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 10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이정호 그림/알마

들어가는 글

1부 상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길 잃은 뱃사람
몸이 없는 크리스티너
침대에서 떨어진 남자
매들린의 손
환각
수평으로
우향우!
대통령의 연설

2부 과잉
익살꾼 틱 레이
큐피드병
정체성의 문제
예, 신부님, 예, 간호사님
투렛 증후군에 사로잡힌 여자

3부 이행
회상
억누를 길 없는 향수
인도로 가는 길
내 안의 개
살인
힐데가르트의 환영

4부 단순함의 세계
시인 리베카
살아 있는 사전
쌍둥이 형제
자폐증을 가진 예술가

역자후기
참고문헌
장별 참고문헌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43 P선생이 장갑을 장갑으로 보고 판단할 수 없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 비록 인지적인 가정은 잘했지만 인지적인 판단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판단이란 것은 직관적이고 개인적인 동시에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것이다. 우리는 사물을 접할 때 그것을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본다'. P선생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이 '보는' 능력 즉 관계를 짓는 능력이었다(그의 판단력은 그 밖의 영역에서는 정상적이며 동시에 빠르기까지 했다). 시각정보의 부족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시각정보를 처리하는 데 문제가 있었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의 태도에 문제가 있어서 자기가 본 것을 자기 자신과 연관시키지 못했던 것일까?

44 이러한 설명 혹은 설명 방식들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서로 공존할 수 있고 둘 다 사실일 수 있다. 그 점은 이미 고전적인 신경학에서도 암묵적으로 혹은 공공연하게 인정받고 있다. 시각의 기본틀 즉 시각 정보의 처리나 통합 능력에 생긴 결함을 원인으로 돌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본 매크래는 이를 암묵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추상적 경향'을 거론한 골드슈타인은 공공연하게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추상적 태도라는 것은 '범주화'를 인정하는 것인데, 이것은 P선생의 경우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그리고 아마 '판단'이라는 개념 일반에도 들어맞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P선생에게는 '추상적 경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에게는 추상적 경향만이 존재했고 그 밖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사물의 실체와 개별성을 인지할 수 없었고 따라서 판단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45 철학적인(예를 들면 칸트적인) 의미에서나 혹은 경험론적·진화론적인 의미에서 볼 때 판단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능력 중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동물의 경우 아니 인간의 경우라도 '추상적 경향' 없이 살수는 있지만, 판단 능력이 없다면 당장 사멸하고 말 것이다. 판단은 고등한 생활이나 정신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능임에도, 고전적인(계량적인) 신경학에서는 무시되거나 잘못 해석되어왔다.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생긴 원인은 신경학 그 자체가 상정하고 있는 가정들 즉 신경학의 진화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전적인 신경학은 고전 물리학이 그랬던 것처럼 항상 기계적인 성격을 띠어왔다. 뇌를 기계에 비유한 잭슨부터 컴퓨터에 비유하는 오늘날의 신경학자들에 이르기까지.

45 물론 뇌는 하나의 기계이자 컴퓨터이다. 그 점에 관한 한 고전 신경학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와 삶을 구성하는 정신 과정은 단순히 추상적 혹은 기계적인 과정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다. 대상을 분류하고 범주화 할 뿐만 아니라 판단하고 느낀다. 따라서 판단과 느낌을 배제한다면, 우리는 P선생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컴퓨터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느낌과 판단이라는 개인적인 것을 인지과학에서 배제한다면, 그 역시 P선생과 똑같은 결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 즉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파악하는 능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길 잃은 뱃사람
61 나는 다시 노트에 적었다. "그는 순간 속의 존재이다. 말하자면 망각이나 공백이라는 우물에 갇혀서 완전히 고립되어 있는 것이다. 그에게 과거가 없다면 미래 또한 없다. 끊임없이 변동할 뿐 아무 의미도 없는 순간순간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어서 좀 더 무미건조하게 다음과 같이 썼다. "그 밖의 점에서는 신경학적 검사결과 완벽하게 정상이었다. 지금까지 받은 인상에 입각해서 말한다면 아마 코르사코프 증후군 즉 알코올로 인해 일어난 유두체 변성이라고 여겨진다."

62 노트에는 사실과 감상이 하나로 얽힌 여러 문장들이 뒤범벅되었다. 긴 문장이 있는가 하면 조목조목 적어놓은 요점만 있기도 했다. 그에게 보이는 문제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순간순간마다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가엾은 남자가 누구이며,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지 등의 문제를 여러모로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이처럼 기억이 끊겨서 연속성을 잃어버린 존재를 과연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야 했다.

