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14 제6강(2) 오뒷세이아

 

2023.04.25 문학 고전 강의 — 14 제6강(2) 오뒷세이아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6강(2) 
《오뒷세이아》를 비롯한 헬라스의 서사시와 비극 작품들에서 등장인물들이 겪는 고난은 우연적인 사태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어떤 우주의 법칙이 있어서 그에 따라 그들이 반드시 감내해야만 하는 것들인가. 전자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그들은 내면에서 깊은 절망에, 더 나아가 권태에 빠져들 것이나 작품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보면 현대의 실존문학 작품들은 훨씬 고통스러운 세계에서 사는 인간들을 보여준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뒷세이아》를 해설하고 있다. 《문학 고전 강의》 해설강의를 시작하면서 말했듯이 반드시, 이 책에 있는 내용은 다 다남김없이 다루되 그것에 덧붙여서 다른 작품들까지 포함해서 이야기한다고 말한바 있다. 오늘은 오뒷세이아 이야기에 들어가기 보다는 몇 가지 실존적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는가. 오뒷세우스는, 물론 서사시 안에는 여러 신들이 등장하지만 도대체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닥치는가에 대해서 오뒷세우스의 내면에서 굉장히 의심을 하였을 것 같다. 왜 남들은 전쟁터에 와서 공훈을 세우고 멀쩡하게 돌아가는데, 물론 멀쩡하게 돌아가기는 했는데 돌아가서 도끼에 맞아죽은 아가멤논도 있다, 일단은 돌아간 다음에 뭔가를 하더라도 뭔가를 해야하지 않겠는가. 자기는 계속해서 내쳐지고 있단 말이다. 먼길을 떠돌아다니면서 많이도 떠돌아 다닌 사람. 아무리 꾀를 써도 집으로 돌아갈 만한 그런 방책은 나오지 않는 그런 상황에 처해있을 때 오뒷세우스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도 삶의 국면에서 그런 경우가 있다. 도대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내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길래 그런가. 그런 깊은 고뇌, 고뇌까지는 아니고 화딱지가 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이런 것을 어떻게 스스로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사실 《오뒷세이아》는 고대 헬라스 서사시가 가지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오뒷세우스의 내면에서 어떤 감정의 일렁임이 있었는가, 감정의 출렁거림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상세하게 쓰지 않는다. 그런 것들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으려면, 그전에 간헐적으로 그런 것들이 나타났을지는 몰라도, 셰익스피어까지는 와야 한다. 셰익스피어에 와야 비로소 우리가 내면의 일렁임을 읽을 수 있다. 특히 하찮음과 찌질함은 말할 수 없이 큰 오셀로, 그 정도까지는 와야 우리가 그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오뒷세이아》에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그냥 '나는 집에서 돌아가고 싶어, 페넬로페가 보고싶어' 그런 정도가지고는 내면의 일렁임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런데 우리는 것을 오뒷세우스가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자신에게 닥친 그런 사태들을 무엇으로 받아들였는가. 이것은 그냥 우연한 사태에 불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아니면 이것은 내가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하나의 운명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moira이기 때문에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인가, 반드시 감당하고 지나가야 할 몫인가 이런 것에 대해서 서술이 없다. 그래서 《오뒷세이아》라고 하는 서사시가 굉장히 탁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깊이 있게 우리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오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적어도 허먼 멜빌의 《모비딕》, 비슷하다, 바다에서 떠도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멜빌은 실존, 자기의 내면을 완전히, 피투성이가 된, 다 끄집어내서 완전히 소진시켜서 죽어버린다. 그러면 그가 죽었다고 해서 그것이 그 작품이 슬픈 엔딩이냐 그것은 아니다. 온전히 삶을 살아내버리는 것이다. 그런 것이기 때문에 에이해브와 오뒷세우스를 같이 놓고 생각해보면 충일하게 살고 있다 라는 느낌은 오뒷세우스가 가져다주지 못한다. 그런 것을 우리는 거칠게 규정해서 실존적인 파토스를 완전하게 드러내는 완전히 소진시켜버리는exhaust 국면들이 《오뒷세이아》에는 없다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헬라스 세계에서는 《오뒷세이아》의 주조로서 주된 율조로서 흐르고 있는 것은 분명히 moira에 대한 뚜렷한 신뢰이다. moira를 거역할 수 없 다. 그것은 있겠다. 그리고 절대적 신은 없지만 바로 그것으로부터 코스모스 즉 우주의 법칙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오늘날 현대철학의 용어로 말하면 호메로스의 세계는 분명히 무신론적이다. 절대자는 없다. 인격적 신은 없지만 법칙은 있는 그런 무신론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면 현대사회에서 무신론적인 이야기들, 즉 무신론적 실존사상 이런 것들을 보면 굉장히 처절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마 신을 상실한 세계에서 그 무신론이 등장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예를 들어서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이다. 거기서 카뮈가 이제 무신론자의 계보를 더듬어 올라가고 그러는데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 최초의 인간, 그리고 이방인이라고 번역이 되어있는데 그 제목 자체가 이상하다. 이방인이라는 제목은 카뮈의 작품에서 적절치 않다. 이방인이라기 보다는 낯선인간이다. 자기가 자신에게 낯설게 보이는. 그래서 반항하는 인간, 낯선 인간, 최초의 인간 이렇게 카뮈가 말하자면 인간 3부작을 만들어 낸 셈인데 그 중에서도 반항하는 인간이라는 작품이 상당한 정도로 적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오뒷세우스는 자기의 고난을 겪으면서도 신들에게 반항하지 않는다. 신들에게 반항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뒷세우스가 유신론자이어서가 아니라 법칙에 반항하지 않는다 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오뒷세우스는 자기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아주 뼈져리게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면으로 들어가본다 하면 뼈져리게 고통스러워하지는 않고 이것은 분명히 나에게 하나의 moira일테고 나의 몫일테고 이 몫을 다 견디고 나면 뭐가 또 있겠지라고 하는, 즉 출구가 보이는 암흑의 터널을 지나가고 있다고 생각했겠다. 대신 현대의 무신론자들은,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과 같은 작품들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깜깜한 통로를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실존 사상에서의 무신론과 고대 헬라스 세계의 무신론과 결정적인 차이일테고 실존 사상에서의 무신론은 정말 인간에게 뼈아픈 경험들을 기약없이 그리고 우연이라고 여겨질 수밖에 없는 이것이 법칙에 의해서 나에게 주어졌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것들이고 헬라스 세계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견딜 만한, 출구가 있으니까 견딜만한 것이고 그런 까닭에 거기서는 조금의 권태도 느낄 수 없다. 그러면 출구가 없는 고통은 그냥 고통 자체에 사람이, 고통에 계속 두들겨 맞다 보면 권태의 상황에 빠져들 수 있다. 그게 바로 불안이라든가 초조라든가 이런 것들이다. 그런 권태를 못 견디겠기 때문에 그 권태가 굉장한 고통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겨내려고 말도 안되는 목적을 설정하는 것이다. 거기서 종말론이 나오는 것이다. 권태라고 하는 것은 아예 자신의 비참함을 자각하는 것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가 비참하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통스럽고 불행하고 그것보다 더 아래에 더 처참한 더 밑바닥에 있는 것이 바로 완전한 무기력으로서의 권태이다. 자기를 애초에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뒷세이아》는 그런 권태라든가 부조리함에 대한 어떤 까마득한 아득함이라든가 이런 것들은 우리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오뒷세이아》를 실존철학, 멜빌은 차라리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과 연결지어 읽을 수 있는데 우리가 실존사상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려면 고통 속에서도 그냥 씩씩하게, 어떻게 보면 오뒷세우스는 굉장히 씩씩하다, 씩씩하게 뚜벅뚜벅 걸어가는 오뒷세우스, 이 작품과 대조해서 읽어볼 때 실존사상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인간이 얼마나 밑바닥에 내려갔을 때 등장하는 것인가를 잘 알 수 있지 않나 한다. 

