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카시러: 상징형식의 철학 제3권: 인식의 현상학

 

상징형식의 철학 제3권: 인식의 현상학 - 10점
에른스트 카시러 지음, 박찬국 옮김/아카넷

서문
서론

제1부 표정기능과 표정세계
 제1장 주관적 분석과 객관적 분석
 제2장 지각의식의 기본계기로서의 표정(Ausdruck)현상
 제3장 표정기능과 심신(心身)문제

제2부 재현의 문제와 직관적 세계의 구조
 제1장 재현(Repr?sentation)의 개념과 문제
 제2장 사물과 속성
 제3장 공간
 제4장 시간직관
 제5장 상징의 수태(受胎)
 제6장 상징형식의 병리학에 대해서

제3부 의미기능과 과학적 인식의 구조
 제1장 개념의 이론에 대해서
 제2장 개념과 대상
 제3장 언어와 과학―사물의 기호와 질서의 기호
 제4장 수학의 대상
 제5장 자연과학적 인식의 기초

역자 해제

 


제4장 시간직관

318 시간이란 문제를 이러한 방식으로 제기하면서도 물론 칸트는 현상과 그것의 단순한 형식과 관련해서 작동하는 지성의 이러한 도식기능이 "인간 영혼의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기법"이며 "우리가 언젠가 자연으로부터 이러한 기법의 참된 조작법을 읽어내어 그것을 분명하게 보게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덧붙이고 있다. 사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형이상학의 측면으로부터 접근하든 혹은 심리학이나 인식이론의 측면으로부터 접근하든 곧 넘어설 수 없는 '개념파악의 한계' 앞에 직면해 있는 것 같다. 직접적인 의식에게는 가장 확실하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인 시간도 우리가 시간의 이러한 직접성을 넘어서 그것을 반성적인 고찰의 권역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자마자 어둠에 싸이게 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은 여전히 타당성을 잃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시간을 정의하려는 어떠한 시도나 시간의 특성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려고 할 뿐인 시도조차도 즉시 우리를 해소하기 어려운 이율배반에 빠뜨리고 만다. 물론 이러한 이율배반과 아포리아의 공통된 근거 중 하나는 형이상학도 인식비판도 칸트가 '형상'과 '도식'을 구별할 때 밝히고 언명하고 있는 저 엄격한 경계를 지키지 않았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형이상학도 인식비판도 감각적 형상을 '순수한 상상력의 모노그램'에 관련짓는 것 대신에 오히려 이 순수한 상상력을 순전히 감각적인 규정들에 의해서 해명하고 '설명하려고 하는 유혹에 항상 굴복하고 만다. 이러한 유혹은 정신의 어떤 적극적인 근본능력, 즉 언어능력에 의해서 항상 거듭해서 갱신되고 육성되기 때문에 그만큼 더욱 강하고 위협적이다. 언어는 시간적인 규정들과 시간적인 관계들을 표현하려고 하면 우선은 예외 없이 공간의 매개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언어가 공간세계와 이렇게 얽혀 있기 때문에 공간 '속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물의 세계와 언어의 유대가 동시에 생기게 된다. 따라서 시간의 '형식'이 언어로 표현되는 것은, 공간적 규정들과 대상적 규정들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의거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이와 같이 공간에 의거하려고 하는 강박은 너무나 강해서 언어의 권역을 넘어서 정밀과학의 개념형성에까지도 미치고 있다. 즉 정밀과학에서조차도 시간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기술하려고 한다면 우선은 시간의 본질을 공간적 형상에 의해서 표현하고 분명히 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정밀과학에서는 무한한 직선이라는 형상이야말로 '시간의 외적 · 형상적 표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것이든 그러한 도형적 기호에 의해서 시간의 참된 형태가 파악되는가? 