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07 제3강 길가메쉬 서사시

 

2023.04.01 문학 고전 강의 — 07 제3강 길가메쉬 서사시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3강

도시화 또는 문명화의 의미
인간 집단은 질서를 만든다는 것: 근원적·원천적·우주적 질서, 인간들 사이의 자연발생적 질서, 공공 영역에서 규범에 따라 세워지는 질서

 

《문학 고전 강의》 제3장 《길가메쉬 서사시》에 관한 것 "사적인 욕망을 함부로 충족시켰던 길가메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오늘 읽는 부분은 길가메쉬 서사시가 서사시이기는 한데 우리가 인류의 역사와 인간집단에 대해서 생각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고려해야 할 점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길가메쉬 서사시를 이번에 《문학 고전 강의》 해설하기 위해서 다시 읽어보니까 《문학 고전 강의》에 담겨 있는 저의 해석들이 지나치게 많이 분석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제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하고 싶은 얘기를 길가메쉬 서사시에 투사시켜서 길가메쉬 서사시를 소재로 삼아서 제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한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잘한 건지 못한 것인지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과잉분석이다. 그냥 이 서사시를 쓴 사람은 길가메쉬 서사시를 재미있게 들려주고 싶었는데 이것을 하나하나 많이 쪼개서 그것에게 미세한 분석을 가해버린 그래서 원래 길가메쉬 서사시를 창작하고 음송하고 그리고 그것을 들으면서 즐겼던 사람들이 과연 이런 것을 의식하면서 제3강에서 분석해 놓은 것을 의식하면서 창작하고 들었는가 그리고 그렇게 즐겼는가에 대해서 약간 아니 많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해도 저는 길가메쉬 서사시를 읽으면서, 인류 최초의 서사시라고 알려져 있으니까, 그래도 인간집단이 생겨나는 과정에서 어떠한 것들이 그들에게 추상적으로 발현되었는가를 좀 길가메쉬 서사시에 빗대어서 살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도 이 생각은 변함이 없고 더욱이 길가메쉬 서사시를 강의할 때는 참조하지 않았던 것들도 요즘에 《문학 고전 강의》 해설하기 위해서 다시 또 읽어보고 있다. 이를테면 사회문화 인류학 이런 책들 그리고 인간의 원시사회, 길가메쉬 서사시는 싸움 얘기가 나오기 때문에 전쟁 고고학 이런 책들도 전에 읽었던 책들도 다시 끄집어 내서 읽는다든가 하고 있다. 그러니 이 해설을 듣는 분들은 지나치게 과잉 분석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러나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길가메쉬 서사시를 공부하면서 그냥 부수적으로 곁들여서 저런 인류학의 개념들 또는 고고학에서 등장하는 것들 또는 철학적인 원리들까지 곁들여서 듣는다고 편하게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길가메쉬가 어떤 사람으로 바뀌었는가 얘기이다. 이 서사시 전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그렇게 얘기하는데, 인간 상황의 변화, 주변 상황의 변화가 그 인간을 바꾸고, 급전, 급박하게 바뀌어 나가는 거, 그런 것이 이행이다. 이행metabasis이라고 하는 것이 서사시 뿐만 아니라 모든 드라마에서도 중요한 계기momentum를 이룬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길가메쉬 서사시는 전체가 그런 얘기이다. 즉 사적인 욕망을 함부로 충족시키는, 제3강에도 썼듯이 철없는 사람임을 보여준다.  길가메쉬가 우르크의 목자인데 목자는 정치가 또는 다스리는 자이다. 그런데 목자임에도 그 자신의 사적인 욕망을 아무렇게나 충족시키고 있다. 그러면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 사이에, 그 차이, 차원의 차이를 알고 있지 못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철없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렇게 철없는 사람이던 길가메쉬가 맨 마지막에는 우르크를 세웠다. 우르크의 성벽을 쌓았다. 그러면 이제 길가메쉬 서사시 전체는, 실제로 길가메쉬 일생이 지금부터 시작되는데, 여기서부터 시작된 길가메쉬 인생 전체가 그가 죽기 전에 우르크 성벽을 쌓을 때까지 전체가 이 사람의 변화 과정, 불멸의 영웅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서사시 하나가, 서사시 전체가 길가메쉬의 변화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중간중간에 그러한 큰 변화의 핵심적인 요소를 이루는 변화들이 또 있다. 