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만: 파우스트 박사 1

파우스트 박사 1 - 10점
토마스 만 지음, 임홍배.박병덕 옮김/민음사

1권
파우스트 박사


2권
파우스트 박사
에필로그

저자의 말
작품 해설
작가 연보

 


470 "뒤집으나 엎으나 그게 그거지! 성에라는 것을 예로 들어 보자고. 가령 녹말과 설탕과 셀룰로오스로 만든 성에가 있다고 치면 그것도 자연의 산물이야. 다만 자연의 어떤 측면을 주로 부각하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이봐, 이른바 객관적 진리라는 것을 탐구한답시고 주관적인 것, 순수한 체험을 무가치하다고 의심하는 자네 버릇이야말로 마땅히 극복해야 할 속물근성이야. 나는 자네 눈에 보이는 대로 존재한단 말일세. 내가 정말 존재하는지 따지는 게 무슨 소용이 있나? 일단 그 효과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면 곧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진리란 결국 체험과 느낌 아니야? 자네를 고무해 악마에게로 인도하는 것, 자네가 느끼는 감정의 힘과 권능과 지배력을 증가시켜서 악마에게로 인도하는 것, 그게 바로 진리야. 물론 도덕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영락없이 거짓이겠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힘을 증대시켜 주는 비(非)진리는 불모성의 어떤 도덕적 진리보다 낫다는 거야. 천재성을 발휘하게 하는 창조적인 병, 모든 장애를 당당히 뛰어넘어 대담한 도취 상태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이 병이야말로 좀스럽게 꼼지락거리는 건강보다 백 배 천 배 더 멋진 인생을 보장한다 이 말이야. 병적인 것에서는 병적인 것밖에 나올 수 없다는 말은 정말 멍청한 소리지. 삶이란 그렇게 까다로운 게 아냐. 도덕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고. 병이 선사하는 대담한 산물이야말로 인생의 흥미를 돋우는 것이지. 그런 것을 씹고 소화시켜서 자기 나름대로 섭취하면 그게 곧 건강의 비결이야. 생의 활력이라는 원칙을 기준으로 보면 병과 건강의 구별은 무의미해 건강을 앞세우는 족속들은 병든 덕분에 독 창성을 얻은 병적인 천재의 작품 앞에서 맥을 못 추지. 그런 무리들은 오히려 병적인 천재의 작품에 감탄하고, 찬양하고, 높이 받들고, 받아들이고 변화시켜서 문화유산으로 전승하지. 문화라는 것은 집에서 구운 빵만 먹고 사는 게 아니야. 그런 것 못지 않게 이를 테면 '복된 사도' 약방에서 제조한 약과 독을 먹고 살지. 나 사마엘은 자네한테 솔직히 말하고 있는 거야. 자네의 모래시계가 약속한 기한이 끝날 무렵, 권력과 영광을 얻은 자네의 감정은 어린 인어 아가씨의 고통을 점차 능가해서 마침내는 벅찬 승리의 행복감과 건강을 얻고 신의 경지에 집어들게 될 거야. 장담하지. 이것은 다만 사태의 주관적인 측면일 뿐이야. 이런 정도로는 자네가 만족하지도 않고 탐탁하게 여기지도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어. 그러면 이런 사실도 알아 두게. 즉, 우리의 도움으로 자네가 이룩할 성과는 삶의 활력을 가져온다는 것을 보증하지. 자네는 미래를 향해 개선 행진을 하는 거야. 자네의 광기 덕분에 더 이상 광기를 부릴 필요가 없어진 자들은 자네의 이름을 받들고 자네를 따르겠다고 맹세할 걸세. 그들은 건강한 상태에서 자네의 광기를 자양분으로 흡수하고, 자네는 그들을 통해 건강을 누리게 되는 거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창작을 마비시키는 이 시대의 역경을 타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 자네는 이 시대 자체, 문화의 시대, 문화를 숭배하는 시대 자체를 허물어뜨리고 야만을 감행하는 거야. 이중의 야만이지. 왜냐하면 그것은 휴머니티가 종언을 고한 후에,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근본적인 치료를 거친 후에, 시민적 세련미가 거덜난 후에 도래하는 것이니까. 내 말을 믿으라고! 야만은 예배 의식의 잔재에 지나지 않는 문화에 비하면 신학에 더 정통해 있어. 신학은 종교적인 것에서 역시 문화만을, 휴머니티만을 볼 줄 알지. 역설, 신비적 정열, 방종, 전적으로 비시민적인 모험은 간파하지 못해. 마귀인 주제에 종교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놀라지 말기 바라네. 빌어먹을! 도대체 오늘날 나 말고 또 누가 자네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 줄 수 있겠나? 그 진보적인 신학자가? 결국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어! 자네가 신학적인 실존의 고민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상대가 나 말고 또 누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내가 거들어 주지 않으면 감히 누가 신학적인 실존을 영위할 수 있겠나? 종교 문제는 시민 문화의 영역이 아니라 전적으로 내 전문 영역이야. 문화라는 것은 예배 의식이 퇴락해서 생겨난 것인데 다시 스스로 일종의 예배 의식을 만들어 낸 이래 문화라는 것은 퇴물 이상의 아무것도 아냐. 이제 겨우 500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사이에 온갖 것을 다 맛보아서 이제는 문화라는 것에 신물이 난다고."

