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12 제5강(3) 길가메쉬 서사시

 

2023.04.19 문학 고전 강의 — 12 제5강(3) 길가메쉬 서사시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5강(3) 
moira: 신들마저도 복종해야 하는 운명
tykhē: 순환하는 운명, 라티움 어 fortuna
보에티우스는 ⟪철학의 위안⟫에서 라틴전통의 ‘운명’을 폐기한다.

 

길가메쉬 서사시를 설명한 《문학 고전 강의》 67페이지를 보면 "신은 인간의 운명을 정합니다."라는 문장이 있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까 이 문장은 그렇게 신경써서 쓴 것 같지는 않다. 그 당시 강의를 할 때 강의를 정리하고 돌이켜보고 하면서 했을 텐데, 모든 문장을 다 신경써서 썼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 그러면 책을 쓸 수가 없다. 평소에 말을 정제해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게 문장으로 나오는 것이니까 그렇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무심코 써버린 것은 책 편집자가 지적을 해주면 그것을 고치고 그런다. 지금 이렇게 읽어보니까 그러니까 지금 고전강의 해설녹음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저를 위해서 잘하고 있는 것 같다. 자기가 쓴 책을 그리 꼼꼼하게 읽어보거나 그러지는 않기 때문이다. 초판 1쇄가 2017년 5월 15일에 나왔으니까, 인문고전강의는 4월 15일에 나왔다. 2017년 5월 15일이면 벌써 6년이 되었다. 꽤 되었다. 6년이 지나서 다시 한번 읽어보면서 조금 더 깊이 생각할 걸, 뭔가 행위를 하고 떠들었고 글을 썼고 해서 객관적인 실체로 드러난 것이 《문학 고전 강의》이라는 책인데 이 책을 다시 읽어보는 것은 결국 제가 제 삶의 괘적을 돌이켜 보는 것이고 저작물Work을 살펴보는 것이어서 반성적인 태도를 가지는데 아주 좋다. 일기를 써서 돌이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것 같다. 일기의 필자는 자신이고 독자도 자신이다. 그래서 일기를 출판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이다.  

제5강 67 신은 인간의 운명을 정합니다.

 