즉 자잘한 변화들이 모여서 철없는 사람인 길가메쉬에서 우르크의 불멸의 영웅이 된 길가메쉬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우리 일생을 살펴봐도, 사람은 안변한다, 고쳐쓰는 거 아니다 이런 말들을 하는데, 저는 그 말에 약 10% 정도만 동의한다. 사람은 고쳐 쓸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은 고쳐 쓸 수 있고 변한다는 것에 대한 신념이 없으면 인격의 도야Bildung, 인간의 교육, 문화 Kultur를 이런 것을 탐구하는 일에 나서기 어렵다. 스스로가 그런 것을 통해서 변화하는 것을 느낄 때 다른 사람도 나와 마찬가지로 변화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은 안 변한다 라는 것에 대해서는 수긍하기 어렵다. 물론 타고난 기질 같이 변함없이 그대로인 것도 있겠다. 가족력처럼 유전인자에 영향을 받는 것이니까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렇다해도 인간은 변화한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제3강 42 길가메쉬는 정치가, 즉 공공 영역에 있는 사람이면서도 사적인 욕망을 함부로 충족시키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공과 사가 엉켜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가 철없는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물론 서사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길가메쉬는, 자신이 자랑할 것은 우르크의 성벽뿐이라고 할 정도로 성숙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길가메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커다란 욕망에서 시작해서 우르크의 성벽에서 끝나는데 43페이지에 적어두었듯이 파우스트도 그런 식으로 시작한다. 공공 영역에서 업적을 이룩하고 그런 것들을 객관적 실체로서 건립해놓는 것, 그것을 파우스트가 보여준다. 그러면 파우스트라고 하는 작품은 괴테의 작품 중에서, 같은 서사시니까, 파우스트는 길가메쉬 서사시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오뒷세이아나 일리아스와는 조금 다르게 인간이 비천한 상태에서 공공영역에서의 불멸의 업적을 쌓는 것으로 변화해가는 구조를 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서사시의 하나의 유형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추상화해서 인간의 도야 과정을 다루는 서사시, 물론 오뒷세이아에서의 오뒷세우스도 이렇게 저렇게 죽을 고비를 몇차례 넘겨서 사람이 달라지기는 한다. 그런데 오뒷세이아를 하면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그렇다해서 오뒷세우스의 변화, 비천한 단계에서 성숙한 단계로 가는 변화에 초점을 맞췄다고 보기에는 증거가 많이 부족한다. 그런데 파우스트가 길가메쉬는 그런 것에 초점을 맞췄다고 볼만한 증거들이 넉넉하지 않나, 그게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한 인간이 도야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도야라는 말은 도이치어 Bildung이라는 단어를 한국어로 번역했을 때 도야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이것을 다시 보면 문명화civilization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가 문화적인 성취를 이룬다 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길가메쉬도 그렇지만 오늘 등장하는 엔키두, 2장이 엔키두의 창조이다, 이 엔키두가 날 것 그대로의 창조된 상태에서 본격적으로 길가메쉬의 적수가 되기 위해서 도시로 들어가기까지의 과정이 어찌보면 인간이 원시상태에서 여러 단계를 거쳐 도시인이 되는, 여기서 도시인이 되었다는 말은 문명화되었다는 뜻이다, 그런 과정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한가지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하는 지점은 길가메쉬의 맞수로서 엔키두가 등장했다. 드라마라고 하는 것은 주인공의 antagonist가 반드시 있다. antagonist라는 말은 헬라스어의 agon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이다. agon은 말다툼을 한다는 뜻으로 그 앞에다가 ant를 붙이면 반대편이라는 뜻으로, 논쟁의 상대편을 가리킬 때 antagonist라고 한다. 그런데 이 엔키두가 바로 그런 길가메쉬의 antagonist로서 창조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제3강 43 괴테의 《파우스트》 역시 이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파우스트는 사적인 욕망에서 출발하여 나중에는 공공 영역에서 업적을 이룩합니다. 