아니면 오히려 그러한 것에 의해서 종을 달리하는 본질적으로 이질적인 어떤 계기를 시간에 부당하게 귀속시키는 것 아닌가? 언어에 의한 모든 규정은 동시에 필연적으로 언어에 의해서 고정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한 고정화를 단순히 시도하는 것만으도 이미 시간에게서 순수한 생성이라는 그것의 참된 본래적인 의미를 박탈하고 마는 것 아닌가? 이 점에서는 언어보다도 신화가 시간의 참된 의미에 더 깊이 진입해 있는 것 같다. 신화는 시간의 근원적 형식 속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신화는 세계를 고정된 존재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는 생기로서 파악하고 있으며, 완료된 형태로서가 아니라 항상 갱신되는 변용(Metamorphose)으로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화는 자신의 이러한 근본견해로부터 이미 전적으로 보편적인 시간직관으로까지 자신을 고양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신화에서는 생성하고 있는 것과 생성된 것에 대한 직관이 생성작용 자체에 대한 직관과 구별되고 있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것과 특수한 것 모두는 보편적이며 범할 수 없는 운명의 힘이라는 생성작용의 지배 아래에 있다. 개체들 각각에게 존재와 생명을 부여하는 것은 이러한 운명의 힘이다. 신들조차도 시간과 운명의 지배자가 아니며 시간과 운명의 근본법칙인 모이라의 법칙에 복속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화에서 시간은―그것이 순수하게 이론적인 의미에서 사건의 우주적 질서라고 생각되기 훨씬 이전에―운명으로서 체험된다. 시간은 '이전'과 '이후'라는 질서를 위한 한남 관념적인 망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 자체가 망을 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화에서는 이미 시간에게 어떤 보편성이 주어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자신의 충만한 생동성과 구체성을 보존하고 있다. 즉 지상의 것이든 천상의 것이든 인간이든 신이든 모든 존재가 근원적인 현실로서의 시간 속에 포함되어 있고 구속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원에 대한 물음이 더 이상 신화로부터가 아니라 철학, 즉 이론적 반성으로부터 제기되자마자 어떤 새로운 관계의 조짐이 나타나게 된다. 시원이라는 신화적 개념은 이제 원리라는 개념으로 변화된다. 이러한 원리조차도 우선은 원리의 순수하게 개념적인 규정 속으로 구체적인 시간직관이 들어가 있는 방식으로 파악된다. 철학적 사유에서는 존재의 항상적인 '근거'로서 나타나는 것도 동시에, 우리가 생성의 계열을 소급해 올라가면 만날 수밖에 없는 최초의 원초적인 존재형태로서 간주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유의 물음이 더 이상 오로지 사물들의 근거에 향하지 않고 사유 그 자신의 존재근거와 권리근거로 향해지게 되면, 동기들의 그러한 착종도 곧 해소되고 만다. 철학이 처음으로 이러한 물음을 제기하는 곳에서는, 즉 철학이 현실의 근거가 아니라 진리의 의미와 근거를 묻는 곳에서는, 이와 함께 존재와 시간 사이의 모든 결속이 단번에 끊어지게 되는 것 같다. 이제 참된 존재가 무시간적인 존재로서 발견된다. 이 이후,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낱 명칭, 즉 언어와 인간의 '사념'이 짜낸 직물 이상의 것이 아닌 것이다. 존재 자체는 이전도 이후도 알지 못한다. 즉 "존재는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앞으로 있게 될 것도 아니며 단적으로 있는 것이다. 존재는 오직 지금 속에만 응결되어 서 있는 것이다." 무시간적인 진리의 상관자인 무시간적 존재라는 이 개념과 함께 신화로부터 '로고스'의 해방, 즉 신화적인 운명의 힘에 대한 순수사고의 독립선언이 행해지고 있다. 그리고 철학은 자신의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항상 새롭게 자신의 이러한 기원으로 되돌아간다. 


