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09 제4강(2) 길가메쉬 서사시

 

2023.04.08 문학 고전 강의 — 09 제4강(2) 길가메쉬 서사시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4강(2)

hybris: 길가메쉬와 엔키두의 야망, 삼목산 산지기 훔바바 살해, “신들의 비밀스러운 성소”를 연 것
nemesis: 신들의 분노, “하늘의 황소가 우루크 땅에 이르렀을 때”(when the Bull of Heaven reached the land of Uruk), 엔키두의 죽음 

 


오늘은 《문학 고전 강의》 제4강두번째이다. 52페이지부터 읽는다. 길가메쉬가 엔키두를 만났다. 길가메쉬를 예전에 읽을 때는 그런 생가을 안했는데 지금 이렇게 읽어보니 길가메쉬가 젊은이다. 저는 늙은이는 아닌데 적어도 젊은이는 아니다. 지금 저를 스스로 어떤 사람이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뭐라고 해야 할까. 저의 의식을 항상 강하게 사로잡고 있는 것은 불안감인데 무식한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 그래서 공부를 잘하는 법 그런 책이 있으면 사서 읽는, 길가메쉬는 52페이지를 보면 "오, 나의 친구, 나는 항상 삼목산으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지." 그래서 젊은이라면 한번쯤은 가져볼 만한 야망이고 친구와 함께 삼목산으로 "올라가는" 여행을 한다. 올라간다는 것이다. 엔키두와 함께 친구와 함께라면 무엇을 못하겠는가. 길가메쉬는 삼목산으로 올라가는 것이 길가메쉬의 야망이었던 것 같다. 야망은 누구나 다 가진다. 어떤 야망이, 공부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굉장히 신성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세속적인 야망이다. 인간은 신성할 수 없으니까 신성한 야망은 세상에 없다. 그런 세속적인 야망의 종류가 여럿 있는데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이 바로 문학 작품들이다. 길가메쉬는 삼목산으로 올라가는 여행, 이것이 첫번째 여행인데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세속적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여행입니다." 그러면 다른 것은 세속적이지 않는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야망은 다 세속적인 것이다. 인간은 세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천상에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세속적 야망이다. 오셀로도 세속적 야망이고 멕베스도 세속적 야망이고 리처드2세도 세속적 야망이고 그렇다. 그들은 세속적 야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당대의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지고 인정받는 것이라면 후대의 사람들에게는 아주 하찮아 보이더라도 그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당대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못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어 그것을 성취해 보이겠어 하는 그런 것이 당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면 그를 우리는 뭔가를 성취한 사람이다 라고 얘기할 수 있겠다. 세속적 야망을 떠난 인간은 없다. 세속적 야망을 떠났다고 그러면 방금 전에 말한 것처럼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세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길가메쉬의 야망은 허황된 것이 아니다. 지금 이렇게 《문학 고전 강의》을 읽어보니까 세속적 야망이라는 말을 씀으로써 뭔가 고귀하고도 신성한 야망은 따로 있는 것처럼 그리고 인간이 그것을 추구할 수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써놓은 것 같은데, 지금 읽어보니 그것은 아니다. 그런데 철없는 젊은이의 전형적인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여행이다. 누구나 다 철없는 젊은이에서 시작한다. 저도 철없는 젊은이였고 철없는 젊은이의 전형적인 야망을 산을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책으로 쌓여진 산이 있다면, 예전에 함께 공부하겠다고 하는 사람을 보면 그런 것이 강한 사람이 있다. 그것이 있으니까 공부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질이 조금 다른 것은 있었겠다.  

제4장 52 "오, 나의 친구, 나는 항상 삼목산으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지." _《길가메쉬 서사시》 6. 훔바바 살해 음모

제4장 52 이것이 길가메쉬의 세속적 야망입니다. 젊은이라면 한번쯤 품어볼 만한 야망일 것입니다. 이 서사시에는 여행이 두 번 나오는데, 첫 번째 여행이 "삼목산으로 올라나는" 여행입니다. 삼목산 여행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세속적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여행입니다. 