 


474 "파멸과 보상에 관해 알고 싶은가? 그 호기심과 청년 학도다운 용기가 가상하군! 끝이 보이지 않는 엄청난 시간이 있어. 종말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전에 엄청난 일들이 속출할 걸세. 종말을 생각할 때가 닥치는 그 순간에조차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야. 그렇지만 나는 알려 주기를 주저하지도 않을 것이고, 또한 미화할 필요도 없지. 아직 요원한 먼 훗날의 일을 가지고 자네가 심각하게 걱정할 필요가 뭐 있겠어? 그런데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제대로 하기는 쉽지 않아. 본래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란 말일세. 본질적인 것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으니까. 많은 단어를 사용해 말을 만들어 낼 수는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모든 단어들을 동원해도 우회적인 설명밖에 못 해.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이름들을 대신할 뿐이지. 뭐라 규정할 수 없고 말로 전달할 수 없는 것을 뭐라고 지칭할 수는 없단 말일세. 지옥은 말로 표현될 수 없고, 존재하기는 하되 신문에 보도하듯이 알릴 수 없고, 대중에게 알릴 수 없어. 요컨대 어떤 말로도 드러낼 수 없고 따라서 비난할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지옥의 은밀한 쾌감과 확실성이지. 다만 '지하 세계', '지하실', '철옹성',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 '망각의 세계', '구제불능' 등의 빈약한 상징어로 표현될 수 있을 뿐이지. 지옥에 관한 이야기는 상징적인 표현에 만족해야 하네. 거기서는 모든 것이 중단되니까. 대상을 지시하는 단어뿐 아니라 모든 것이 중단되지. 이런 것이 지옥의 주된 특징이라 할 수 있어. 이처럼 지옥에 관한 가장 보편적인 서술이 곧 신출내기가 거기서 최초로 경험하게 될 것이기도 해 처음에는 이른바 건강한 감각으로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 그런 것이지. 이해심이 없는 편협한 이성이 자꾸만 방해를 하니까. 요컨대 아무리 애를 써도 도저히 믿을 수 없으니까 그런 것이지. '지옥에서는 모든 것이 중단된다.'라는 사실, 그 어떤 자비나 은총 혹은 보살핌도 효력을 잃는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거야. 지옥과 첫 대면을 하는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중단된다.' 라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히 드러나는데도 말이야. 지옥의 존재를 믿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인간의 영혼을 가지고 그럴 수는 없다.'라고 항변하고 싶은 마지막 의욕마저 사라져 버리지. 그렇게 될 거야. 아니, 이미 그렇게 되고 있어. 정적에 휩싸인 지하 세계에서, 하느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저 깊은 곳에서. 그것도 영원히.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도 잘못이야. 그 세계는 말이 닿지 않는 곳에서 펼쳐지고, 언어와는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지옥의 세계에 과연 어떤 시제를 적용해야 할지도 알 수 없지. 궁여지책으로 흔히 말하듯 '그곳에서는 아비규환의 소리가 들릴 것이고 온몸이 떨릴 것이다.'라고 미래 시제를 끌어 댈 수도 있겠지. 좋아. 그런 표현은 상당히 극단적인 영역의 언어에서 골라낸 말이긴 해. 그럼에도 여전히 빈약한 상징에 불과해. 설명할 수도 기억할 수도 없는 비밀의 베일에 싸여 있는 그 세계가 '아마도 도래할 것'이라는 짐작조차도 그 정도의 말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 아닌 게 아니라 쥐 죽은 듯한 정적 속에서 비명과 하소연, 사나운 포효나 신음 소리, 으르렁거리는 소리, 쉰 소리, 첫소리, 호통, 불평, 고문의 신음과 애원하는 소리 등이 귀청이 떨어질듯 크게 울리겠지. 그러니까 아무도 자기 자신의 노래 소리는 들을 수 없을 거야. 자신의 목소리는 그곳에 꽉 찬 절규와 치욕에 떠는 울부짖음 속에 파묻혀 버리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끝없이 이어지는, 누구의 소리인지도 알 수 없는 절규에 끌려가는 거야. 자꾸만 들려오는 엄청난 환락의 신음 소리는 결코 잊지 못할 거야. 왜냐하면 한없는 수난과 좌절과 무기력을 맛보는 끝없는 고통이 오히려 치욕스럽게도 만족감으로 변하기 때문이야. 이런 사정을 대충 직감으로 눈치챈 자들이 '지옥의 환락’에 관해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야. 하지만 지옥의 환락은 극단적 모멸감을 안겨주는 요소와 관련되어 있고, 고통과 결부되어 있지. 지옥의 환락을 맛보려면 견디기 힘든 수난도 하찮게 여겨야 하고, 손가락질과 야유도 감수해야 하니까 그래서 저주받은 자들은 고통뿐 아니라 비웃음과 치욕도 견뎌야 한다는 설 이 생겨난 거야 지옥이라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하는 고통과 치욕의 끔찍한 결합이라는 것이지. 저주받은 자들은 고통이 너무 커서 혀를 깨물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그에 맞서 공동체 의식을 갖는 것도 아니야. 오히려 서로 오로지 경멸하고 조소하며 떨리는 소리로 신음하면서도 온갖 더러운 욕설을 퍼붓지. 결코 상스러운 말은 입에 담지 않던 가장 고상하고 자존심 강한 자들조차도 결국은 갖은 욕설을 내뱉지 않을 수 없게 돼 더할 수 없이 추잡한 상념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 곧 그들이 겪는 고통과 치욕스러운 환락의 일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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