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P. 킨들버거: 대공황의 세계

 

대공황의 세계 - 10점
찰스 P.킨들버거/부키

1. 역자 서문
2. 저자 서문
3. 서론
4. 제1차 세계대전으로부터의 회복
5. 붐
6. 농업 불황
7. 1929년의 주식 시장 붕괴
8. 깊은 수렁으로의 전락
9. 1931년
10. 디플레이션의 격화
11. 세계경제회의
12. 회복의 시작
13. 금 블록의 굴복
14. 1937년의 경기 후퇴
15. 해체되는 세계 경제와 재군비
16. 1929년의 불황에 관한 한 가지 설명
17. 참고 문헌


제14장 1929년의 불황에 관한 한 가지 설명

387 원래의 문제로 돌아가자. 1929년 세계 대공황이 발생한 원인은 무엇인가? 불황이 그토록 광범위하고 그토록 장기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실물 요인 때문인가, 화폐 요인 때문인가? 그 기원은 미국에 있는가, 유럽에 있는가, 주변부의 1 차 산업국에 있는가, 아니면 이들 나라들 간의 관계에 있는가? 치명적인 약점은 국제 자본주의 시스템의 본질에 있었는가, 아니면 그것이 운영된 방법 즉 각국 정부가 시행한 정책에 있었는가? 정부 정책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면 그같은 정책은 무지, 단견, 또는 악의 중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가? 불황의 심각성과 장기성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시스템에 가해진 충격의 크기를 반영하는 것이었는가, 아니면 시스템이 정상적인 힘의 일격 또는 연타를 맞고 불안정해진 크기(그것이 어떤 식으로 측정되더라도)를 반영하는 것이었는가? 또는 논점을 밀튼 프리드먼과 폴 새뮤얼슨의 견해 차이로 돌아가서 구하자면, 1929년의 불황은 미국의 금융 정책의 귀결이었는가, 아니면 일련의 역사적 우발 사건에 따른 것이었는가? 이와 같은 논의들의 맥락을 추적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상당히 많은 선입관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선험적으로 선택된 어떤 입장을 지지해 주는 통계와 사실 및 사건만을 1930년대의 역사에서 골라내고 있다는 비난을 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제시한 설명에 맞지 않는 사실을 고의로 은폐하거나, 여러 가지 다른 설명, 즉 미국 금융 정책 원인설(프리드먼), 금본위제 오용설(로빈스), 디플레이션 실책설(케인스), 장기 정체설(한센), 구조적 불균형설(스베닐손) 등에 대해 무시하거나 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장의 제목은 1929년의 불황에 관한 "설명(The Explanation)"이 아니라 "한 가지 설명(An Explanation)"이다. 

 


이 책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1929년의 불황이 그토록 광범위하고 심각하며 장기적이었던 까닭은 국제 경제 시스템이 불안정하게 되었기 때문에, (1) 투매되는 상품에 대한 비교적 개방된 시장의 유지, (2) 경기 조정적인 장기 대부의 공여, (3) 공황시의 어음 할인이란 세 가지 점에서 국제 경제 시스템을 안정시킬 책무를 영국은 능력을 상실해서, 그리고 미국은 맡을 의사가 없어서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소맥과 같은 몇 가지 1차 산품의 과잉 생산이 국제 경제 시스템에 가한 충격도, 1927년 미국의 금리 인하가 가한 충격 (그것도 충격이라고 한다면)도, 1928년 독일에 대한 대부정지 및 1929년 주식 시장의 붕괴가 가한 충격도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미국에서 발생한 1920년 봄의 주식 시장 폭락과 1927년의 경기 후퇴는 그와 유사한 강도의 충격이었지만, 수습된 바 있었다. 세계 경제 시스템이 불안정해지면 19세기에서 1913년까지 영국이 그렇게 하였듯이 어떤 나라가 안정시켜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29년에는 영국은 그럴 능력이 없었고 미국은 그럴 의사가 없었다. 모든 나라가 자국의 개별적인 국익만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전환했을 때, 세계 전체의 이익은 고갈되었고, 그와 함께 각국의 개별적 이익도 사라져 버렸다. 


