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에 맞서며 - 메리 비어드 지음, 강혜정 옮김/글항아리 |
들어가며
서론_고전학에 미래가 있는가?
1부 고대 그리스
1. 유적의 건설자
2. 사포의 목소리
3. 어느 투키디데스를 믿을 것인가?
4. 알렉산드로스 대왕, 얼마나 위대한가?
5. 그리스인은 어떤 때에 웃었을까?
2부 초기 로마의 영웅과 악당들
6. 누가 레무스의 죽음을 원했나?
7. 궁지에 몰린 한니발
8. 도대체 언제까지……?
9. 로마의 미술품 도둑들
10. 카이사르 암살에 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
3부 로마 제국: 황제, 황후, 적들
11. 황제를 찾아서
12. 클레오파트라: 신화
13. 황제에게 시집가다
14. 칼리굴라의 풍자?
15. 네로의 콜로세움?
16. 브리타니아의 여왕
17. 단역 황제들
18. 하드리아누스와 티볼리 별장
4부 밑에서 본 로마
19. 해방노예와 속물근성
20. 점, 입 냄새, 스트레스
21. 군대의 수도 로마 진입 금지
22. 로마 지배하의 브리타니아에서의 삶과 죽음
23. 사우스실즈의 아람어
5부 예술과 문화: 관광객과 학자들
24. 아이스킬로스밖에 없다?
25. 팔과 남자
26. 피스 헬멧을 반드시 챙기시오
27. 관광지로서의 폼페이
28. 황금가지
29. 철학이 고고학을 만나다
30. 누락하고 빠뜨린 것들
31. 아스테릭스와 로마인
후기_고전학 서평 쓰기
참고 자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참고문헌
찾아보기
4. 알렉산드로스 대왕, 얼마나 위대한가?
109 알렉산드로스를 둘러싼 논쟁은 수백 년에 걸쳐 계속되고 있다. 당연히 새로운 주제들이 등장했다 사라지곤 한다. 최근에는 알렉산드로스가 '그리스인인가?'를 둘러싸고 팽팽한 긴장감이 도는 정치적 논란이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정말로 '구 유고슬라비아 마케도니아공화국FYROM'이 주장하는 것처럼 슬라브인일까? (그리하여 FYROM을 대표할 적절한 상징이며, 이곳의 수도 스코페 공항에 적합한 이름일까?) 아니면 진짜 그리스인일까? (그리하여 FYROM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일까?)
이런 논쟁이 성과를 보기 힘들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고대의 민족 정체성은 여간 파악하기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110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면 알렉산드로스를 둘러싼 논쟁과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과거 2000년 동안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작가, 영화 제작자, 예술가, 정치가들이 맞닥뜨리는 가장 근본적인 딜레마는 알렉산드로스를 계속 찬양할지, 비난해야 할지에 관한 것이다. 많은 이에게 알렉산드로스는 '위대한 장군'이라는 긍정의 본보기로 남아 있다. 고국에서 점점 멀어지는 타지에서 영웅적으로 자기 군대를 이끌어 승리를 쟁취한 위대한 지휘관이라는 이미지로. 알렉산드로스 찬양자로 유명한 인물이 바로 나폴레옹이다.
111 프리드먼과 달리 알렉산드로스 찬양을 어렵잖게 자제하는 이들도 있다. 단테는 폭력 행사의 죄를 범한 이들이 가는 제7지옥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자리를 찾았다.
114 "그는 생애의 많은 시간을 직접 살인하거나 살인을 지시하면서 보냈다. 확실히 살인이야말로 그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나도 비슷한 의미지만 그보다 경망한 어조로 알렉산드로스를 묘사한 적이 있다. "현대 어느 국가에서도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로 택하기 힘들다고 생각되는 주정뱅이에 미성숙한 폭력배."
114 이미 카이사르 시대에 일부 로마인은 알렉산드로스를 스케일 있게 노는 해적과 다름없다고 묘사하지 않았던가.
117 거기서 데이비드슨은 서사학부터 성연구까지 고전학의 거의 모든 분야가 20세기 후반 반세기의 새로운 이론적 발전을 받아들이고 활용해온 반면, "알렉산드로스 나라의 학문만은 1945년 이래 역사학과 고전학을 완전히 바꿔놓은 각종 변화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125 그러나 이들이 로마인이라는 사실이 이야기를 이해하고 걸러내는 일종의 '필터'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들 로마 작가는 스스로가 살고 있는 시 대의 특징인 정복과 제국 팽창이라는 관점에서 기존 기록들을 해석하고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7. 궁지에 몰린 한니발
174 『로마사』는 20세기 거의 내내 학문의 변방으로 밀려나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고대 로마인의 용맹함을 보여주는 놀라운 이야기들 덕분에 19세기에는 대중의 사랑을 받았지만 지금은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타키투스 등과 달리 일반 대중에게는 거의 읽히지 않는 책이 되었다.
