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 1 - 엘리 알레비 지음, 박동천 옮김/한국문화사 |
▪ 옮긴이 서문
▪ 벤담과 철학적 급진주의 관련 연보
▪ 일러두기
서문
서언
제1장 / 기원과 원리
제2장 / 벤담의 법철학
제1절 / 민법
제2절 / 형법
제3절 / 공리주의 신조와 그 시대
제3장 / 경제이론과 정치이론
제1절 / 애덤 스미스와 벤담
제2절 / 민주주의자와 공리주의자
부록 I / “입법론”(Traités de législation civile et pénale)
부록 II / 쾌락과 고통의 계산
부록 III / 벤담과 원초적 계약의 이론
부록 IV / 대표성에 관한 논문
▪ 옮긴이 해제
▪ 언급된 저작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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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학생이든 선생이든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공리주의라는 명칭을 들으면 마음 속에 무슨 생각이 떠오를까? 벤담의 도덕계산규칙이라든가 스튜어트 밀의 저작 제목이 떠오를 것이다. 공리의 도덕과 연상의 심리학 사이에 아주 가까운 연관이 있고, 공리주의자들은 대개 연상주의자였다는 점에도 기억이 미칠 것이다. 그러나 도덕계산이 겨냥한 과녁이 하나의 도덕이론이라기보다 법에 관한 하나의 과학, 다시 말해 합법적 처벌의 이론을 위해 하나의 수학적 기초를 마련하는 데 있었다는 사실도 떠올릴 수 있을까? 애덤 스미스와 맬서스와 리카도의 전통을 잇는 정통 정치경제학이 공리주의 신조의 한 부분이었음을 어렴풋한 수준 이상으로 알고 있을까? 나아가, 공리주의가 그저 하나의 유행하는 의견을 넘어 하나의 철학으로서 구성되어 등장한 시기에, 공리주의자이기 위해서는 동시에 급진적일 수밖에 없었음을(그래서 철학적 급진파라는 명칭이 나왔음을) 아고 있을까? 당시 공리주의 도덕을 제창한 사람들이 동시에 대의민주주의와 보통선거권의 이론가들이었음을 알고 있을까? 이런 사정들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공리주의 신조라든가, 또는 애당초 공리의 원리 자체를 숙지하는 일이 가능할까? 왜냐하면, 어떤 명제가 원리에 의거해서 세워질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명제의 논리적 다산성(多産性), 다시 말해 그 명제에서 도출되는 논리적 귀결이 많은 덕분이기 때문이다. 공리의 원리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그 원리의 모든 귀결들을 이해해야 하고, 법률적 · 경제적 · 정치적 응용의 갈래들을 모두 이해해야 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공리주의 도덕을 더욱 정밀하게 이해하기 위해 공리주의의 전모를 파악해보려고 한다. 공리주의의 전체를 연구해보자.
공리주의 산조를 하나의 통일체로 파악하는 동시에 내면의 모든 복잡성도 파악하려면 어떤 방법을 택해야 할까? 단순한 모습으로 묘사하기에 적합하도록, 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체가 이미 온전히 정립되었다고 상정하고, 가령 1832년 즈음에 스튜어트 밀 같은 인물이 견지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견해들, 철학적 견해와 사회적 견해, 이론적 견해와 실천적 견해 등등의 합계를 분석하는 작업이 가능할까? 이 방법은 심각한 결함을 안고 있다. 공리주의의 신조를 정리한 진술은 통일성을 드러내느냐 아니면 내적 모순들을 드러내느냐에 따라, 통일성을 드러낸다면 그 산조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자의와 작위가 작용하지 않았는지를, 내적 모순들을 드러낸다면 비판의 작업을 용이하게 만들려는 의도 아래 모순들을 부각하지 않았는지를, 당연히 의심받게 될 것이다. 사실들로 하여금 스스로 발언하도록 내버려두고, 여러 가지 이론들이 각기 어떤 다양한 운수를 겪은 결과로 하나둘 모여 들어가 공리주의라는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철학적 급진주의가 형성된 역사를 개진하는 편이 의심할 나위 없이 나을 것이다. 