비대칭성
369 세계 경제가 대칭적으로 움직인다면 세계 공황은 일어나지 않는다. 소맥 가격의 하락은 농민들에게는 손실을 초래할 것이지만, 소비지들에게는 실질 구매력의 증대를 초래할 것이다(이 경우 상이한 한계 저축률을 지닌 집단으로부터의 실질 소득의 이전은 무시한다). 금을 상실하는 나라는 디플레이션 효과를 받을 것이지만 금이 증가한 수취국에서는 그 효과를 상쇄하는 경기 확대가 창출될 것이다. 경기 수축 효과를 지닌 평가 절상은 경기 자극 효과를 지닌 평가 절하에 의해 조정될 것이다. 주식 시장의 경우 자금을 흡수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화폐를 포기하는 모든 매수인에 대해 그 화폐를 취득하는 매도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칭성은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세계에 적용되는 방식은 아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사람들이 가령 금본위제란 게임의 규칙에 간섭한다든가, 또는 뉴욕이 국제 금융 중심지답지 못하게 경험이 부족하다든가 해서가 아니다. 영국에서는 1873년부터 1913년까지 대외 대부와 국내 투자가 지속적인 보완 관계를 유지하였다. 국내의 경기 후퇴는 대외 대부를 촉진하고, 국내의 붐은 대외 대부를 감소시켰다. 그러나 국내의 붐은 수입을 증가시키고, 수입은 차입 지금에 의거한 국내 투자 대신에 해외 수출을 촉진하였다. 경기 조정적 대부가 국제 경제 시스템을 안정시켰던 것이다. 


1920년대 미국의 대외 대부는 국내 투자와 정(正)의 상관관계에 있었지 보완 관계가 아니었다. 1920년대의 붐은 대외 대부의 증가를 수반하였고 1930년대의 불황은 자본의 흐름을 역전시켰다. 핸 래리는 1943년에 저술한 『미국과 세계 경제』에 미국이 수입과 대외 대부를 동시에 삭감하였다고 하는 근본적인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 대외 대부의 감소는 실제로 주식 시장의 붕괴보다 앞서서 일어났다. 투자가들의 관심이 도우스 공채에 이어서 계속된 외국 증권 붐 후부터 1928년 봄부터 시작된 국내 주식 붐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대외 대부의 감소에 따른 독일에 대한 디플레이션 압력에 관해서는 논쟁이 있으나, 주변부의 저개발국들에 압력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당초의 조건
370 할인 편의와 경기 조정적 대부 및 개방된 상품 시장을 제공하는 데 지도력을 발휘하는 나라가 없음으로 해서 국제 경제 시스템은 불안정해졌다. 전쟁의 유산도 국제 경제 시스템을 불안정하게 하였는데, 특히 배상, 전채, 파운드 화의 과대 평가, 프랑화의 과소 평가 같은 요인들이 결합해서 그렇게 하였다. 1923년 독일의 인플레이션도 그에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독일이 그 후 편집증 환자처럼 디플레이션에 집착한 것은 인플레이션 때문이었 던 것이다. 전쟁에 따른 구조 변화로 일어난 소맥, 사탕, 양모 및 이에 더하여 선박, 면제품, 석탄의 과잉 생산 문제는 그렇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았는데 거시경제적 안정이 유지된다면 가격 시스템을 통해 그리 어렵지 않게 처리될 수 있었다. 금융의 왜곡은 거시경제적 안정의 유지를 불가능하게 할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렵게 만들었다. 미국에 긴 안목의 지도력이 있었다면 기꺼이 전채를 포기하였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특히 영국과 프랑스가 배상금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러한 방침의 장점을 미국의 유권자들에게 납득시키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영국은 전채가 소멸된다면 배상을 면제할 용의가 있었다―제한적이나마 자제의 태도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1819년과 1871년에 배상을 지불한 바 있고 다시 4년 동안의 치열한 전쟁을 치른 프랑스에 대해 배상을 면제하라고 권고하는 것은 역사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셈이다.  

 