여하튼 "신은 인간의 운명을 정합니다." 이 말을 좀 명료하게 해 둘 필요가 있지 않나 한다. 지난 번에 쓸쓸하다는 것에 대해서 얘기했는데, 그리고 이 부분이 67~69페이지, 몇 페이지 안 남았는데 남겨둔 것이 이것을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길가메쉬가 정치적인 인간이 되었는가에 대해서 말을 좀 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문학고전강의를 강의할 때는 길가메쉬 서사시를 강의할 때는 길가메쉬 서사시가 갑자기 정치적 인간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고민은 했는데 깊게 문제의식으로 가지지는 못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생각해보게 된다. 사실 이런 정도의 삶을 살면 자연인이 되기 쉽다. 그런데 이 사람은 도시로 나와서 성벽을 세웠다. 왜 그랬을까. 이 서사시 안에는 답이 없고 혼자 깊이 생각을 해봐야 하는 것이다. 깊이 생각한다는 것이 아무리 깊이 생각해도, 우리가 뭔가 깊이 생각한다, 골똘히 생각한다는 것이 붙들고 앉아서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다른 각도에서 또 보고 다른 자료로 통해서 이것을 살펴보고 그리고 길가메쉬 서사시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책들을 읽다가 이렇게 연결이 되어서 그것들을 포괄적으로 알게 되었을 때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포괄적으로 안다는 것이 깊이 생각하는 것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 인간의 탄생이라는 문제를 2017년 이전에도 생각했고 이후에도 생각했는데, 그건 그냥 단순히 열정이기만 하면 된다고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신은 인간의 운명을 정합니다." 이 문장을 먼저 설명을 하면 고대 희랍의 세계에서는 신이 인간의 운명을 정한다. 그런데 신마저도 복종해야만 하는 운명moira이 있다. 그러니까 위계질서가 있는 셈이다. moira라가 있고 신이 있고 인간이 있다. 신이 인간의 운명을 정한다 라고 말할 때 이것은 보편명제는 아닌 것 같다. 신이 인간의 운명을 정한다 라고 말할 때 고대 그리스에서는 운명moira이 있고 헬라스 세계에서는 신마저도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신이라고 해서 전지전능한 것은 아니고 운명에 복종하는, 운명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신도 알 수 없는, 복종해야 하는, 그러니까 거기서는 신을 숭배하는 일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신은 어떻게 보면, 신과 거래가 가능하다. 운명과는 거래가 불가능한데 신과는 거래가 가능하다. 그게 고대 헬라스 종교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래서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케팔로스가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제물을 바치는 것이 거래하는 것이다. 운명과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게 에우리피데스쯤에 오면 moira의 위력은 약해지고 tykhē라고 하는 복불복 운명이다. 순환하는, 그러니까 고대 헬라스의 세계관이 순환하는 역사관이다 라고 말할 때 사실은 그것은 후기 쪽이다. 나중의 역사관이다. moira에서 tykhē로 전환된 다음의 얘기이고, 역사는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이것을 알 수 없는 영역에 있을 때는 moira의 시대이고, tykhē의 시대가 오면 빙빙도는 것이 된다. 동아시아 세계에는 거의 그런 것이 지배적이었던 것 같다. 인간은 알 수 없는 moira 같은 것이 있어서 다음에 무엇이 올지 알 수 없다는 것은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없던 것 같다. 한번 흥하고 한번 쇠한다. 일치일란一治一亂, 한번은 다스려지고 한번은 난리가 난다고 하는 것이 동아시아세계에서의, 동아시아는 한중일 삼국인데 일본은 그런 것이 없다, 일본은 세계관이 없는 나라이다. 그런데 moira의 시대에서 tykhē의 시대로 온다고 하면 순환이 된다. 그것이 로마로도 이어져서 순환사관이 되고 그 순환사관이 그대로 우주가 세계가 그렇게 흘러가니까 정치체제도 순환이 되는 것이다. 정치체제도 순환사관을 따라가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이 폴리비오스의 《역사》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로마사람둘이 정리한 역사관이 아니라, 로마사람들도 그런거 없이 살았던 사람이고, 폴리비오스는 헬라스 사람이니까 로마세계에서 살아간 헬라스 사람이 그런 순환사관을 정리했던 것이다. 보에티우스가 《철학의 위안》에서, 위안이라는 것에 초점을 두고 이 책을 읽으면 큰 위안을 받겠구나 생각하면 안된다. 절대로 위안을 받지 못한다. 《철학의 위안》에 나오는 내용은 tykhē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복불복은 없고, 다시 어떻게 보면 moira의 시대로 되돌아가려는 어떤 전환점을 마련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위로가 될지 모르겠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moira가 있다는 것을 확고하게 믿으면 위로가 될까, tykhē를 믿으면 위로가 될까. 저는 moira를 믿으면 위로가 되는 쪽이다. 지금 내가 상황이 안 좋은데 다음에 좋은 일이 오겠지 tykhē를 믿어보자. tykhē라고 하는 것이 헬라스어라면 fortuna, 행운이라고 번역되는, 영어로는 fortunate, 그것이 tykhē이다. 다음 번에는 올거야, 그런데 죽기 전에 안오면 어떻게 하는가. 그러니까 그것을 기다리는 조바심을 갖느니 moira가 낫지 않는가. 보에티우스는 moira를 얘기하면서 기독교의 하느님으로 얘기했다. 그러면서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이라는 책 하나가 그런 tykhē의 세계관을 끝장을 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해도 사상사의 맥락에서 보면 중요한 연결고리가 있다. 그래서 《철학의 위안》의 관점에서 보면 굉장히 재미있는 중요한 critical한 텍스트가 되겠다. 그러다가 르네상스 시대에 보면 moira 따위는 없다. 다시 tykhē의 시대, 즉 fortuna의 시대가 왔다 그러니 거래가 가능하다고 말해버리면 마키아벨리가 되는 것이다. virtù를 가진 군주는 fortuna를 쥐락펴락 할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그때 약간의 성적인 이미지가 들어간다. fortuna를 여신이라고 표상하게 되면, virtù는 남성이니까. virtù를 덕이라고 번역하면 안되고 힘이다. 쎈 힘이라고 번역하면 된다. "신은 인간의 운명을 정합니다."이라는 문장을 지금 말한 것처럼 이런 맥락들을 생각하면서 읽어야 한다. 길가메쉬 서사시에서는 신마저도 moira에 복종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moira와 신과의 관계, 그리고 스 신이 인격적인 것인가 아니면 그냥 법칙을 표상하는 하나의 이념체에 불과한가에 대해서도 아직 분화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확실한 것은 인간은 필멸의 존재라고 하는 것, 이것은 확실한 것이다.  

