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10 제5강(1) 길가메쉬 서사시

 

2023.04.11 문학 고전 강의 — 10 제5강(1) 길가메쉬 서사시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5강(1)
길가메쉬의 네 가지 ‘정체성들’ — 사욕이 가득하고 폭력적인 길가메쉬, 친구 엔키두와 함께 명성을 얻으려 했던 길가메쉬, 엔키두의 죽음 이후 영혼 구도자의 길을 떠난 길가메쉬, 구도 여행에서 돌아와 도시를 세운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길가메쉬

* 길가메쉬를 정치적 인간으로 만들어 준 결정적 계기는 무엇인가!!

 

오늘은 《문학 고전 강의》 제5강에 관한 부분이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5강으로 되어 있다. 이때 다룬 고전문학 텍스트들이 어떤 것은 5번째, 어떤 것은 4번, 어떤 것은 3번으로 되어 있는데 이 숫자는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그냥 할 얘기가 많으면 5번을 했고, 적으면 3번하고 그런 것이다. 본래 강의할 때는 이보다 얘기를 많이 했다. 자신이 강의한 내용을 모두 다 하나도 남김없이 책으로 써서 넣을 수는 없다. 그런데 길가메쉬 서사시를, 「문학고전강의」에서 예전에 했던 것을 그 뒤로도 여기저기서 강의를 한 경우가 있다. 《일리아스》는 《인문고전강의》에 들어있고, 《오뒷세이아》는 좀 했고, 그 뒤로도 공부를 더 했고,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여기저기서 강의를 했던 것 같고, 의외로 《오이디푸스 왕》는 별로 안했던 것 같다. 그리고 《맥베스》, 《오셀로》는 좀 했고, 《팡세》, 《파우스트》는 별로 안했고, 《모비 딕》은 좀 더 했고, 그리고 셰익스피어는 역사드라마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리처드2세》, 그런데 아주 가끔 이런 얘기를 듣는다. 현대 문학작품은 왜 강의를 안하는가. 우선 현대 문학작품은 읽은 것이 없다. 전에 얘기한 것처럼 토마스 만의 《선택받은 사람》 이외에는 읽은 것이 없고 그리고 재미가 없다고나 할까. 하나의 범례가 되는 고전작품은 여러 번 읽을수록 곱씹어 볼수록 재미있고 여기에 하나의 분석틀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나서는 다른 것을 못보겠다. 이럴 바에야 《일리아스》, 《오뒷세이아》를 읽을 걸 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게을러서 알고 있는 것을 다시 확인해보기 위해서 읽는 것일 뿐이다. 문학작품을 읽어서 지식이 늘어가는 것 같지도 않으니까. 여러가지로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제5강 친구의 죽음 이후 구도자의 여행을 떠났던 길가메쉬. 이번에 《문학 고전 강의》 해설녹음을 하기 위해서 《길가메쉬 서사시》를 다시 읽어보니까 참으로 좋은 작품인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소설이나 자서전 또는 전기 이런데서 발견할 수 있는 한 인간에 관한 모든 계기와 사건 이런 것들이 일종의 추상화된 원리처럼 들어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읽는 것이 썩 즐겁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현대 사회의 다양한 범죄 이런 것을 보면 인간의 겪음이라는 것, 사악함이라고 하는 것은 한도 끝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몇가지로 유형화해서 판단할 수 있다. 우리는 뭔가를 유형화해서 판단하고 그렇게 해서 추상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또 구체적인 것에 적용하고 그러면서 사태를 파악해 나아간다. 그래야 머리가 덜 힘들지 않겠는가. 제5강은 분량이 좀 되어서 책에서 보면 58페이지부터 69페이지니까 10페이지가 넘는데 여기 얘기가 몇 가지 겹쳐들어가 있어서 한번에 끝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두번째 여행이란 무엇인가. 앞에서 길가메쉬가 야망에 불타올랐었다. 그러다가 엔키두가 죽었다. 젊은 날의 야망이 친구의 죽음으로 귀결된, 그런데 그 여행은 신들의 노여움만 불러일으켰다. 여기서 신들이 나오면 '이게 무슨 신이야, 나는 기독교도니까 읽으면 안되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안된다. 인간은 알 수 없는 어떤 힘 그런 정도로 이해해도 충분하다. 독실하지는 않아도 자신의 종교를 좀 더 폭넓게 이해하고 믿음을 가지고 싶으면 골고루 읽어야겠다. 신들의 노여움만 불어 일으켰다고 할 때는 우상이 아니다. 수메르는 우상이 천지였다고 이야기하는데 레반트 지역에는 우상이 많다. 세상은 복잡다단하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힘은 없기 때문에 그런 우상이 횡행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우상 없이 살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스마트폰도 우상이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하루를 지내기 어렵다. 손에서 스마트폰이 떨어지지 않는다. 늘 쥐고 있다. 그러니까 따지고보면 스마트폰 잃어버리면 치명적이다. 전화번호도 그렇고 각각의 개인이 가지고 있는 아이덴티티도 스마트폰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래서 저는 외출할 때 스마트폰을 안가지고 나간다. 