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타 쇼조: 천황제 국가의 지배원리

 

천황제 국가의 지배원리 - 10점
후지타 쇼조 지음, 김석근 옮김/논형

한국어판 서문(아이다 다이조)

천황제란 무엇인가
천황제 국가의 지배원리
천황제와 파시즘
천황제의 파시즘화와 그 논리구조
'료안'의 사회적 구조_'쇼와 원년'의 신문에서

부록
후기
해제(미야무라 하루오)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천황제란 무엇인가

천황제는, 그 말의 쓰임새부터가 복잡, 다기하다. 게다가 그 용어의 다의성 자체가 천황제의 현저한 특질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복잡함은 한층 더 배가 된다. 천황제는 어떤 경우에는① 단순히 군주로서의 천황이 존재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만 ② 보다 엄밀하게는 근대 일본의 정치 구조, 체제regime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 용어가 쓰이게 된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지배 '구조'에 착안하여 천황에게 모든 정치권력이 집중되고 천황에 직속된 문무관료가 권력 행사를 장악하는 지배체제를 가리키며, 따라서 의회에 대한 천황제 관료의 독자성을 천황제의 가장 큰 특색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으며, 정치적 '기능'에 주목하여 천황제 체제에 내재하는 제 원리가 어떠한 통로에 의해서 사회적 저변과 지배자 사이를 왕복하는지를 고찰하는 경우도 있다. ③ 또한 말의 '일종의' 비유적 적용으로서, 특정한 사회적 현상이 천황제 지배양식이 갖는 어떤 특징적 성격을 갖추는 경우, 그 특징에 비추어 그 현상은 '천황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이에家의 천황제, 거리의 천황제 등으로 전자는 천황제의 전제적 특징에, 후자는 종종 천황제 지배의 정서적인emotional 측면에 조응하여 그렇게 말한다). 크게 나누어 이들 세가지 정의는, 어느 것 이나 근대 일본의 지배체제인 천황제가 갖는 특질에서 생겨난 것이므로, 이들 셋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것을 풀고, 또 천황제의 전체적인 이해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한편으로 절대주의 천황제 성립의 역사적 특질을, 다른 한편으로 천황제 체제에서의 지배양식의 특수성을 찾아내야 한다.


태평양전쟁 이전의 일본에서 천황제에 대한 이론적 분석은, 천황제의 폭력적인 억압에 의해 저지되어, 겨우 1922년 일본공산당이 비합법으로 성립한 이래 '천황제 폐지'라는 슬로건 아래 주로 그것의 계급적 성격과 역사적 본질에 관한 이론 규정을 행했으며, 그 후 이른바 '32년 테제'가 일본의 권력체계의 구성요소로 천황제, 지주적 토지소유, 독점자본주의라는 세가지를 지적하고, "천황제는, 한편으로는 주로 지주인 기생적, 봉건적 계급에 의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급속하게 부유해지고 있는 탐욕스러운 부르주아에 의거하여, 그들 계급의 상부와 대단히 긴밀한 영속적 블록으로 두 계급의 이익을 대표하면서, 동시에 그 독자적인, 상대적으로 거대한 역할을······ 그 절대적 성질을 유지하고 있다"는 분석을 덧붙임으로써, 천황제의 계급적 의의와 역사적 본질에 관한 한 명료한 평가가 이루어졌다. 이후 이른바 일본자본주의 논쟁을 통해 반봉건적인 농업관계, 노동관계의 유무가 쟁점을 이루었으며, 의회와 지배 '제' 계급에 대한 거대한 독자성을 갖는 천황제의 물질적 기초와 사회적 기초가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거의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한편으로 1922년, 28년 (3월 15일), 29년 (4월 16일)으로 이어지는 혁명세력에 대한 광포한 탄압은, 천황제에 대한 인식에서 폭력성을 지나치게 과민하게 받아들이는 증세를 낳았으며, 따라서 관료, 군대, 경찰로 구성되는 천황제 폭력장치의 '기구' 분석에 상대적으로 과중한 역점을 두는 결과를 낳았다. 그 위에 일반적으로 노농파労農派로 불리는 마르크스주의자 그룹이 일본사회의 반봉건적 제 관계를 부인하고, 따라서 또 천황제의 지배 제 계급에 대한 절대주의적 독자성을 어디까지나 긍정하지 않았던 까닭에, 천황제에 관한 논점은 논쟁 과정을 통해서 그 사회경제적 기초와 그 상부구조로서의 기구라는 두 가지로 한정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다른 한편으로, 반체제운동의 민중에 대한 침투가 비교적 정체됨에 따라 실천적 정치기술의 진보가 늦어져, 이른바 '대중공작大衆工作'의 수단과 방법이 문제화되지 않았으며, 천황제가 국민의 행동양식, 생활내용, 사유형식을 어떻게 포착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요구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앞에서 언급한 테제의 말을 빌리자면 천황제의 '유연성'의 의미와 내용은 전쟁 이전의 천황제론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 이후, 정치적 상황의 격변, 대중운동의 비약적인 발전, 게다가 천황제 지배체제의 새로운 강화, 매판 부르주아화의 진행 등이, 실천적으로는 통일전선 결성에 이르는 유효한 방법과 수단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으며, 그로 인해서 또한 이론적으로도 천황제의 정치적 사회적 기능에 대한 분석이 요청되기에 이르렀으며, 널리 모든 분야의 사회과학자들에 의해서, 그 연구가 진척되었다. 그리하여 천황제는 비로소 전체적인 측면에 대한 해명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성립과 그 특질