나는 이때도 그리고 나중에 노트에 적은 내용 속에서도 이 잃어버린 영혼(이 말은 과학적인 용어는 아니지만)에 대해서 생각을 거듭했다. 어떻게 하면 연속성을 그에게 돌려줄 수 있을까? 그는 뿌리가 없는 인간이었다. 아니 먼 과거의 일에만 뿌리가 남은사람이었다. '연결', 하지만 그가 어떻게 뿌리를 연결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해야 그가 뿌리를 연결하도록 도울 수 있단 말인가, 대관절 연속성이 없는 인생이란 어떤 것일까? 흄은 이렇게 말했다.

감히 말하자면 우리는 무수하고 잡다한 감각의 집적 혹은 집합체에 불과하다. 그러한 감각은 믿기 어려운 속도로 차례차례 이어지고 움직이고 변화하고 흘러간다.

어떤 의미에서 지미는 흄이 말한 바로 그런 상태가 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만일 흄이 지미를 만났다면 그는 틀림없이 지미에게 흥미를 느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의 견해를 실증해주는 사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미 산산이 부서져서 일관성이 없는 유동과 변화의 존재로 탈바꿈해버린 예가 바로 지미였다.

72 놀라기는 했지만 관심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전날'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쓴 일기는 전혀 맥락이 없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아주 실없고 하찮은 것들만 기록해 놓았다. 예를 들면 '아침 식사로 달걀을 먹음'이라든가 '텔레비전에서 야구를 보다'와 같은 식으로 깊이 있는 내용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애당초 기억이 없는 사람에게 깊이(감정면에서나 사고면에서)를 기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인상이나 사건을 그저 기계적으로 늘어놓는 존재, 흄이 말한 분별없는 존재로 전락한 것은 아닐까?

이 끝없는 망각, 이 가슴 아픈 자기 상실을 지미는 알았다고도 할 수 있고 몰랐다고도 할 수 있다(우리는 다리나 눈을 잃으면 다리가 없고 눈이 없다는 사실을 의식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면 그 사실 자체를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을 깨달을 자신이라는 존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이 문제를 그에게 물어볼 수 없었다.

76 인간은 기억만으로 이루어진 존재는 아닙니다. 인간은 감정, 의지, 감수성을 갖고 있는 윤리적인 존재입니다. 신경심리학은 이런 것에 
대해서 언급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리학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이 영역에서 당신은 그의 마음에 영향을 미쳐 그를 변하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76 기억이나 뇌의 기능 혹은 두뇌만으로는 그를 떠받칠 수 없었다. 그러나 윤리적인 행동이나 주의력 집중은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힘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윤리적'이라는 개념은 너무나 좁기 때문에 미적·연극적인 것을 포함시켜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성당에 있는 지미를 바라보면서 나는 깨달았다. 영혼을 향해서 소리치고 그것을 떠받치고 그것에 평온을 주는 것은 종교 말고도 다른 것이 또 있다는 사실을 그때 지미가 보여준 것과 같은 몰두와 정신 집중은 아마 음악이나 미술의 영역에서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지미는 음악이나 간단한 연극을 '따라가는' 데에는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왜냐하면 음악이나 연극 속의 매순간은 그 속의 다른 순간과 관련을 맺으며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미는 정원 가꾸기를 좋아해서 의료원의 정원 손질을 맡게 되었다. 처음 그는 정원을 날마다 낯설어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집 안보다 오히려 정원에 더 친숙함을 느꼈다. 이제 그는 길을 잃거나 방향을 잘못 아는 일이 전혀 없다. 내 생각에 그는 코네티컷에서 살던 어린 시절 자기가 좋아했던 정원과 비슷하게 정원을 가꿔가고 있는 것 같았다.

77 지미를 알게 된 지도 벌써 9년이나 되었다. 신경심리학적으로 보면 그는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중증 코르사코프 증후군 환자이다. 그는 바로 몇 초 전에 일어난 일도 기억하지 못하며, 1945년 이후의 일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적인 혹은 정신적인 면에서 보면, 그는 때때로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쉽게 흥분하고 지루해하거나 초조하고 불안해 어쩔 줄을 몰라하며 두서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아름다움과 영혼에 마음을 기울이는 인간, 즉 키에르케고르가 나눈 범주들인 예술적·윤리적·종교적 극적인 것 모두를 풍요롭게 누리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지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어쩌면 그가 '흄이 말하는 식'의 거품 같은 존재, 인생의 표피 위를 아무런 의미도 없이 이리저리 떠다니는 그런 존재로 전락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비일관성 즉 그가 앓고 있는 흄 식의 질병을 초월하는 어떤 길이 어딘가에는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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