175 정통적 관점에서 볼 때 리비우스는 고대 기준으로든 현대 기준으로든 아주 형편없는 역사가였다. 리비우스는 매우 기본적인 조사도 하지 않고 전해오는 과거 이야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역사가였다. 물론 고대에는 이런 모습이 굉장히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순 없다. 그렇지만 리비우스는 대다수의 고대 역사가보다 그 정도가 더 심했다. 리비우스는 입수한 정보를 스스로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거나 일관성 있는 단일한 서사 구조로 집약시키지 못할 때도 많았다. 리비우스가 같은 사건을 두 번 서술한 악명 높은 사례들이 있는데, 다른 두 자료에서 살짝 달리 서술된 내용을 보고 같은 사건임을 모른 채 빚어진 실수가 아닌가 싶다.
180 레빈의 설명대로 리비우스가 과도한 합리화에 치우친 선배들에 비해 오히려 균형 잡힌 시각을 지녔고, 역사적 인과관계에 대해서도 남다른 통찰력이 돋보이는 날카로운 주장들을 제기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방패'라는 그리스어를 분명하게 알지 못했던 로마 역사가에게서 과연 얼마나 똑똑한 폴리비오스 독해를 기대할 수 있을까?
11. 황제를 찾아서
243 기원전 44년에서 기원전 31년, 내전이 한창일 때 무시무시한 폭력도 서슴지 않았던 거친 군사 지도자로부터 서기 14 년 침상에서 편안한 죽음을 맞았던 노년의 덕망 있는 정치가로의 변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의 죽음에 관해 아내 리비아에 의한 독살이라는 음모설도 있긴 하다) 소문에 따르면 맨손으로 사람의 눈을 잡아 뜯었다는 혈기왕성한 폭력배에서 로마인의 도덕심을 진작시키고, 출산율을 높이고, 종교 전통을 되살리고, (스스로의 말마따나) 수도 로마를 "벽돌 도시에서 대리석 도시"로 바꾸는 데 정성을 쏟는 한편, 과거의 정치체제를 성공적으로 재포장해 자신이 칭호만 아닐 뿐 사실상 모든 면에서 왕의 자리에 앉게 만드는 빈틈없는 입법자로의 환골탈태를 과연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해야 할까?
262 심지어 100년 후라는 타키투스의 위치에서 보면, 아우구스투스의 통치는 1인 지배라는 새로운 전통의 신화적인 기원이자 뒤 이은 후계자에 의해 재창조되고 다시 채워져야 하는 공간으로서 더욱 의미 있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뒤 이은 후계자들이 하나같이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쓴 사실 역시 의미심장하다. 어떤 의미에서 수백 년에 걸쳐 등장한 황제들이 저마다 새롭게 아우구스투스가 되는 과정을 반복했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18. 하드리아누스와 티볼리 별장
379 그렇다면 왜 네로는 쿠데타로 제위를 빼앗기고 역사에서 악마로 묘사되었던 반면, 하드리아누스는 목적과 동기에 대한 골치 아픈 물음표 외에는 이렇다 할 비난이나 혹평 없이 자기 침대에서 편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었을까? 당연히 하드리아누스가 황제의 '이미지 메이킹'이라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네로보다 교묘하게 해낸 것도 한 가지 이유다. 네로의 황금궁전은 도시 로마의 중심지를 사유화했기 때문에 시민들의 원성을 샀다. 반면에 하드리아누스의 별장은 규모는 훨씬 더 컸지만 (충분히 신중을 기해서) 수도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던진 질문 자체가 부분적인 해답을 제공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로마 지배자는 그들이 실제 악마이거나 악마화되었기 때문에 타도 대상으로 몰려 제위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 제위를 빼앗겼기 때문에 악마화되었다.