 

그 다음에 길가메쉬가 영생을 주는 식물을 얻으려다가 못 얻었다. 길가메쉬에게 절대로 줄리는 없다. 늙은이가 젊은이로 되다 인데, 영어판에는 "How-the-Old-Man-Once-Again-Becomes-a-Young-Man"(늙은이가 다시 젋은이가 되는 방법), 이런 긴 이름을 가진 식물, 명칭 속에서 그것이 가지고 있는 본질태가 완전히 드러나 보이는 것, 아주 마음에 든다. 그런데 뱀 한 마리가 와서 가져가 버렸다고 하니까 창세기를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냥 그런가 보다 한다. 뱀이라고 하는 동물은 상징 사전 같은 것을 보면 여러가지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온갖 것을 다 상징하기 때문에, 동물이 무엇을 상징하는가에 대해서는, 제 강의를 계속 들어본 사람을 알겠지만, 동물이 무엇을 상징하는가에 대해서는 신경써서 얘기하지 않는다. 상징적으로는 중요하겠지만.  

제5강 68 그것은 "가시 덤불", 영생을 주는 식물입니다. 그 식물의 이름은 '늙은이가 젊은이로 되다'입니다. 영어판에는 그 이름이 "How-the-Old-Man-Once-Again-Becomes-a-Young-Man"(늙은이가 다시 젋은이가 되는 방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의 영생이 불가능함을 몸소 깨달은 길가메쉬는 정치적 인간이 되는데 69페이지에 그 부분을 해명을 하지 않은 상태로 지나갔다. 그때는 이것이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을 못했을 것이고 또 생각을 했더라도 그 당시 문학고전강의를 할 무렵에는 답을 못내었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그리고 문학고전강의를 하면서 정치적 인간에 대해서까지 얘기할 필요가 있겠나 하는 오만한 생각도 있었겠다. 그래서 지금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니까 정치적 인간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가. 중요한 문제라고는 하는데 여전히 지금 이 말을 꺼내고 있는 순간에도 답은 내지 못하고 있다. 인간이 필멸의 존재라는 것을 알았는데 정치적 인간이 되었다. 어떻게 해서 그것에다가 자기 자신을 투사하는가. 사실 고대의 서사시들은 정치적 인간에 대한 얘기는 없다. 저의 막연한 생각으로는 인간은 정치는 발명하지 않은 것 같다. 정치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권력 투쟁이고 권력이라는 것이 자원을 배분하는 힘이다. 자원을 배분하는 힘이라는 것은 내가 더 가지고 싶다 하는 것일테고 그것을 화해시키려고 하는 힘이고 그런 힘이 일어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일텐데 그것을 조화시키고 다투지 말라고 말리고 이렇게 나누어라 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은 아닌 것 같다. 창세기를 읽어봐도 인간은 늘 다투는 인간이고, 이제부터는 정치를 좀 해야 해, 정치를 해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사는 것이 좋아 라고 하는 명령은 신이 내려주는 것이 아닌가. political authority의 궁극적인 근거는 신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여기서 감히 과장되게 말해보자면 길가메쉬가 영원한 도시 또는 불멸하는 도시를 세운 것은 길가메쉬가 거의 신을 닮은 God-like 사람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정치가가 되려면 신을 닮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정치가가 되려는 인간, 그 사람은 어찌보면 불멸로 나아가는 신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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