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래리모어: 욥기와 만나다

 

욥기와 만나다 - 10점
마크 래리모어 지음, 강성윤 옮김/비아

서론
1. 고대 해석자들이 바라본 욥기
2. 논쟁 속 욥기
3. 공연되는 욥기
4. 신정론과 욥기
5. 추방당한 욥기

결론

 


결론

275 지금까지 우리는 역사에서 욥기를 연구하고, 욥기를 바탕으로 기도하고, 욥기를 상연한 면면을 살펴보았다. 사람들은 욥 이야기를 보충하고 그의 말을 바꾸고 때로는 뒤집어 읽었다. 욥은 이방인이었으며 유대인이었다. 욥기는 역사이자 비유였다. 욥은 하느님의 시험을 받았고 심판받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욥의 하느님을 시험하고 심판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인간과 신 양쪽을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욥은 하느님의 특별한 친구이자 교만한 사람이자 겸손한 사람이자 고결한 사람이었고, 그리하여 욥기는 비인간적 고통을 겪고 있는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되었다. 사람들은 욥의 고난을 통해 선의 정의와 불의, 배움과 망각, 항복과 저항을 숙고했다. 언약 전통 주변부에 있던 욥은 탈중심 세계의 상징이 되었다.

욥 이야기와 욥의 목소리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욥기를 읽도록 자극했고 때로는 욥기를 읽는 것에 저항했다(때로 이는 동시에 이루어졌다). 욥기는 커다란 해석의 틀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책이다. 누군가 욥기의 독법을 제시할 때마다 본문에는 그 틀에 들어맞지 않는 요소들이 있었다. 욥기를 개작한 이야기들에서도 욥기의 갈등과 복잡한 요소들은 자리를 바꾸어 다시 나타났다. 대사와 역할이 바뀌더라도 욥기의 진실성은 유지되었다.

이렇게 욥기가 독자들에게 손쉽게 파악되지 않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저자가 여러 명이기 때문이다. 또한, 욥기라는 문헌의 역사 내내 욥기와 나란히 읽힌 욥의 전설이라는 생생한 대항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는 욥기가 삶의 의미와 올바름, 인간의 선과 이해의 한계, 대화와 독백, 침묵 속에서 언어의 한계 등과 관련된 우리의 통념에 이의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 인간 실존과 관련된 가장 어렵고, 가장 깊은 곳을 성찰하기 위해서는 욥기처럼 그 모습과 해석의 틀이 계속해서 달라지는 본문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든 욥기의 독자들과 사용자들은 '자기만의 욥기'를 만들기 위해서, 즉 욥 이야기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 혹은 욥 이야기가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세계에 관한 책을 만들기 위해서 분투한다. 우리는 "나의 말을 기록"해주기를 바랐던 욥이 애타게 찾던 고엘 (구원자, 변호인, 대변인)이 되려는 유혹을 받는다. 우리는 이 세계에 살아 있는 욥들과 망자가 된 욥들을 변호해야 한다. 그러나 근대 이전의 해석자들은 우리가 섣불리 욥의 친구들을 비난하면 안 된다고, 혹은 우리가 그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욥의 친구들처럼 선의 관점에 서 있는 양하면 안 된다. 우리는 그저 더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애써야 한다.

너희는 내 친구들이니, 나를 너무 구박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다오.
하느님이 손으로 나를 치셨는데,
어찌하여 너희마저 마치 하느님이라도 된 듯이 나를 핍박하느냐?
내 몸이 이 꼴인데도, 아직도 성에 차지 않느냐? (욥기 19:21~22)

친구든 해석자든 욥과 교제를 이어가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욥이 제기한 물음들 욥기가 제기한 물음들에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는 이들은 예외지만 말이다. 우리는 욥이 던진 질문, 욥기가 던진 질문을 욥기가 완결하지 않을 뿐 아니라 완결할 수 없음을 안다.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욥기를 되풀이해 읽고 우리의 욥기를 계속해서 다시 쓰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를 위해서는 본문의 모든 부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욥기와 관련된 논쟁에 참여한 과거 모든 진지한 해석자의 시도를 살펴야 한다. 그들에게 배워야 한다. 이미 우리는 엘리후부터 시작된 기나긴 해석자들의 행렬에 합류했다. 이 책은 어떻게 그리고 왜 이러한 작업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려 했다.

무고한 고통이 넘치는 세계, 유예된 언약의 세계, 불편한 우정의 세계, 믿을 수 없을 만큼 우리와 우리의 가치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자연 세계에서 정의를 이루려 하는 한, 욥기와 욥기를 둘러싼 진지하고 창조적인 해석들은 언제까지나 소중한 유산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비탄과 분노가 터지는 세계에서 욥과 욥의 해석자들은 침묵하거나 고함을 지르거나 말을 더듬으며 서 있었고, 또 서 있다. 언젠가 시인 넬리 작스는 욥기는 오래된 지도 가장자리에 있는 (본래는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알려 주는) 나침반과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심상은 어느 장소에도 매이지 않는 욥의 보편성을 잘 보여준다. 삶이라는 지도에서 욥기는 "고통에 관해 알려 주는 풍배도"다.