옛날 수메르 시대에는 스마트폰이 없었으니까 우상을 섬기는 것이고 지금은 스마트폰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것이고 그런 것이다. 어쨌든 두번째 여행은 "진정한 불멸을 찾아가는 영혼의 여행"인데 불멸을 찾아갔는데 결국 불멸을 못 얻는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불멸을 얻을 수 있으면, 저는 그렇게 좋을 것 같지는 않다. 내가 무지하다, 좀 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압박해오는 것인데, 살아있으니까 그 압박이 있겠다, 죽으면 그것이 끝날 것이고, 끝나야 이제 편안한 휴식이 있을 것인데 죽기 전에는 휴식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쨌든 철없던 길가메쉬가 영혼의 여행을 함으로써 철든 길가메쉬가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한번쯤은 더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 여행의 여행이다 그리고 불멸을 찾아간다고 할 때에는 인간을 멀리하고 어딘가로 가는 것이다. 이것이 여기서부터는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이다. 사람 아닌 것들을 향해가는 것이니까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일이 되기도 하다.  사람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인간이다. 마음 이론mirror theory라는 것이 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도록 나면서부터 그렇게 진화되어 왔다. 그러니까 좋은 의미에서 타인을 배려하고 눈치를 보고 하는 것, 마음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그렇게 하도록 되어있다. 그런데 진정한 불멸을 찾아가는 영혼의 여행은 인간을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다. 엔키두가 죽어버렸기 때문에 자기가 서로 돕고 마음을 나누고 할 상대방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 어떤 사람이 길가메쉬의 눈에 들어오겠는가. 이제는 신을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깊은 산중에서 도를 닦는 스님이나 수도원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수도사들이나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인간을 멀리하고 신을 찾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인간답게 사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뭐냐고 할 때 그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철없던 길가메쉬가 철든 길가메쉬가 된다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일까를 이것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람을 끊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인가. 그런데 이렇게 보면 서사시가 시작할 때 등장했던, 사욕이 가득하고 폭력적인 길가메쉬가 있고, 친구 엔키두를 만난 다음에 명성을 얻으려는 길가메쉬가 있고, 엔키두의 죽음 이후 영혼 구도자의 길을 떠난 길가메쉬가 있고, 구도 여행에서 돌아와 도시를 세운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길가메쉬가 있다. 이렇게 네 종류가 있는데 폭력적인 길가메쉬가 친구를 만난 다음에 명성을 얻으려는 길가메쉬, 연속체인데 한 명의 길가메쉬 안에 네 개의 아이덴티티가 있다. 폭력적인 것에서 순화해서 명성을 얻으려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 다음에 엔키두가 죽었으니까 영혼 구도자의 길을 떠났다는 것도 연결이 된다. 그런데 갔다오면 불멸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러면 허망하게 골방에 앉아서 '아 불멸이라는 것이 어렵구나, 인생이라는 것이 뭘까' 한탄하고 그러다가 죽는 것이 자연스러운 연결 흐름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길가메쉬는 도시를 세운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길가메쉬가 되었다. 이 부분이 길가메쉬 서사시의 제일 마지막 장면이 가장 놀라운 지점이라고 본다. 이것은 연속성이 아니다. 불멸을 얻을 수 없다, 나는 어짜피 유한한 존재다 라고 하면 우리 보통 사람들은 '그래 살면 뭐해'하고 자연인이 되거나 아니면 소심하게 살고 그럴텐데 길가메쉬는 도시를 세운다. 정치적 인간인데 이것은 정말 무한한 것, 《철학고전강의》의 부제가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이다. 그런데 《문학고전강의》의 부제는 "내제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이다. 사실은 《철학고전강의》, 《역사고전강의》, 《철학고전강의》의 부제들이 서로가 서로를 연결시키고 맞물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어떤 측면에서 보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여하튼 도시를 세운 정치적 인간, 정치적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갑자기 툭 튀어나온 느낌을 준다. 그냥 자연인이 되는 것이 자연스러울텐데.  

