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세계사 - 제러미 블랙 외 지음, 데이비드 아불라피아 엮음, 이재황 옮김/책과함께 |
서문
서론: 지중해란 무엇인가
1. 물리적 환경
2. 교역 제국들의 시작: 선사시대부터 서기전 1000년 무렵까지
3. 해로 전쟁: 서기전 1000년에서 서기전 300년까지
4. ‘우리 바다’의 형성: 서기전 300년에서 서기 500년까지
5. 지중해의 분열: 서기 500년에서 1000년까지
6. 기독교도의 지중해: 서기 1000년에서 1500년까지
7. 이슬람의 부활: 1500년부터 1700년까지
8. 유럽 열강의 전쟁터가 된 지중해: 1700년부터 1900년까지
9. 세계화된 지중해: 1900년부터 2000년까지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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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우리 바다’의 형성: 서기전 300년에서 서기 500년까지
173 로마인들 스스로가 이 바다에 대해 언급한 내용은 이런 결론에 무게를 더한다. 본래 지중해는 여러 개의 작은 바디들로 인식됐던 듯하다. 실용적인 이유에서다. 그 이름들은 이웃한 해안이나 섬들의 이름에서 가져온 경우가 많다. 마레티레니움MareTyrrhenum, 즉 티레니아해, 마레발레아리쿰Mare Balearicum, 즉 발레아레스해 같은 식이다. 마레메디테라네움 Mare Mediterraneum이라는 말은 비교적 가까운 시기까지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던 듯하다. 지리학자 솔리누스Solinus는 3세기 후반에 이를 쓴 듯하고, 이에 관한 우리의 첫 번째 직접적인 지식은 6세기 세비야의 이시도로가 사용한 것이다.
로마인들이 전체 바다를 이야기하고 싶을 때는 마레마그눔 Mare Magnum('거대한 바다'), 마레인테르눔Mare Internum('안쪽 바다'), 마레노스트룸MareNostrum('우리 바다')이라고 했다. 뒤의 두표현이 더욱 흥미롭다. 지중해는정말로 로마에 팽창과 제국을 위한 내부의 통로를 선사했다. 관리, 군인, 이주자, 노예 수공업자, 순회 전도자들이 사용한 길이다. 사실상 모든 사람들이다. 상인들에 못지않았다. 바다 주위의 모든 땅들이 로마의 손아귀에 들어오자 지중해는 내부의 호수, '우리 바다'가 됐다. 그리스인들도 이전에 분명히 비슷한 말을 썼다. 헤 탈라사 해 카트 헤마스he thalassa he kath' hemas, 즉 '우리가 넘는 바다' 또는 '우리 바다'다. 그러나 엄격하게 제한적인 의미에서만 썼다. 초기 제국 시대의 로마인에게 그것은 정말로 전체로서의 마레노스트룸, '우리 바다'였다. 흑해와 홍해는 부속물이었고, 심지어 지브롤터 해협 너머도 고랬다. 이렇게 전체 지중해를 하나의 세력이 정치적으로 완전히 지배한 것은(그리고 사용한 것은) 이전에도 전혀 없었고, 이후에도(똑같은 방식으로는)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이 바다를 소유하고 온갖 가능한 형태로 이용했다. 예컨대 나폴리만 같은 좋아하는 지역에 지은 해변 저택들은 그 소유자의 부와 취향을 지나가는 배들을 향해 과시했으며, 그 탑과 열주는 다시 알아볼 수 있는 항해의 주간 항로 표지 구실을 했다. 그런 저택은 정상적인 작업장과 마찬가지로 자체의 소형 항구와 계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아드리아해 북부 이스트라반도 같은 곳에 있는 선박업체들은 상품 선적을 위한 부두와 방파제를 갖고 있었다. 