324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시간의 본질에 대한 고찰이 심화될수록 이러한 절대적 시간이라는 것으로 정립되고 있는 것이━칸트의 말을 빌리자면━어떤 종류의 '실재하는 비실재물(existierendes Unding)'이라고도 할 만한 것이라는 사실이 보다 명확하고 선명하게 된다. 흐름이라는 것이 시간의 근본계기로 간주됨으로써 시간의 존재도 본질도 그것이 흘러간다는 점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물론 시간 자체는 이러한 흘러감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변전은 시간 자체에 관계하는 것은 아니고 오직 생기의 내용에만, 즉 시간 속에서 잇달아 일어나는 현상들에만 관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와 함께 존재하지 않는 부분들로 조립되어 있는 하나의 존재자, 즉 하나의 실체적 전체가 정립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시간에서 존립하는 것으로서 남는 것은, 미래의 '아직 존재하지 않음'과 과거의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 사이를 매개하는 현재만이 존재할 수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이러한 매개물에 어떤 유한한 연장을 부여하면서 그것을 시간이 펼쳐진 것으로 본다면, 그것에서도 다시 동일한 문제가 나타난다. 즉 현재라는 이 매개물도 그 중의 개별적인 순간만이 존립하고 존재하며, 그것 이외의 모든 계기는 존재에 선행하든가 아니면 이미 존재를 배후에 남겨두게 되는 다양성(Vielheit)이 되고 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지금'을 엄밀하게 점으로 해석한다면, '지금'은 이러한 고립화에 의해서 시간계열의 한 항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346 자연주의적 경향의 심리학은 '지각'과 '상기'의 관계를, 상기를 어떤 의미에서 단지 지각의 이중화, 즉 두 번째 세위의 지각으로서 나타난다는 식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상기는 과거의 지각에 대한 지각이라는 것이다. 즉 홉스가 말하는 것처럼 'sentire se sensisse meminnisse est[자신이 감각했다는 것을 감각하는 것이 상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식 자체 속에서 이미 이중의 문제가 나타난다. 홉스는 감각을 정의하여 감각이란 유기적 신체가 외부로부터 작용하는 자극에 대해서 행사하는 반응일 뿐이라는 식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서 기억이라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는가? 어떤 현전하고 있는 자극에 이어서 일어나는 반응을 그 원인이 되었던 이제는 더 이상 현전하지 않은 이 자극에 결부시켜서 설명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자신이 지각했다는 것을 지각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홉스가 자신의 명제에 부여한 정식 속에 이미 모든 난점이 나타나 있다. sentire se sensisse[자신이 감각했다는 것을 감각한다]라는 것, 이것은 우선 첫째로, 서로 다른 시간에 속하는 서로 다른 두 감각이 동일한 주관에 결부된다는 것, 즉 감각하는 자도 감각한 자도 동일한 '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다시 자선의 여러 상태와 양태를 서로 구별하면서 그것들에 상이한 시간적인 위치가를 부여하고 이것 자체를 하나의 연속적 계열 속에 질서 짓는 것도 바로 이러한 나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홉스가 처음에 설정했던 관계는 여기에서는 완전히 역전되고 만다. 즉 홉스는 자신의 체계의 원리들에 따르면 감각을 기억의 전제조건으로서 사유해야 하는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게는 기억이 감각 자체의 구성부분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 일관된 '유물론자'조차도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모든 물체에는 감성적 감각능력이 부여되어 있다는 명제를 제시했던 탁월한 철학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감각의 본성을 오로지 외적 자극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것에서만 찾는다면, 나는 사실상 그러한 종류의 가정을 반박할 어떠한 수단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비록 단순한 반응에 의해서 이러한 물체들 속에 어떤 표상이 형성될 경우에조차도 이러한 표상은 대상이 멀어지게 되자마자 곧 사라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물체들은 자신이 감각했다는 사실을 결코 상기하지 못하는 식으로 지각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여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감각에서는 무의미하다.  