영국의 지도력
374 1931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영국이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음이 명백해졌다. 1920년대 초에 국제연맹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통화를 안정시키기 위한 계획을 만들었다. 그 계획은 주로 영국인들이 국제연맹 경제금융부의 직원들인 스칸디나비아와 베네룩스 및 영연방 자치령 출신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고안한 것이었다. 그 후 독일의 배상을 해결하기 위한 도우스 안과 영 안의 작성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맡은 것은 영국의 전문가들이었으며, 미국인들은 배상을 전채와 묶어 놓으려는 영국의 희망을 구현하는 데 앞장섰다. 1931년에 영국의 지도 역량은 사라졌다. 부분적으로 영국의 지도 역량은 노먼과 모로 사이에 벌어진 중앙 은행과 관련된 철없는 분쟁으로 소모되었는데, 유럽의 약소국들의 중앙은행들에 대한 주도권 다툼이란 대부분 모로의 상상력의 산물이었다(벤저민 스트롱은 이 같은 분쟁을 조정하고자 무진 애를 썼으며, 1928년 그의 사망은 국제 경제 시스템의 안정에 손실이었다). 더욱 의미가 중요한 것은 프랑스의 파운드 화 잔고가 영국에 지운 부담으로서, 그 때문에 영국은 최종적으로 의지하는 대부자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게 되었다. 1931년 6월의 위기시에 크레디트안슈탈트 은행을 위한 제2차 대 오스트리아 차관이 일어나 노먼이 1주간의 차관으로서 5,000만 실랑 즉 700만 달러를 공여하였을 때 영국의 허약성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1933년 세계경제회의에서 영국은 영연방 내부로 방향으로 돌리고 파운드 화 관리의 자유를 추구함으로써 세계를 지도하는 역할에서 물러나 세계적인 계획의 구상을 대거 미국으로 넘기게 된 것이 확실해졌다. 


미국의 지도력 결여
375 윌리엄 윌리엄스 같은 수정주의 역사가는 미국이 일찍이 1922년의 군축회의에서부터 찰스 E. 휴즈의 주도로 세계의 지도적 역할을 인수하였다고 주장한. 국제 경제의 분야에서 이 같은 입장을 지지하는 견해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분야에서는 E. H. 카와 같은 역사가의 전통적인 입장이 지지되고 있다. 그는 "1918년에 세계의 지도력은 거의 모든 나라의 동의에 의해 미국으로 전해졌는데······ 미국은 그것을 거부하였다."고 쓰고 있다. 뉴욕에서는 유럽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 특히 스트롱과 해리슨 휘하의 뉴욕 연방준비은행과 드와이트 모로우, 토머스 래먼트 및 노먼 데이비스 같은 사람들이 대표하는 금융계가 그러하였다. 찰스 G. 도우스와 앤드류 멜런 같은 뉴욕인이 아닌 소수의 인사들도 국제 금융 및 외교의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베르사유 조약의 거부 및 미국의 국제연맹 가입 거부를 주도한 헨리 캐보트 롯지 로 대표되는 고립주의가 지배적인 국민 감정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미국은 국제적 역할을 담당할 자신이 없었다. 영국은 교섭 전술이 더욱 빈틈없고 세련되고 교묘하기 때문에 미국은 국제 회의에서 번번이 패한다고 생각하였다. 스팀슨은 1931년 7월에 라이히스마르크 화를 구조하기 위해 대대적인 할 조작에 나설 용의가 없었다. 후버와 멜런 및 (뉴욕 출신이기는 하지만) 밀스는 할인이 요청한 대로 양화를 악화와 맞바꾸어 제공하는 데 반대하였다. 1933년 제임스 워버그와 몰리는, 그리고 어쩌면 우딘과 루스벨트도 악화와 교환하여 양화를 제공하는 데 반발하였다. 미숙한 형태이기는 하였지만 국제적인 통화 기금을 창설하자는 제안은 많았으며, 영국에서조차 공식적으로 그에 대한 한 가지 안이 제시되었다. 그 제안들은 미국이 이미 전채의 미지불과 채권 거치협정 때문에 얼마나 많은 손해를 입었는지 아는가 하는 설교나 듣게 될 뿐 한결같이 거절되었다. 1942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해리 화이트가 브레튼우즈에서━케인스 경의 계획과 함께━토의될 세계적인 계획, 제한된 할인을 행하기 위한 세계 계획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국제협력
377 중앙 은행 간의 협력은 1928년 중반까지 유지되었으나 그 이후는 실패하였다고 하는 클라크의 결론에 관해서는 이미 어느 정도 상세히 살펴보았다. 요약하자면, 약소국의 중앙은행들에 대한 지배권 또는균형 환율의 선택과 같은 문제에 관해서 중앙 은행들은 1926년 이전에는 적절히 협력하지 않았으며, 프랑스 은행은 1931년의 늦여름에 파운드 화를 성실하게(그리고 비싼 값으로) 지지하였다는 것이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협력 그 자체가 충분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앨빈 한센은 『세계 경제에서 미국의 역할』에서 미국이 국내에서는 완전 고용을 유지하고 국제적으로는 무역 자유화, 자본 이동의 회복, 세계 통화 시스템의 개선 등을 위해 타국과 협력하는 정책을 취해야 한다는 처방을 내놓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럴 경우 국제 협력 이상의 것 즉 지도력이 발휘되는 듯하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선진 10개 국 그룹 (Group of Ten), 국제결제은행 (BIS), 국제통화기금(IMF), 국제부흥개발은행,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등과 같은 기관과 정책은 단순한 국제 협력만으로는 수립되지 않았을 것 같다. IMF의 직원인 한 친구가 (분명히 한 미국인에게) 단언하였듯이, 미국이 지도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지도력이 발휘되어도 따르지 않을 수 있으며, 어리석은 제안은 물론 현명한 제안도 지지가 없으면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약소국들이 아무리 현명한 제안을 내놓더라도 그것을 실행할 힘이 없고 그에 따르는 나라들을 구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지도권 교체
378 프리드먼과 슈워츠는 미국에 있어서 통화 문제의 지도권이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이전된 것이 대공황에 심대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큰 사건에는 큰 원인이 있다고 하는 부동산의 일반 원리"에 비추어 이 같은 견해가 억지처럼 들릴지도 모른다고 전제하면서도, 그러나 때로 작은 사건이 연쇄 반응과 상승 효과로 말미암아 크나큰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있다는 데 주목한다. 여기서 주장하는 원리의 보편성은 나에게는 의심스러워 보인다. 지도권의 위치 이동이 불안정을 초래한다는 관찰은 의심스럽지 않다. 프리드먼과 슈워츠는 미국의 통화 동향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면, (통화 공급량이 대폭 증가된 이후에 있는) 후버에서 루스벨트로의 대통령직 이양과 함께, 그리고 (나의 판단으로는) 한층 더 중요한 화이트홀(Whitehall, 영국의 관청가)에서 화이트하우스(Whitehouse)로의 세계 경제의 지도권 이양과 함께 불황이 더욱 격화되었다고 하는 점에 주목하였을 것이다. 