 

엔키두는 창조되었다고 하는 것은 바로 말그대로 원초적 존재이고, 도시는 구체적인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문명을 표상하는 말입니다. 얼핏 이 부분을 읽어보면 잠바티스타 비코가 쓴 《새로운 학문》 첫머리에 어떻게 해서 문명화가 이루어졌는가 하는 서술이 있다. 이번에 그 생각이 얼핏 떠오르기로는, 좀더 치밀하게 그것을 뒷받침하는 논변을 아직 만들어 보지는 못했지만, 비코의 《새로운 학문》 도 서사시의 형식을 띠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초반에서만큼은, 경과를 서술하는 것처럼, 지금 길가메쉬 서사시는 한 사람의 엔키두 또는 길가메쉬의 변화과정을 서술하면서 동시에 인류 전체가 이런 식으로 도야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문명을 표상한다, 문명화 과정 이런 것들은 좀더 좁게 말하면 사회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게 당대 수메르 사람들이 문명화 과정 또는 인간이 문명화되는 데에는 어떠 어떠한 단계를 거쳐가는가. 그게 첫번째가 샴하트를 만난 것이 첫번째 단계이다. 샴하트는 여인이다. 여인을 만나서 남녀의 관계를 알게 된다. 그런 다음에 그가 도시에 가서 길가메쉬를 만나면 우정의 단계이다. 우정의 단계라고 하는 것이 도시인이 가지는 것이다. 우정이라는 것이 꼭 친구와 친구 사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폭넓은 의미로 모르는 사람, 낯선 사람과도 일정한 정도로 규범nomos 아래서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우정을 아는 사람이다 라고 얘기할 수 있겠다. 문화인류학에서 보면 이런 규범이라고 하는 것들을 얘기할 때 특정한 사회집단마다 그 사회집단이 고유하게 지키고 있는 규범이 다르고 그 규범의 묶음, 유형 무형의 명문화된 질서, 제도 이런 것과 또는 무형의 행동방식이 있다. 예를 들어서 과학적으로만 따지면 벌레가 굉장히 단백질이 풍부하고 음식으로 손색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벌레를 보면 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문화적인, 이것은 먹을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은 먹을 수 없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과학적인 근거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특정한 문화권 안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되고 있는 그리고 더 나아가서 사람들을 규율하고 있는 문화적인 힘이 작용하기 때문에 그렇다. 엔키두가 도시로 가서 길가메쉬를 만나서 우정을 이룬다고 하는 것도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사태이기는 한데 길가메쉬와 엔키두가 우정을 맺는 방식과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우정을 맺는 방식은 다를 것이다. 그 차이는 문화적인 차이이고 그런데 공통적으로 인간이 인간을 만나서 서로 우정을 나눈다는 것 자체는 인간의 도야 과정에서 굉장히 중요한 단계이다. 그 단계를 거쳐갈 때 문화권마다 우정을 맺는 방식이 다르겠다. 우정을 맺는다는 사실은 어떤 문화권에서든지 발견할 수 있는 것이지만 우정을 맺는 방식은 문화권마다 다를 것이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아주 원초적인 서사이니까 우정을 맺는다는 것 그것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하겠다.  

제3강 44 엔키두는 도시에서 사는 문명화 단계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원초적 존재일 뿐입니다. 도시는 구체적인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문명을 표상하는 말입니다. 

 