근대 일본의 국가권력의 중핵을 이루며, 지배체제 그 자체였던 천황제는, 종종 서유럽 데모크라시와 비교해서 논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본래 봉건 사회의 위기에 즈음하여 그 극복을 과제로 삼아 태어난 절대주의에 한해서는, 그 특질을 유럽 절대왕정과의 대비 위에서 검토하는 것이 타당하다. 천황제는 기본적인 점에서 서유럽의 고전적 절대주의와 두가지 대비를 통해 성립되었다.
첫째는, 근세 유럽의 절대왕정이 교황-교회와의 격렬한 투쟁을 거쳐 종교적 '권위'로부터 왕의 정치적 '권력'이 분리 독립함으로써 성립되었으며, 따라서 거기에 독자적인 의미의 '정치'를 낳게 된 것과는 정반대로, 천황제는 종래 자신이 가지고 있던 권위를 이용함으로써만, 이른바 '권위적 권력으로서만 성립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최대의 봉건영주가 다른 대부분의 영주들을 압도하고 정복하여, 민족적 규모로 그 지배영역을 확대함으로써 왕권을 대내적으로 확립해간 고전적인 절대주의absolutism와는달리, 일본의 천황제는 봉건적 권위인 천황이 자신과는 관련 없는 정치적 제 요소의 상황변화에 따라, 권력의 주체로 전화轉化된 것이므로, 정치적 투쟁을 거쳐 도태된 본래의 절대주의 군주의 정치력을 끝내 갖출 수 없었다. 금문禁門의 변変(1864)의 대포소리에 기절하고만 무쓰히토睦仁, 메이지천황에 대해, 메이지유신 전년의 격투는 군주 측근의 신하로 하여금, "허약하고 어린 주상께서 갑자기 놀라 쓰러지는 것도 당연"하다고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정치권력의 질적인 독립을 스스로 이룰 수 없었던 절대주의는, 어떤 정치적 시야에 관해서는 그야말로 고대, 중세와 '일계一系'다. 중세 기독교 세계의 전체 인민에 대해서 종교적, 정치적 최고 권위로 깊이 침투했으며, 기르케O.Gierke가 중세 사회의 작동원리motive principle라 불렀던 '우주의 군주', 현세의 신의 대변자였던 교황과 아주 대척적으로, 봉건시대의 천황은 쇼군将軍에 의해 권위지워졌으며 쇼군의 필요에 따라 수시로 그 제한을 받는 '소극적 권위'였다. 그러나 막부 말기 봉건제의 위기가, 제국주의로 이행하는 단계에 있던 세계사에 뒤처지고, 따라서 국내와 국제 양면의 긴박한 상황의 결절結節로 나타난 까닭에 막부는 대외적 위기의 책임을 대내적으로 짊어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체제의 위기가 배가되어 마침내 스스로 절대군주로 올라서는 길을 놓쳐버렸다. 봉건적 권위가, 수동적으로 명목상의 것이긴 하지만 권력주체로 대체된 근거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게다가 천황은 일찍이 고대에서 권위와 권력을 모두 갖춘 전제군주despot였던 과거를 가지며, 또한 그 지위가 다름 아닌 막부에 의해 박탈당했다는 역사적 사정은, 천황의 변신을 가능하게 해주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첫 머리 정의에서 제일 먼저 든 군주로서의 천황이 존재하는 의미에서는, 천황제는'일계一系'이며, 그것은 천황제의 형성, 확립의 전 과정에서 일관되게 최대한 이용되었다. 메이지유신 당초 "여기 일본이라는 나라에는, 아마테라스 고타이진구사마天照皇太神宮様로부터 이어져 온 천자님天子様이 계시는데, 그 분은 예로부터 조금도 변한 적이 없는 일본국의 주인님이시다", "그런데 7, 800년 전부터 난세亂世가 계속되어, 세상에서는 다양하게 호조(北条)니 아시카가(足利)니 하는 자들이 나타나, 마침내 천자님이 지배하시던 곳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렸다"고 주장한 논서는, 그 후 모든 때와 장소에서, 나아가 교과서에서 재생산되어, 아마테라스 오미카마와 천황은 근대에서 '비로소' 권위로 확립되었다. 그리하여 절대주의 천황제는, 특수한 '비非'인격적 군주의 전제체제(비인격적 - 인격지배)로 성립했으며, 막부에 반대하는여러 번反幕諸藩의 하급무사들에 의해 구성된 관료들이 모든 권력 행사를 장악하여, 천황은 '어명御名', '어새御璽'라는 점에서 자신의 정치적 사명을 갖는다. 제국의회 개설과 교육칙어 발포시기에 이 체제는 거의 완성되었다.


