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일생을 우리는 역사Geschichte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Geschichte라는 것은 이야기로도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앞서서도 말했듯이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아무런 의식없이 가감없이 쓰는 것이 아니라 구성하는 것이다.  <성 그레구아르의 생애>에서 불어 Vie는 있는 생애니까 그대로의 느낌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Geschichte라고 해두면 그 생애의 주요한 모멘트들을 가져다가 뭔가를 구성한 것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도 한데 동시에 Versepos 운문 서사시이기도 한다. 운문 서사시라는 것은 서사시 문법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는 아주 넓은 의미에서는 Erzählung 이야기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길가메쉬 서사시》라는 제목이 있지만 길가메쉬의 생애이기도 하고 동시에 길가메쉬라는 개인의 역사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길가메쉬 이야기라고 해도 되고 길가메쉬의 생애라고 해도 되고 길가메쉬의 역사, 그런데 역사라는 말은 도이치에서 History와 Geschichte가 구별이 되는데 이때는 어떤 구도에 따라서 구축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길가메쉬 개인의 역사인데 개인의 역사 안에 이를테면 소우주처럼 대우주, 또는 그가 살았던 사회, 시대가 길가메쉬 생애 안에 길가메쉬 역사 안에 그리고 길가메쉬에 대한 Versepos, Erzählung 안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의미하지 않겠나 한다. 서사시라는 것이 뭔지를 한 번 생각해볼 때 그것을 따져봐야하고 토마스 만이 소설의 맨 마지막에 이렇게 써놓은 것은 《선택받은 사람》는 서사시를 읽는 독법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다 읽고 난 다음에 독자에게 제시하려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는 것이다. 그러면 독자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서사식 독법처럼 읽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염정소설로 읽었다면 다시 읽어야 하겠다. 그래서 한 번 더 읽게 될 가능성이 놓다. 오늘은 서사시라는 것이 도대체 뭘까에 관한 고민을 하다가 토마스 만 생각이 나서 얘기를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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