그 다음 두번째 문화라고 하는 것은 행동방식도 있지만 특정한 문화권마다 그 문화권에서 아주 당연하게 여기는 질서들이 있다. 그 질서를 만든다고 하는 것은 어떤 문화권에서나 행해지고 있는 일이지만 그들이 만들어 낸 질서의 성격은 문화권마다 다르다. 그게 바로 문화권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정한 문화권에서 그 문화권의 특징이 뭐냐고 말하면 문화인류학에서는 그렇게 대개 얘기한다. 언제 어디서나 적용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떤 것을 먹고 어떤 것을 먹지 않는가, 즉 먹는 것에 대한 금기 또는 인간관계에 대한 금기 이런 것들. 금기를 설정하고 허용하고 하는 것, 이것을 특정한 문화권에서는 받아들이고 특정한 문화권에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게 일단 어떤 특정한 집단을 문화적으로 규정할 때 특징 중에 하나겠고 두번째로는 질서이다. 어떤 질서겠다. 어떤 질서를 근본적인 것으로 생각하는가. 물론 모든 문화권에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세가지 종류의 질서가 있다. 첫째가 근원적 질서이고, 둘째는 인간들 사이의 자연발생적 질서이며, 셋째는 공공 영역에서 규범에 따라 세워지는 질서이다. 세가지가 있다. 첫째는 근원적 질서, 원천적 질서라고 하기도 하고 우주적 질서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우주는 이렇게 돌아간다 이런 것이다. 예를 들어서 고대 히브리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주가 어떤 것인가, 신이 창조했고 언제가는 끝이 있는 질서를 그들은 생각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질서를 만든다고 하는 것, 그 질서가 우주적인 차원의 질서, 인간들 사이의 자연발생적 질서, 공공 영역에서 규범에 따라 세워지는 질서 이 세가지 종류의 질서를 만든다 하는 것이 문화적 행위cultural behavior이다. 그것은 어떤 문화권이든지 다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특정한 문화권과 다른 문화권을 구별지어주는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그렇게 만들어 낸 질서들의 종류이다. 예를 들어서 히브리는 우주적인 질서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런데 고대 중국 같은 경우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순환되어 가고 옛 것이 더 나았고, 또는 지금에 올수록 더 쇠퇴해버린 시기가 되었고 그런 것이다. 종말론적 질서를 생각하는 집단에서는 종말에 가까워 갈수록 더 때가 가득 차게 되는 상황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당장에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를 봐도 옛날이 황금시대였고 지금은 황금시대가 아니다. 후세에 갈수록 인간이나 우주나 닳아진다는 말이다. 닳아져서 worn out 점점 더 쇠퇴해가고 있다는 것이 우주적 질서에 대한 생각이다. 그렇다면 우주적 질서만 놓고 본다면 히브리 사람들과 고대 중국사람들은 좀 다르지 않겠나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이 질서를 만들어 낸다고 하는 공통점은 있지만 그들이 만들어 낸 질서의 차이는 아주 분명하다. 또 다른 예로는 두번째가 인간들 사이의 자연발생적 질서라고 하는데 얼핏 보면 자연발생적인 것 같지만 사실 이것도 사적인 영역에서 인간이 만들어서 사용하는 또는 통용시키는 질서이다. 대표적으로 모계사회냐 부계사회냐 이런 것, 가족간의 관계가 그 사회의 특징까지도 규정하는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모계사회인 곳에서는 그게 바로 인간들 사이의 자연발생적 질서이고, 그것을 이를테면 자연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특정한 사회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자기네들이 그것이 자연발생적 질서라고 규정을 한다. 사실은 인위적인 규정 활동을 통해서 만들어진 질서인데도 그것을 원래 그렇다 라고 하는 자연발생적 질서로 개념화하기도한다. 그 다음에 공공 영역에서 규범에 따라 세워지는 질서, 이게 도시에 사는 이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겠다. 그렇다면 길가메쉬 서사시는 이 세가지 종류의 질서가 근원적인 형태로 담겨 있다. 그러니 인류학이나 이런 책들을 읽고 그런 것들을 응용 연습을 해보면 딱 좋은 텍스트이다. 길가메쉬 서사시를 분석해보면 인류학에서 배운 것들이 여기서 이렇게 나타나는구나 이런 것들을 알 수 있다. 질서를 세운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특정한 문화권에서뿐만 아니라 하위 문화집단에서도, 예를 들어서 록밴드의 공연을 갔다고 해보자. 광란의 무대를 펼쳐 보인다. 그러면 그런 곳에 청중으로 갔을 때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 그런 것들은 대체로 암묵적으로 합의되어 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미친 놈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그 집단에서 통용되는 질서에 대한 관점 자체가 아예 다른다. 그 질서를 내가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의 문제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질서에 관한 한 과학적인 의미에서의 참, 거짓은 따져 물을 수 없고 그 짓을 받아들이는가 거부하는가만 있다. 그런 점들도 길가메쉬 서사시 제2장을 읽으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요소라고 하겠다.  

제3강 46 우리가 생각하는 질서에는 대체로 보아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근원적(원천적) 질서이고, 둘째는 인간들 사이의 자연발생적 질서이며, 셋째는 공공 영역에서 규범에 따라 세워지는 질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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