이후 천황제는 대략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특징으로 일본을 지배한다.
① 전제군주제가 군주전제는 아니라는 것을 하나의 이유로 들어, 객관적 제 정세에 대한 극단적 순응에 의해서 지배형태의 분식을 점차 거듭하게 된다. 자유민권의 거센 바람에 조우해서는 입헌주의의 외관Schein을 치장하고서, 제국주의 제 열강에 들어서려고 할 때에는 법치국가의 외모를 정비하였으며, 하부구조에서조차 반농노제 위에 용립하는 자본주의를 최고도로까지 육성하게 된다. 천황제 파시즘도 그래서 가능해졌다. ② 그러나 동시에 정치적으로 무력한 '인간천황'인 까닭에, 일찍이 전통적 지배를 본질로 삼으면서 근대국가로서 근대적 테크놀로지를 최대한으로 사용해야 하는 까닭에, 실질적으로 권력행사를 담당하는 관료 내부에도, 무엇보다 봉건적인 천황 측근파와 관료들 사이에도, '천황친정天皇親政' 과 '부국강병'이라는 모순의 표현인 항쟁이 끊이지 않는다. 게다가 '천황친정'이라는 슬로건 자체가 표면상의 원칙과 실체 사이에 격심한 괴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혁명운동을 제외한 모든 정치적 항쟁은 언제나 적대자에 대해서는 '반국체反國體'라는 심한 매도를, 자신애 대해서는 '천황친정'이라는 미화로 전개됨에 따라 지배기구를 관통하는 파벌성은 한층 더 배가된다. 본래, 대외적 대내적 위기에 대 처하기 위해 요청되고, 성립된 절대주의적 집권이, 거꾸로 권력 작용의 효율적 집중을 방해했다는 역설적인 기현상이 천황제를 관통하게 된다. 



이데올로기 기능
천황제가 체계적인 자체 이론을 가지고 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권력의 정통성을 기초하는 이데올로기는 국가구조의 사상적 측면으로서 그 의미에서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 '가족국가관'이라 불리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은 국가를 '가족(家)'의 연장과 확대로 이해하려는 것이므로, 천황은 가부장이며, '신민臣民'은 천황의 '적자赤子'가 된다. 말할 것도 없이 이 국가관은 일본사회의 가부장제적인 구성에 바탕을 두고, 게다가 개개의 봉건적인 가부장제적 세계를 국가적 규모로 통합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충효일치忠孝一致'가 주장되었으며, 그 위에서 '조국애'는 '충군애국’忠君愛國'으로 변형된다. 이러한 가족국가관이 천황제 통치구조의 이데올로기적 측면으로 형성된 것은, 천황제가 자기 권력을 확립하고, 게다가 동시에 사회주의 세력의 대두로 인해 기초가 흔들리기 시작한 메이지 30, 40년대였다. 반동화한 서유럽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인 사회유기체설과 전통적인 유교정치론이 사상의 두 계기였다. 이 두 계기가 모순하면서 결합한 데서 가족국가관이 성립한 것인데, 동시에 그 모순은 이후 국가적 요청이 '가족'을 압도해감에 따라 확대재생산되는 과정에서 격화되었다. 천황제가 전쟁을 바라는 하나의 이유는 여기 있었다. '이에家, 가족'와 '국가'를 잇는 유대가 이완의 일정한 정도에 이를 때마다, 떨어져 나가려는 '이에'를 대외전쟁을 조성함으로써 국가에 강력하게 얽어맸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 내셔널리즘의 끊임없는 극단화ultra를 초래함과 동시에 그러한 위기 타개책을 방해하는 세력에게는 비할 데 없이 가혹한 억압을 가했던 것이다. 근대 일본은 거의 3년의 간격도 두지 않는 전쟁과 탄압에 파묻혀 있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가족에 대한 세상의 모습世間態과 부양이라는 임무를 개인에게 부과하면서도 유일한 화합의 기회로 잔존하는 한, 세상의 모습을 살피지 않고, 부양 '채무'(베네딕트 R. Benedict)를 내던지고 또한 유일한 단란함조차 단념한 채 정치에 분주한 자는 입신출세하여 금의환향하지 않는 한 불효자로 지탄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로 인해 관료 코스 외의 정치참여는 민중에게 거부당한다. 게다가 가족주의가 무엇보다 정통적인 집단이론이고 국가까지도 가족에 유비analogy되는 것이므로, 가에 정치가 거부되듯이 국가로부터도 역시 정치는 배제된다. 천황은 일계一系의 권위이고 천황제는 자연의 질서이다. 그런 까닭에 체제 변혁을 도모하는 자는 자연의 파괴자이며, 따라서 화형에 처할 만하다. 혁명 세력에 대해 천황제가 행사한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폭력과 압제는 거기에서 바탕을 두고 있다. 비정치성으로 가와 국가는 이어지지만, 같은 국민의 '비정치화'에 의해 체제의 묵인은 보호를 받는다. '가족이 서로 화합하는' 미풍양속이 그 비정치성의 내용이어서, 이로써 상하대립과 마찰이 중화되고 천황은 일본 근대사회에 편재하는 중화의 상징이라는 기능을 하게 된다. 첫 머리의 정의 ③이 그렇게 생겨났으며, 천황제는 이러한 중화의 체현자인 크고 작은 무수한 '천황'을 정치사회적 기초로 삼는다. 그러나 앞서 말한 '충군애국' 내셔널리즘의 끊임없는 극단화가 국체의 본의'를 강요하고 마침내 중화의 공기를 스스로 깨뜨리게 되어 가족국가는 붕괴하게 된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현저하게 나타난 '국민생활의 비국가적인 영위' 또는 '전쟁수행에 대한 무관심한 심정'은 국민이 국가의 요구를 벗어나 '가정생활에 틀어 박히는' 것의 표현이었다.