 

실존사상 얘기가 나왔으니까 우리나라에 실존사상, 실존철학에 관한 책은 딱 한권밖에 없다. 조가경 교수님의 책으로 박영사에서 나왔다. 초판이 1961년에 나왔다. 70년에 수정증보초판이 나왔고, 91년에 개정판이 나왔고 93년에 개정판 중판이 나왔다. 예전에 실천철학 강의를 해서 이 책을 가지고 있다. 강의를 했던 만큼 열심히 읽었던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지금 읽어도 잘 쓰여진 책인데 요즘 오뒷세이아를 읽으면서 생각이 나서 들춰 봤는데 들춰보면서 들었던 생각이 이렇다. 고대 헬라스의 서사시나 드라마들 이런 작품들도 고통에 가득 찬 인간들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고통에 가득 찬 인간들이 불쌍해 보이지는 않는다. 심정적으로 공감이 잘 안가는데 왜 그럴까 생각해보다가 지금 말한 것들이 떠올랐다.  실존철학의 내용을 보면 제1부 실존사상의 발전사적 개관, 제2부 실존철학의 대상과 방법, 제3부 실존철학의 근본문제, 제4부 실존철학의 학문이론, 제5부 현대 실존철학의 개별적 형태의 특징, 제6부 실존철학의 비판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제5부는 하이데거와 사르트르, 야스퍼스, 제5부는 이론적인 부분이니까, 하이데거는 모르겠는데 사르트르는 논의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가장 재미있고 반드시 읽어야 될 학문적인 부분은 제3부와 제4부인데 우연성과 유한성의 문제, 초월과 자유의 형이상학, 실존적 인간 해석의 문제, 역사의 이해의 문제로 되어있는데 여기서 실존적 인간 해석의 문제를 보면 프로메테우스, 시시포스가 나온다. 카위의 시시포스도 있다, 그런데 시시포스가 그리 불쌍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 것이 조금 이상하다. 그러니까 실존적 인간 해석의 문제라고 하는 제3부를 보면서 이런 것을 좀 더 밀도있게 논의를 하려면 호메로스의 서사시라든가 오이디푸스, 아이스퀼로스나 이런 사람들을 이런 텍스트들을 대조 비교해보면서 읽어보는 것이 더 낫지 않겠나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연성과 유한성의 문제, 이런 부분들은 주제 자체가 굉장히 중요하다. 조가경 교수님도 지적하고 있듯이 우연성과 유한성의 문제 이런 것들은 사실 고전철학의 관심에서 배제된 문제들이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사람들은 우연성과 유한성의 문제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왜 안했나. 앞서 말한 것처럼 그들은 눈 앞에 벌어진 사건들이 우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어떤 moira 안에서 벌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에 우연성이라든가 유한성이라든가 이런 것들에 대한 고통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법칙 아래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오늘은 실존철학이라고 하는 어떤 그런 전망perspective에서 《오뒷세이아》를 읽어보면 어떨까 한번쯤은 생각해볼 문제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