우리의 연구 주제는 이런 식으로 영국 공중의식의 역사에서 공리주의 선조가 차지하는 중요성 때문에, 의의를 확장한다. 왜냐하면 영국에도 프랑스에서처럼 자유주의의 백 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의 백 년은 바다 건너편에서 산업혁명의 백 년에 대응하며, 사법에 주목하면서 영혼을 강조했던 인권의 철학에는 이익의 동질성을 강조한 공리주의 철학이 대응했던 것이다. 모든 개인의 이익은 동질적이다 — 각 개인은 모두 자신의 이익에 관한 최고의 판관이다 — 그러므로 전통적 제도들이 개인들 사이에 세워놓은 인위적 장벽과, 개인들을 서로로부터 그리고 자신들로부터 보호해줘야 할 필요가 있다는 가정에 기초한 사회적 제약들을 모두 부숴야 한다. 이것은 하나의 해방철학이다. 장-자크 루소의 감성적 철학과는 영감이나 원리에서 아주 다르지만, 응용에서는 여러 면에서 흡사한 해방의 철학이다. 대륙에서 인권의 철학은 결국 1848년의 혁명으로 이어졌다. 같은 시기에 영국에서는 이익의 동질성을 주장하는 철학이 맨체스터학파에 의한 자유거래주의의 승리를 낳았다. 우리는 철학적 급진주의의 역사적 그리고 논리적 기원을 이런 관점에서, 1789년의 원칙들이 형성된 역사를 연구한다고 했을 때와 어느 정도 비슷한 방식으로 연구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연구는 철학의 역사에 들어갈 하나의 장(章)인 동시에 역사의 철학에 들어갈 하나의 장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혹시 연구 주제의 한계를 너무 넓게 확장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연구는 역사적 정황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한 명확한 성격을 부여 받는다고 믿는다. 철학적 급진주의에는 제레미 벤담이라는 위대한 인물이 있었고, 철학적 급진주의라고 하는 산조가 형성되는 시기는 곧 벤담의 철학적 · 문학적 경력과 겹친다. 첫째, 1776년은 미국 혁명이 일어난 해로서, 이 혁명은 유럽에서 일어날 혁명들의 길잡이가 되었다. 1776년은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출판한 해였다. 1776년은 카트라이트 소령이 의회의 매년 소집과 보통선거권을 영국에서 최초로 주장한 해이기도 하며, 이는 후일 급진파와 차티스트들의 강령이 된다. 또한 1776년은 벤담이 28세의 나이에 최초의 저서, 『정부에 관한 단상』을 출판한 해였다. 둘째, 1832년은 영국 최초로 공장 지대에 의석이 할당되고 노동계급에게 일정 범위에서 투표권을 부여하며, 급진파의 견해도 표명되어 나라의 입법에 영향을 미칠 기회가 허용된 개혁의 해였다. 또한 1832년은 일군의 제자들에게 하나의 가부장처럼, 영혼의 지도자로서, 거의 신에 가깝게 (제임스 밀이 사도 바울로의 역을 맡고)숭앙을 받던 제레미 벤담이 84세를 일기로 사망한 해였다. 더구나 벤담이 언제나 밀착했던 주제는 법의 이론적 · 실천적 개혁이었다. 그는 바로 이 영역에서 진정한 발명가였다. 경제와 정치의 체제, 그리고 철학 자체의 개혁을 겨냥했던 급진파가 결국 벤담을 학파의 창시자로 추앙하게 되기는 하지만, 벤담이 그 모든 주제에 관해 새로운 신조들을 창안한 유일한 저자라거나 주된 저자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맬서스의 법칙도 하틀리의 심리학도 벤담의 창안이 아니다. 정치적 급진파의 공리주의 이론을 그가 구축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들의 강령은 벤담의 창안이 아니다. 철학적 급진주의가 형성되는 데는 많은 사람이 기여했고 여러 사정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 사정들은 무엇인가? 어찌하여 1832년 즈음에, 당대 가장 지성적이고 가장 역동적인 부류에 해당했던 수많은 개인들이 공통의 의견과 단체적 선조를 주창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벤담주의 학파의 형성에서 벤담이 수행한 역할은 정확히 무엇이었나? 우리가 해명하고자 하는 역사적 질문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 안에서 명확한 형태로 구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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