엔키두가 죽은 다음에는 두 번째 여행을 떠나는데 그것은 고독한 영혼의 여행이고, "그때는 우주의 질서에 대해 궁금해하며, '대홍수 이전'의 사실들을 알아서 세상의 참다운 이치를 찾으려 합니다." 그런데 우주의 질서에 대해 궁금하고 세상의 참다운 이치를 찾으려 하는 것은 세속적이지 않은 것인가. 그건 아닌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것 또한 세속적 야망이다. 인간이 우주의 질서, 세상의 참다운 이치를 알 수 있겠는가. 아닌 것 같다. 그냥 길가메쉬는, 삼목산이라는 곳은 신이 거주하는 산이다. 불멸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그러면 허황되고 호기롭고 그런 것이고,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이렇게 하는 그렇지 않는가. 글쎄 쉽게 말하기 어려운 것 같다. 그래서 삼목산에 올라가기 전에 훔바바 살해 음모를 꾸미고, 길가메쉬가 우르크의 장로들에게 말하러 간다. 장로들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아주 젊소. 그래서 너무 감정에만 치우쳐 있고, 자신 스스로 하는 말조차 모르며, 야욕에만 사로잡혀 있는 것이오.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지도 모르고 말이오이다." 장로들은 그것을 야욕이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여기서 길가메쉬에게 야욕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 저쯤 되는 인간이었겠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 같다. 가 봐라, 삼목산에 가서 훔바바와 싸워봐라, 훔바바와의 싸움이 길가메쉬 서사시의 9번째 것인데 삼목산을 지키고 있다. 길마메쉬가 엔키두에게 산지기 훔바바를 완전히 사라지게 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러면 신들에게 불경을 저지르는 것이고 그러니 전지전능한 신 엔릴이 완전히 알기 전에 얼른 해치워야 한다. 그래서 싸움이 끝났는데, 신들의 거주지인 삼목산을 지키는 산지기를 죽였으니까 "신들의 비밀스러운 성소"를 열어젖힌 것이다. "이리하여 신들의 비밀스러운 성소가 열렸다." 그러면 이제 인간의 오만함이라는 것이 신들의 노여움을 산다고 하는, 신들의 노여움을 사니까 당연히 길가메쉬를 벌주기 위해서 하늘의 황소가 우르크에 도착했다. "when the it[Bull of Heaven] reached the land of Uruk, “하늘의 황소가 우루크 땅에 이르렀다.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러니까 "황소가 우르크 땅에 오자 숲이 말라버렸고, 갈대로 된 화단도 풀밭도 말라버렸으며, 유프라테스 강의 물이 줄어들었습니다. 자연재해가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자 엔키두와 길가메쉬는 황소를 죽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황소를 죽인 후 둘은 그의 심장을 도려내어 샤마쉬에게 선물로 바쳤다고 얘기되어 있는데 이제 신들이 사는 거룩한 땅을, 신성한 산지기를 죽였고, 또 신들이 보낸 하늘에서 온 황소를 죽였으니 그러니 누군가 하나는 죽어야겠다. 그게 바로 엔키두의 죽음이다. 그 댓가를 치르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 이 사건은 굉장히 전형적이다.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전형적인 사건으로서 여기에 제시되어 있다. 늘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우리 인간은 겸손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유한함을 깨닫는 사람으로서 저절로 남을 수 있을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그런 점에서 보면 굉장히 전형적인 사건들을 잘 보여준다. 이 전형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인간이 어디까지 갈 수 있고, 어디까지 가서는 안되는가에 대한 얘기들이 되풀이된다. 예를 들어서 멕베스를 던컨왕을 죽였을 때 얼마나 괴로워하는가. 던컨왕을 죽였다고 하는 것은 신들의 신성한 산을 지키는 산지기 훔바바를 죽였다는 것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요즘에 아주 흔하게 쓰이는 말처럼, 선을 넘어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의 전형적인 사건이다.  

제4장 52 길가메쉬는 엔키두가 죽은 후 두 번째 여행을 떠나는데, 그것은 고독한 영혼의 여행입니다. 그때는 우주의 질서에 대해 궁금해하며, '대홍수 이전'의 사실들을 알아서 세상의 참다운 이치를 찾으려 합니다. 

제4장 53 "길가메쉬, 당신은 아주 젊소. 그래서 너무 감정에만 치우쳐 있고, 자신 스스로 하는 말조차 모르며, 야욕에만 사로잡혀 있는 것이오.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지도 모르고 말이오이다." _《길가메쉬 서사시》 6. 훔바바 살해 음모 

제4장 55 황소가 우르크 땅에 오자 숲이 말라버렸고, 갈대로 된 화단도 풀밭도 말라버렸으며, 유프라테스 강의 물이 줄어들었습니다. 자연재해가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자 엔키두와 길가메쉬는 황소를 죽입니다. 


그렇게 해서 첫번째 여행이 끝난다. 첫번째 여행은 자신의 오만함을 마음껏 발휘고 그 오만함을 발휘한 대가로 신들의 nemesis, 복수를 당한, 즉 hybris와 nemesis, 인간의 hybris와 신들의 nemesis이 두 가지가 딱 부딪치는 지점 그것이 바로 엔키두의 죽음까지 나온 사건이라고 할 수 잇다. 이것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hybris와 nemesis 이 구도를 가지고 분석을 해들어간다고 하면 크게 실패하지는 않는다. 과연 어느 지점에서 hybris가 꺾이는가, 무엇때문에 그가 hybris를 발휘하는가. 인간은 누구나 다 hybris를 가지고 있는데, 그리고 결코 신들의 노여움을 사지 않는 노여움을 사서 nemesis를 불라오지 않는 지점은 어디인가. 예를 들어서 오레스테이아 3부작에도 그런 것들이 있고, 신들의 노여움을 산다, 또 오이디푸스도 그렇고, 그런데 신이 인격신이라는 것은 아니다. 법칙이고 우주를 움직이는 법칙이니까 세속에 살면서 그것을 벗어날 수는 없다. 그것을 지금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엔키두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깊은 우정을 나눈 친구인 엔키두가 죽었으니까 혼자 남은 길가메쉬는 이제 방황을 할 수밖에 없고 그런 방황을, 이 허전함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두번째 여행을 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제5강 친구의 죽음 이후 구도자의 여행을 떠났던 길가메쉬라는 주제로 전환되어 들어갈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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