 


약소국 및 프랑스의 역할
380 자동차에 타고 있으면서 관심을 버리지 않은 한 사람의 승객은 프랑스였다. 그리고 책임을 지지 않는 한 그룹━비유하지 않고 말하면 이렇게 표현되지만, 비유를 써서 말하면 뒷자석의 승객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은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 및 스칸디나비아 같은 약소국들이다.  

 


전체 이익 대 개별 이익
383 냉소주의의 입장에서는 리더십이란 그에 따르는 고통을 위신으로 충분히 보상받으며, 아무리 공공의 복지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고 주장하더라도 그 기본적인 관심사는 사적인 것이라고 본다. 비스마르크는 자유무역이란 경제를 지배하는 나라가 자국이 가는 길을 타국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막기 위한 무기라고 주장하였다. "백인의 책무"란 오늘날 조롱할 때에만 쓰는 표현이다. 프랑스와 같이 의도적으로 위신을 획득하고자 하는 나라는 문제 해결에 관심을 기울이는 나라들에 대해 자기를 기만하거나 남을 기만하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스템의 운영 방식에 관한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과 거부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영국은 책임을 받아들였다. 다만 5,000만 실링의 차관에서 여실히 드러났듯이 그 책임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프랑스와 미국은 안정의 책임을 인수할 의사가 없었다. 쿨리지와 후버 시대의 미국은 외국의 부흥 계획과 통화 안정 계획에 관여하기를 거부하고, 이들 문제를 연방준비제도에 넘겼다. 루스벨트의 세계 경제에 대한 관여는 1936년 삼국통화협정이 체결되기까지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제2차 세계 대전 중까지도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프랑스와 다른 주요 열강들과의 관계에서와 같이, 프랑스 국내에서는 "모든 집단은 그들의 적대자들이 자기들 이상으로 단합하여 이익 추구에 전념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전체의 이익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다." 