23. 사우스실즈의 아람어
467 가령 카이사르는 갈리아에서 "라틴어를 어느 정도 배운 현지인들을" 썼고, 갈리아인 족장에게 침략군과 토착 주민 사이의 대화를 통역하도록 시킨 적도 있다. 로마 군대에서 복무하는 것으로 기록된 통역사들이 있긴 하나 이들 가운데 누구도 애초에 라틴어 사용자였다는 확정적인 증거는 없다. 요컨대 애덤스가 요약해 제시하는 것처럼 "라틴어를 배울 의무는 현지인의 몫이었고 (···) 지배자들은 현지어를 마치 존재하는 않는 양 취급했다." 이런 주장이 서방에서 로마의 지배와 관련하여 제시하는 그림은 상당히 난해하다. 이런 관점의 함의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자면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결정적인 접촉에서도 위험천만하게 피지배자의 통역 능력에만 의존하는, 언어적으로 무력하고 취약한 점령 세력이라는 로마인들의 모습이다. 사실이라면 이는 영국 제국이 택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제국 지배의 언어적인 모델이다. 예를 들면 레너드 울프는 1904 년 스리랑카의 행정관으로 부임하기 전에 이미 타밀어를 능숙하게 구사했고, 몇몇 동양 언어를 추가로 익힐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당시 영국에서 이는 특별한 사례가 아니었다.
29. 철학이 고고학을 만나다
567 흔히 그렇듯이 고전학 관점에서 접근하면 상황이 다르게 보인다. 콜링우드 스스로는 자신이 받은 공식 교육의 영향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오히려 그는 멀리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교육학의 역사 전체를 공격하는 데 더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알고 보면 콜링우드가 예전 옥스퍼드 'Greats', 즉 고전학 과정의 결과물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옥스퍼드 'Greats'는 학부 학생들이 후반 2년 반 동안 한편으로 고대사, 다른 한편으로 고대 및 현대 철학을 병행하게 되어 있었다. 양쪽을 똑같이 잘하기보다는 어느 한쪽을 훨씬 잘하면서 나머지를 어떻게든 소화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게 일반적인 풍경이었다. 다수의 고대사학자 지망생은 최종 학위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하기에 충분한 철학 실력을 쌓기 위해, 즉 플라톤, 데카르트, 흄에 관한 내용을 어떻게든 머리에 쑤셔넣으려고 필사적이었다(반대로 철학자 지망생들은 최종 시험을 무사히 통과할 정도의 고대사 실력을 쌓기 위해, 즉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나 영국에서 치러진 아그리콜라의 전투 등을 어떻게든 기억하려고 필사적이었다). 콜링우드는 양립하기 힘들어 보이는 두 분야에 동시에 관심을 가진 '이단아'가 아니라 이는 옥스퍼드 'Greats'라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것이었다. 옥스퍼드 'Greats' 과정의 교육 목표를 감안하면 콜링우드는 드문 성공 사례였다(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별난 학생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어쨌든 콜링우드의 양쪽 분야에 대한 복합적인 관심은 옥스퍼드 'Greats'가 고취하고자 했던 목표와 정확히 일치한다.
달리 말하면 콜링우드는 단순히 (잉글리스와 다른 이들이 은연중에 암시하는 것처럼) 고고학 취미를 가진 철학자가 아니었다. 콜링우드를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독특한 옥스퍼드식 고전학이 만들어낸 보기 드문 성공 사례로 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다(Greats는 수십 년 전에 개혁 과정을 거쳤다). 일단의 학생과 함께했던 그의 마지막 항해가 그리스로의 여행이었고, 그가 관광객이라기보다는 순례자로 델포이에 갔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2500년 전에 갔던 그곳으로. 콜링우드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소크라테스를 예언자로 여기는 사람에게 델포이로의 여행은 메카 순례나 다름없다." 이는 옥스퍼드 고전학 전공자의 신조다.
후기_고전학 서평 쓰기
612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튼 특정 책에 대해 무슨 말을 할지 뻔히 예상되는 그런 사람에게는 그 책의 서평을 절대 맡기지 않는다는 게 내 기본 원칙이다. 비평가가 저자를 아는 경우에는, 비평가가 그런 관계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평가를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만 서평을 맡긴다.
613 그렇다면 서평의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소설 같은 허구를 다룬 서적과 그렇지 않은 서적 사이에 서평의 목적에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전학 영역에서 서평은 기본적인 품질 관리 수단으로서 해야 할 중요한 책무가 있다(사실 완벽하진 않지만 우리가 가진 최선의 품질 관리 수단이라고 본다). 라틴어가 온통 틀렸다면, 혹은 신화나 연대가 온통 뒤죽박죽이라면, 누군가는 지적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책이 나오고 5년 뒤 학술지에 실리는 학술 논평만이 아니라 좀더 대중적인 수단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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