미래의 독자들이 욥기를 어떻게 대할지, 어떻게 읽을지 예측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적어도 오늘날의 흐름만 본다면 욥기의 역사는 결코 종결되지 않을 것 같다. 다른 성서 본문과는 달리 욥기는 서구 세계에서 별도의 책으로서 위상을 확립했다. 여러 대학교의 고전 읽기 과정에는 욥기가 들어있다. 여기서 욥기는 세속 시대가 추방한 유일신교, 민족의 역사 바깥으로 한걸음 내딛음으로써 보편적 가치를 일군 유일신교를 대표하는 저작이다. 사람들은 욥기, 소포클레스 비극, 니체의 저술들, 바가바드 기타를 읽으며 이를 두고 지적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대중문화에서도 욥기는 살아 숨 쉬고 있다. 현대인이 망각한, 하지만 삶에 계속 자리하고 있는 극적 차원에 대한 감각을 다룬 작품(이를테면 영화 <시리어스 맨》)에서, 혹은 우주에서 무의미할 정도로 미미한 존재인 인간이 선을 향한 노력과 고통을 통해 우주의 심장과 함께 고동칠 수 있음을 암시하는 작품(영화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 우리는 욥기의 분명한 영향력을 감지한다, 과학이 모든 것을 밝히는 세계에 '신성을 머금은 시'라는 바람이 불 때, 우리는 이 세계를 이해하는 또 다른 차원을 알게 되며 위안을 얻는다. 욥기는 전통적인 유대교인, 그리스도교인 뿐만 아니라 무신론자를 향해서도 말을 건넨다. 그리고 고통받는 이들과 구도자들도 욥기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어쩌면 욥은 욥의 신보다도 오래 살지 모른다.

서구 이외의 지역에서 욥의 목소리는 오래된 소리가 아니라 새로운 소리다.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은 애니미즘 신봉자들에게 호소력이 있다는 점에서 욥기를 선호한다. 1장 21절에 나오는 욥의 말("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은 
욥이 한 말 중 가장 널리 알려졌고, 가장 많이 인용된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 말을 언제나 같은 의미로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콩고 사람들에게 이 말은 커다란 도전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때 이른 죽음이 누군가 주술을 걸어서 일어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유럽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천상과 지상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는 욥기 도입부에 별다른 감흥을 받지 않지만, 아프리카 복음주의자들은 이를 통해 "우리 주변의 일상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영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충돌을 반영"함을 읽어 낸다, 그 외 독자들도 욥기의 여러 부분에서 자선의 언어를 발견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에이즈에 걸려 이런저런 사회적 낙인이 찍힌 이들은 교회가 (자신들을 비난하며) 1장 21절을 내뱉을 때 이에 응답할 말을 욥기 3장에서 찾았다. 그들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기를 바라는 욥의 말에서 위로를 받았고 성서가 자신들을 인정해 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욥기는 에이즈 환자들을 비난하지 않으면서도 에이즈에 대응할 방만을 제시한다. 어떤 학자들은 신에게 욥이 항복한 장면을 두고 이성과 정의에 관한 담론들이 계시의 담론에 도전하기에는 "여전히 무력"함을 알려 준다고 보기도 한다.

어떤 독자는 욥기에서 억압과 관련해 성서 중 가장 감동적인 구절들을 발견하기도 했고, 어떤 독자는 욥기에서 가난한 이들을 경멸하는 표현을 찾아내기도 했다. 리마에서 빈곤한 공동체와 함께 욥기를 읽은 페루의 해방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는 욥기가 억압과 가난의 한복판에서 하느님에게 말하는 법을 알려 주는 지침서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욥기는 예언적 행동과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관상의 조화를 이루는 신앙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어떤 이는 "동방의 가장 위대한 인간"인 욥의 이야기는 부유한 사람이 부유한 사람을 위해 쓴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이 욥기의 숭고함과 난해함에 찬사를 보내는 것은 이 책이 억압과 불평등의 원인, 의미에 관한 물음들을 정치 영역에서 몰아내려는 이데올로기 저작임을 보여준다. 멕시코 여성 해방신학자이자 성서학자인 엘사 타메즈는 욥기를 읽고 난 뒤 욥이 자신의 특권을 되찾은 뒤에 고통받은 이들을 잊지 않을까 염려했다

사람들은 욥기에 의지하면서 동시에 도전 받는다. 위안을 얻으면서 동시에 인간과 선에 관해 더 깊게 생각한다. 현실이 우리를 사유와 언어의 한계까지 몰아갈 때 욥기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욥기는 삶의 한가운데서 상실을 겪은 이들 고통받는 이들, 천민들 희생양들 시대의 이단자들이 계속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 준다. 욥기는 우리 주변에서 살아가는 욥들에 대해 올바로 말하는 것이 어려움을, 어쩌면 불가능함을 알려 준다. 욥기는 자신의 한계, 그리고 타인에게 관심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어쩌면 그 관심으로 인해 우리 각자가 가장 철저하게 믿는 바가 흔들린다 할지라도 말이다. 기묘한 다성음악과 침묵을 통해 욥기는 부서진 이들에게 말을 건네고 부서진 이들을 위해 소리를 낸다. 불굴의 욥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이들에게도 희망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욥기는 결코 완결될 수 없다. 다른 무엇모다 우리가 고통받는 이들, 비극을 목격한 이들과 함께하는 법을 익히고 그들을 보살피는 일에 대해 숙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산산조각이 난 삶과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삶과 세계의 의미를 엮는 작업을 이어가는 한 우리는 계속 우리의 욥기를 만들어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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