 


경기 조정적 자본 이동
386 미국이 1930년의 스무트-홀리 관세를 통해 무역의 메커니즘을 파괴하는 일이 없었고, 1931년의 공황에 대처할 수 있는 할인의 메커니즘이 동원될 수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토록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겠지만 심각한 불황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것은 경기 조정적인 대부가 있지 않았기 때문이며, 가령 세계은행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개발원조위원회(DAC, Development Assistance Committee)가 조정하는 대외 원조 같은 민간 시장에 대신해서 공공 기금을 지원해 줄 기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뉴욕의 대외 자본 시장이 주식 시장 붕괴 이후인 1930년 봄에 회복하기 시작하다가 다시 역전된 사정(런던의 대외 자본 시장도 이보다는 정도는 덜 하였지만 똑같이 움직였다)은 여전히 의문스럽다. 패닉은 없었으며 위험 경보도 없었으나, "사람들은 발 밑의 땅이 꺼지는 것을 느꼈다." 이러한 대외 자본 시장의 역전을 가격 하락의 측면에서 설명하는 아서 루이스의 견해는 그리 설득력이 없으며, 국제 대부에 관한 뉴욕 자본 시장의 "경험 부족"에 의거한 설명도 역시 그러하다. 이 정도가 그에 관한 설명의 모두이다. 경기 조정적 자본이동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불황은 일어났을 것이다. 국제적인 자본 이동은 대부국의 경기 상황과 정(正)의 상관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불황이 격렬하였던 것은 당연하였다. 당시의 지식 수준에서의 정책 대안, 즉 근린궁핍화 무역 전략과 평가절하 정책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빚어진데다가 미국이 1931년에는 최종적으로 의지하는 대부자로서의 역할을 행할 의사가 없었다고 하는 사항을 종합해야 대공황의 장기성과 심각성이 설명된다. 

 


오늘날과의 관련성
388 리더십이란 말은, 의사 결정에 대한 관여가 한층 심미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1970년대에는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이다. 즉 총통이나 수령의 뉘앙스가 상당히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리더십이란 말이 추종자를 착취하거나 사적 이익으로서의 위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전체의 이익을 위해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생각된다면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일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각국의 능력을 제한하기 위해 주권을 공동 관리하는 일은 언젠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 같은 공동 관리는 오늘날 세계 경제 시스템을 안정시키는 데 필요한 기능의 하나로서 실제로 실현되고 있다. 예컨대 스왑 및 단기 신용을 위한 바젤 협정은 세계 중앙 은행이 현실화될 때까지 위기시에 세계 재할인 기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도, 그리고 좀 더 자유로운 무역 및 자본과 원조의 자유로운 이동을 유지하기 위한 세계적 기관에 있어서도 위임된 권한이 없기 때문에 리더십이 불가피하다. 미국의 지도력은 약화 추세에 있다. 유럽 경제공동체(EEC, European Economic Community)의 확대를 통해 유럽의 힘이 증대됨에 따라, 유럽이 투매 상품 및 공격적으로 진출하는 상품에 시장을 제공하고 국제적인 자본 이동을 안정시키고 위기시에는 할인 기구를 제공하는 데 지도력을 주장하고 발휘할 것인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아마도 위기시의 신용 공여에 관한 바젤 협정은 존속할 것이다. 유럽의 상품 시장이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는 있다. 단 세계적인 관점에서 중요한 예외인 농업을 제외하면 그렇다. 자본 이동을 경기 조정적으로 안정시키기에는 여전히 길이 멀기만 하다. 


389 불안정성을 초래하기 때문에 피해야 할 결과는, 첫째 미국과 EEC가 세계 경제의 지도권을 둘러싸고 싸우는 것이다. 둘째는 1929년부터 1933년 사이에 보았듯이, 한쪽은 능력이 없고 다른 한쪽은 능력은 있지만 의사가 없는 경우이다. 셋째는 각국이 적극적인 자체 계획을 확보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세계 시스템을 안정시키고 강화시키기 위한 계획에 대한 거부권을 쥐고 있는 경우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정관은 미국이 반대하는 조치에 대해서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작성되었다. 국제 통화 시스템에 대한특별인출권(SDR)의 추가를 인정한 1969년도 개정안에서는 IMF에 대한 출연 규모에 따라 EEC에도 거부권을 주도록 조정되었다. 그 결과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의 경우와 같이 두 개의 대 세력이 동의하지 않는 경우에는 막다른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생기게 되었다. 안전보장이사회의 경우에는 퇴행 현상이 거미줄처럼 얽히다가 전쟁으로 발전할 위험성이 있다. 경제 분야의 경우 그에 상응하는 것은 경기 침체 및 공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실질적인 권한과 주권을 가진 국제 기관을 창설한다고 하는 세 번째의 적극적인 대안이 요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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