바다의 가장자리에는 염전(오스티아 같은 곳)과 양어장(이탈리아 코사 같은 곳)이 있었다. 특히 이스파니아(이베리아) 남해안에 많았다. 양어장은 대규모인 경우도 있었다. 절인 생선과 특히 어장인 가룸garum(로마 세계 전역으로 수출되었다)을 생산하기 위해 상업적으로 만들었다. 로마의 해상무역은 먼 옛날부터 항구에서 항구로 다니는 소규모 카보타주cabotage(연안무역)가 지배하고 있었다. 지중해 해안 세계는 서로 연결돼 있었다. 산과 습지로 단절되기도 하는 그 배후지들에서는 불가능한 방식이었다. 이러한 상호연결은 여러 지역들이(아주 가까운 곳들조차도) 기후 조건과 생산성에서 매우 다양했기 때문에 다행이었다. '지중해성 기후'나 '지중해 작물'이라는 뭉뚱그린 일반화가 떠올리게 할 수 있는 것과는 달랐다. '자급자족'이라는 이상적인 가치에도 불구하고 상호 의존은 그럴 수만 있다면 당시의 상황에 꼭 맞는 것이었고, 바다는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고대의 항해 조건은 바람과 날씨에 영향을 받고 인간의 근력에 의존했으며, 얼마나 짐을 실어 나를 수 있는지는 물을 마시고 음식을 먹는데 달려 있었다. 따라서 항구, 만, 피난처나 적어도 상륙할 수 있는 해안이 일정한 거리마다(예컨대 50~70 킬로미터마다) 존재해야 했다. 어느 모로 보나 카보타주가 이 세계가 작동하는 자연스러운 방식이었다.
그러나 로마에 의한 완전한 지배가 이루어지면서 다른 항해 형태도 출현했다. 페니키아인의 시대 이래로(더 이를 수도 있지만) 장거리 항해도 필요하면 가능하다는 것이 사실이었다. 페니키아인의 교역과 식민 활동은 레반트에서 아프리카 해안과 이베리아, 그리고 더 멀리까지 뻗쳤다. 그리스인들은 시칠리아, 이탈리아 남부, 서지중해에 식민 원정대를 보냈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들어서면서 주요 상품의 장거리, 공해 교역이 주기적으로 이루어졌다. 말하자면 바다도 육지처럼 연간주기로 경작한 셈이다. 이 장거리 교역 상당부분의 초점은 군대를 제외하고는 로마라는 도시 자체였다. 교역의 형태를 좌우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국가의 방침이었다. 물론 실제 활동은 민간 상인의 손으로 이루어졌을테지만 말이다.
아우구스투스시대의 로마시와 그 주변 지역에는 적어도 100만명(아마도 그 이상)의 인구가 살고 있었던 듯하다. 한 지역에서 그만한 인구를 먹여 살리기에는 지역 자원을 총동원해도 모자랐다. 따라서 막대한 양의 곡물, 기름, 포도주를 어디서든 수입해야 했다. 때로는 지중해 남쪽 지역에서라도 말이다.
9. 세계화된 지중해: 1900년부터 2000년까지
406 처음에 이 침략은 부드러운 것이었다. 그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시작됐다. 항공, 철도, 도로를 통한 여행이 편리해져 갈수록 값이 싸고 쉬워졌다. 열차에 몸을 실은 독일인과 영국인들이 1950년대에 리미니와 그 주변 도시들로 내려가기 시작하면서 지역 경제를 크게 자극했다. 사실 새 호텔과 기타 기반시설을 갖춘 단체관광은 이탈리아, 에스파냐, 그리스에서 경제 회복의 중요한 통로가 됐다.
407 비사 부근에서도 비슷한 사태가 전개되었다. 비아레조가 토스카나 관광 여행의 주요 중심지가 돼서 피렌체와 기타 토스카나 도시들의 경이로운 예술보다는 해변 휴양에 관심이 있는 고객에게 부응했다. 당일치기 여행 또한 북유럽인의 지중해 휴양에서 표준적인 부분이 됐다. 그 결과로 피사에는 여전히 한여름에 해안 도시로부터 당일치기 관광객의 물결이 밀려든다. 기울어진 탑을 명하니 보러 오는 사람들이다.