제5강 58 이것은 진정한 불멸을 찾아가는 영혼의 여행입니다. 두 번째 여행을 마치고 나면 최초의 길가메쉬, 즉 철없던 길가메쉬는 철든 길가메쉬가 될 것입니다.

제5강 58 이렇게 본다면 이 서사시에는 네 종류의 길가메쉬가 등장하는 셈입니다. 서사시가 시작할 때 등장했던, 사욕이 가득하고 폭력적인 길가메쉬, 친구 엔키두를 만난 다음에 등장했던, 명성을 얻으려는 길가메쉬, 엔키두의 죽음 이후 영혼 구도자의 길을 떠난 길가메쉬, 구도 여행에서 돌아와 도시를 세운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길가메쉬.

 

그러면 이 지점을 한 번 해명을 해야한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해명이 되어 있지 않고 어떻게 해서 정치적 인간이 등장하게 되었는가. 모든 것을 다 겪어보고 나서 세속의 일 중에 가장 더럽다고 하는 가장 골치아프다고 하는 누구나 다 더러운 곳이라고 말하기 쉬운 그것을, 가령 길가메쉬가 우르크라는 도시에서 성벽을 세운다고 할 때 '길가메쉬, 당신은 세상의 깊은 지혜를 아니까 당신이 성벽을 세운다고 하니 우리가 십시일반하겠습니다' 하겠는가. '먼 놈의 성벽이냐, 미쳤나보다'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겠는가. 정치를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말이다. 우리가 해야 할 더러운 짓을 사실 정치인들이 대신해 주는 것이다. 정치적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위대한 인간이 아니다. 우리의 더러운 짓을 대신해 주는 사람이다. 그런데 길가메쉬는 영혼 구도자의 길을 떠나서 무한한 것을 보고 왔고 가장 깊은 지혜를 보고 왔다. 보고 왔는데 정치인이 된 것이다. 그 지점에서 길가메쉬의 정치적 인간, 이 부분은 이번에 다시 생각하면서 읽어보니까 해명이 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정치적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되는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에서도 동굴 바깥으로 나가서 진정한 태양 빛을 보고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가야 된다고 할 때 다시 들어가는 사람이 정치인이다. 플라톤의 국가가 가지고 있는 사회학적인 문제점 이런 것들을 다 떠나서 바로 딱 그 지점, 그 지점이 플라톤 국가의 포인트라고 본다. 도대체 무엇이 그 사람에게 돌아가야지 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했을가, 그 부분이 바로 정치적 인간인데 이번에 《길가메쉬 서사시》를 읽으면서도 그렇고 플라톤을 읽을 때도 그렇고 계속 이것을 어떻게 해서 정치적 인간이 되는가, 정치적 인간이 되는 계기는 도대체 무엇인가. 가령 길가메쉬처럼 세상의 가장 깊은 지혜, 지혜의 정수를 알고 난 다음에도 정치적 인간이 될 수 있겠는가. 절대 다수의 사람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저는 그래서 《길가메쉬 서사시》를 놓고 제6강을 한다고 그러면 무엇이 길가메쉬로 하여금 정치적 인간이 되게 하였는가를 한번 더 얘기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그런 사람이 있을까.  

 

일단 이 서사시에는 길가메쉬의 아이덴티티가 네 개가 있다. 그런데 정치적 인간으로 재탄생한 부분에 대해서는 《길가메쉬 서사시》는 해명을 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우리가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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