 


2차 대전 이후의 천황제
총력전을 강제가 '이에'와 국가의 연쇄를 차단시켰을 때, 가와 향토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던 천황제에 대한 헌신은, 당연히 본래의 향토로 돌아오게 된다. 천황제는 태평양 전쟁의 패배로 인해 가족국가의 통합성integrity을 잃어버리고 분산했지만, 미 점령군은 한편으로는 일본의 피지배층 속에 뿌리 깊게 존재하는 천황제 의식을 고려하여 점령정책에 대한 격렬한 반응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간접통치의 담당자Träger로서 천황제 관료를 더 잘 조종하기 위하여 천황을 온존시키는 방침을 견지하고, 신적인 권위를 잃어버린 '인간 천황'은 헌법에 의해 일본 국민의 '상징'이라는 지위를 보장받았다. 그러나 원래 군주전제가 아닌 관료전제를 중핵으로 삼고 있던 천황제는, 관료의 온존과 증식이 있는 한, 천황의 지위변화에 의해 혁명적 변화를 겪지 않았으며 지배의 실질적 기구에서는 여전히 전쟁 이전과 강한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일단 '무관심의 심정'에 틀어박혀 패전 이후의 '원축적原蓄的' 인플레이션이라는 회오리 속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개인생활의 방위를 경험한 국민을 적극적으로 통합하는 일은 쉽지 않고, 국민생활을 관통하는 '천황제'는 국민 각각의 생활 영역으로 분극화되어, 개인과 그 생활 집단의 '평온한' 일상을 보장하는 점에서 주요한 기능을 찾아내고 있다. 따라서 미국주의Americanism의 유행은 그것이 일상생활의 회전을 쉽게 하고 생활의 편의화를 가져다주는 한, 평온한 생활의 한 방식으로 환영받아 거리나 마을에서의 '천황제'와 일상생활에서의 미국주의가 서로를 보강하면서 사회 깊은 곳에서 결합하고 있다.


이들 양자의 결절점은 전전과 다를 바 없이 무수한 소생활집단의 장, 다시 말해서 이른바 '중간층 제1유형'이다. 매판 천황제의 기반은 여기에 정착한다. 그리고 마치 그것에 어울리기라도 하듯이, 상부 천황의 부활은 '생물학자' 천황의 순행巡幸과 전쟁임에 대해 개인으로서는 무관한 황태자의 세계 ‘유람漫遊'를 대대적으로 선전함으로써, '스타'적 명성을 국민들 사이에 환기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하여 천황제는 이전과 달리 현재로서는 정치적 권위나 정치적 요청을 국민에게 심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비정치적 명성을 넓히는 데 모든 노력을 집중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도를 저지하고, 또 분쇄하는 것은 국민의 자발적 결사의 양적, 질적 확대와 심화이다. 이로써만 국민을 직접적 생활에 가두는 정책을 파탄함으로써 천황제 부활의 현재 방식에 내재하고 있는 미국주의와 내셔널리즘의 포합이라는 모순을 격발시켜, 그 부활의 길을 완전히 차단시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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