413 이런 여행은 지중해 너머에서도 중요한 문화적 변화를 초래했다. 이탈리아 식당의 확산은 처음에는 해외 이주의 패턴을 반영했다. 다만 그들이 판 것은 흔히 새로운 환경에 맞추어 대폭 변형된 음식이었다. 1950년대에 먹었던 뉴욕식의 스파게티와 미트볼 메인코스가 볼로냐 파스타 알수고(소스 파스타) 첫 코스와 관계가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북유럽인이 포크와 스푼을 이용해 정식대로 파스타를 먹으려고 애쓰는 것이 이탈리아 현지 사람들의 사용법과 얼마나 관계가 있는지도 마찬가지다.
1970년대에는 피자가 북유럽 나라들에서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이미 미국에서 확실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 1970년에는 리구리아나 프로방스 이외의 지역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들었던 제노바의 페스토 소스 같은 덜 알려진 음산들이 북유럽에 널리 확산돼 낯선 변형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414 공정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500년주기로 일어나는 지중해 세계가 관련된 세 번째 음식 대혁명이다. 첫 번째는 1000년 무렵 아랍인 치하에서 감귤류 과일 같은 외국 농작물들이 들어온 것이고, 두 번째는 1500년 이후 옥수수 같은 '신세계' 농작물의 충격이며, 세 번째는 2000년 무렵 지중해 요리가 지중해 너머로 전해진 것이다.
성격상 좀 더 보편적인 것은 지중해가 장거리 관광에 통합된 것이다. 두 가지 침략이 특히 중요했다. 미국인의 침략과 일본인의 침략이다. 미국인은 2차 세계대전 이전 지중해의 행락지에서 낯선 얼굴이 아니었다(D. H. 로런스가 에트루리아의 무덤들을 찾은 것은 미국인 친구와 함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 그리스, 남프랑스, 이집트의 역사 유적들이 관광 코스에 포함된 것은 역시 값싼 요금과 정교한 소통망이 대서양 건너에서 비행기를 타고 지중해로 쉽게 올 수 있도록 한 이동의 편의성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 결과 로마, 피렌체, 아테네를 찾는 미국인 방문객들의 상당 부분은 학생이었다. 보통 미국인 여행객들은 휴가를 떠날 때 캐주얼한 옷을 입는 경향을 자극했기 때문에 유럽 전역의 젊은이와 중년층에게 티셔츠, 반바지, 운동화차림이 확산됐다 일본인들은 유럽의 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서유럽의 경제적 성공에 대한 설명을 찾고자 했다. 더구나 그런 접촉은 이미 빠른 속도로 진행 중이던 일본의 서방화를 가속시켰다.
미국인, 일본인, 북유럽인 관광객들의 도래가 경제 성장의 주요 부분이 됐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불안한 것임이 드러났다. 미국이나 일본의 경기 침체는 관광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지중해 지역 경제에 주기적으로 깊은 골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특히 심각한 것은 정치 불안이 관광수입에 미치는 효과였다. 불안은 먼저 이집트 경제(1997년 룩소르 대학살 이후다)에 이어 이스라엘 경제(2001~2002년 팔레스타인 봉기의 결과다)에 심한 손상을 가했고, 한때 흥성하는 유원지였던 아름다운 달마티아 해안과 섬들은 1990년대의 유고슬라비아 분열로부터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이중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 2020년의 코로나19의 대유행이 초래한 위기다. 그것은 여행 산업을 초토화했다. 항공사들은 보유 비행기 대부분을 띄우지 못했다. 호텔 식당 박물관, 유적들은 여러 달 동안 문을 닫았다. 유람선은 빈 채로 멈춰 자기네 본거지 바다에 정박했다. 코로나19는 지중해 일대에 경제적 재앙을 불러왔으며 그로부터 회복하는 것은 엄청난 과제일 것이다.
따라서 기술적으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리가 있는 두 발명품이 20세기 후반에 지중해와 북유럽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바로 비행기와 비키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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