367 그런데 미래로 향하는 것에는 이러한 이상화가 거부되고 있다. 미래로 향하는 것은 단지 '실용적인' 가치를 가질 뿐이며 이론적인 가치를 갖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에게 미래는 과연 항상 단지 직접적인 작용의 목표로서만, 즉 가장 좁은 의미에서의 실천적인 작용의 목표로서만 주어지는 것일까? 오히려 작용이 참된 힘과 자유로 자신을 고양시키려고 할 경우에는, 그 작용 자체의 근저에 순수하게 정신적인 어떤 '선견(先見, Vorblick)'이, 즉 어떤 이념적 계기 내지 동기가 근거에 놓여 있어야 하지 않을까? 플라톤은 '이데아'의 내실과 의미를 단지 지식과 순수한 인식에서만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 내실과 의미를 지식과 순수한 인식 못지않게 모든 형성적 행위, 더 나아가 도덕적 활동뿐 아니라 제작적 활동, 즉 데미우르고스[제작자]적 활동에서도 발견했던 것이다. 자신의 기술을 구사하면서 특정한 용구를 제작하는 자는 그 경우 단순한 습관과 직업적인 '숙련'에 기초하여 제작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용을 규정하면서 그것에게 길을 지시하는 것은 오히려 어떤 근원적인 형태에서의 정신적 직관이다. 베틀의 몸체 부분을 제작하는 가구공은 그 경우 감각적인 모델로서 그 앞에 이미 존재하는 어떤 사물을 모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베틀의 몸체 자체의 형태와 목적, 즉 그것의 '형상'에로 눈을 향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신적인 데미우르고스조 차도 다른 방식으로 행하지 않는다. 그의 창조는 그의 직관의 형식에 의해서, 즉 원형이자 모범으로서의 선의 이데아에 눈을 향하는 것에 의해서 규정되고 인도된다. 베르그송에서 무시되고 부인되는 것은 행위가 갖는 이러한 이데아적인 성격이다. 베르그송에게는 모든 행위가 결국은 감각적 욕구에만 근거하고 있으며 특정한 운동장치와 자동장치로 해소되고 만다. 이와 함께 우리를 과거 속으로 이끄는 순수직관은 미래를 가리키고 미래에 대해서 긴장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지향'과 극히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다. 그러나 시간의식을 순수하게 현상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이러한 종류의 가치평가는 어떠한 뒷받침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시간의식을 현상학적으로 분석해 볼 때 상기의식과 기대의식 사이에는 가치의 현저한 차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오히려 그것이 입증하는 것은 이 두 개의 의식 속에는 공통된 특수한 정신적 기본능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가올 것을 상의 형태로 자신 앞에 제시하는 정신의 능력이 과거의 것을 하나의 상으로 변화시키면서 상의 형태로 갱신하는 능력보다도 열등한 것은 아니다. 그 두 가지 능력에서는 '재현전화' 내지 '재현'이라는 동일한 근원적 능력이 나타나고 있으며 입증되고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정신의 인식은 이러한 이중의 길을 통해서 비로소 획득되고 확보될 수 있다. 즉 정신의 자기 인식은 정선이 자신의 순수한 현재 안에 자신의 역사를 보존하면서 자신의 미래에 형태를 부여하면서 선취함으로써 비로소 생기는 것이다. 


371 우리가 일반적으로 어떤 특정한 운동을 수행하려고 할 경우, 우리는 공간 속에서 그 운동이 취할 수 있는 개별적 방향 중 어떤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우리는 앞쪽 또는 뒤쪽, 오른쪽 또는 왼쪽, 위 또는 아래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렇지만 시간의 방향들과 관련해서도 [공간의 방향들과] 동일한 고정된 '상호분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이는 외관상으로만 그럴 뿐이다. 시간의 방향들에 존재하는 것은 오히려 다음과 같은 다양성, 즉 그것의 요소들이 서로 구별되면서도 의연히 항상 상호 침투하고 있는 다양성이다. 베르그송 자신의 극히 특징적인 말을 빌려서 말하자면, 여기에서 지배하고 있는 것은 "une multiplicite de fusion ou de penetration mutuelle[서로 융합하고 서로 침투하는 다양성]"인 것이다. 두 개의 시선━현재로부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선과 미래로 향하는 시선━은 그것들이 서로 침투하면서, 즉 그것들이 직접 '유착'되면서 비로소 시간에 대한 단 하나의 구체적이고 전체적인 직관을 낳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유착도 공간적 관계들과 유사한 것으로 보면서 단순한 일치나 합치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항상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두 동기 사이의 대립이며 그것들 사이의 끊임없는 '대결'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은 어느 한쪽이 승리하고 다른 쪽이 패배하는 것으로 끝날 수 없으며 끝나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양자는 끊임없이 대립하면서 서로 작용하고 이러한 대립 속에서 비로소 시간과 역사적 의식이라는 살아 있는 옷을 짜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가는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말을 빌리자면 뒤를 향한 예언자다. 시간에 대한 진정한 직관은 단순한 회고적 상기에 의해서 획득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인식과 동시에 행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생—한낱 생물학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정신적인 것으로서 이해된 생―이 형성되는 과정과 생이 자기 자신을 파악하고 인식하게 되는 과정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통일체를 형성하고 있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즉 생이 자신을 파악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존립하는 어떤 형식이 단순히 외부로부터 생을 둘러싸고 그러한 형식 안으로 생이 밀어 넣어진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생이 자신에게 자신의 형식을 부여하면서 바로 이렇게 부여한다는 작용, 즉 능동적 형태화 작용에서 그 형식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