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밍 러틀리지: 예수의 마지막 말들 ━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

예수의 마지막 말들 - 10점
플레밍 러틀리지 지음, 손승우 옮김/비아

들어가며

첫 번째 말씀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두 번째 말씀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세 번째 말씀
여자여,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이다. ... 이 사람이 너의 어머니시다.

네 번째 말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다섯 번째 말씀
목마르다.

여섯 번째 말씀
다 이루었다.

일곱 번째 말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부록 1. 십자가에 달린 이의 부활
부록 2. 희망이 사라진 때 희망하기
플레밍 러틀리지 저서 목록

 


Ⅰ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다른 죄수 두 사람도 예수와 함께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그들은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서,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달고, 그 죄수들도 그렇게 하였는데, 한 사람은 그의 오른쪽에, 한 사람은 그의 왼쪽에 달았다.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루가 23:32~34)

그리스도교에서 성금요일은 결정적인 날입니다. 1년 중 결정적인 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계사 전체를 놓고 보아도 결정적인 날입니다. '결정적'crucial이라는 말 자체를 생각해볼 때도 그렇습니다. 이 표현은 '십자가'cross를 뜻하는 라틴어 '크룩스'crux에서 나왔습니다. 웹스터 사전은 '결정적’이라는 말에 대해 이렇게 정의합니다. '최종선택, 혹은 최종심판의 성격을 갖는 것, 가장 치명적이고 중대한 것을 가리킬 때 쓰는 말.' 성금요일은 이런 특징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온 우주, 온 시대의 결정적인 전환점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그분은 교회라는 몸의 머리이십니다. 그는 근원이시며,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이는 그분이 만물 가운데서 으뜸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안에 모든 충만함을 머무르게 하시기를 기뻐하시고,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자기와 기꺼이 화해시켰습니다. (골로 1:15~20) 

하느님께서 옛날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나,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를 통하여 온 세상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하느님의 본체대로의 모습이십니다. 그는 자기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서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그는 천사들보다 훨씬 더 높게 되셨으니, 천사들보다 더 빼어난 이름을 물려받으신 것입니다. (히브 1:1~4) 

이 책에서는 다른 모든 관심사는 잠시 내려놓고 저 놀라운 주장이 어떤 뜻을 담고 있는지를 묵상해보려 합니다.

네 편의 복음서는 나자렛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남기신 말씀을 일곱 개 수록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에서는 성금요일이 되면 저 일곱 말씀을 두고 묵상할 수 있도록 일곱 번의 설교를 진행했지요. 전통적으로 가장 먼저 묵상한 구절은 루가 복음서에 나오는 구절이었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용서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두말할 것 없이, 성금요일은 잔혹한 날입니다. 2,000년 전 성금요일 사건을 주도한 세력은 폴 포트, 이디 아민, 사담 후세인 등 인류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해 죽인 여느 권력자들과 다름없이 잔혹하고 가차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 세계 어디선가 지하 감옥에서 사람들이 사람 대우도 받지 못한 채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죽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충격을 받고 공포를 느낍니다. 비인간적인 행동을 불법으로 간주하는 우리는 그런 행동들이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예수 시대에 십자가형은 불법이 아니라, 오히려 법에 의해 집행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형벌 중에서도 이 십자가형은 사람을 고문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끔찍한 형벌이었는데, 지하 감옥이 아니라 공공장소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정부가 집행하는 형벌이었다는 점이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합니다. 널리 알려진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조차 십자가 처형의 무시무시함을 충분히 전달하지는 못합니다. 십자가형을 실제로 본 적이 없는 우리는 그 끔찍함과 고통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신약시대에 십자가형은 낯선 일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힘이 닿는 모든 곳, 모든 길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이 있었습니다. 제국의 지배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어떤 냄새를 풍기는지, 어떤 소리를 내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완전히 발가벗은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았고, 그들의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며 어떤 악취를 풍기게 되는지를 알았습니다. 짧게는 몇 시간, 어떤 경우에는 며칠 동안 계속되는 그들의 신음과 거친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가장 끔찍한 사실,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아무도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 모든 일이 대중 앞에서 일어났지만, 대중은 그 일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성금요일 예배를 드릴 때 예수의 수난을 재연하며 예레미야 애가의 구절을 붙였습니다. 

길 가는 모든 이여, 이 일이 그대들과는 관계가 없는가? (애가 1:12)

당시 모든 유대인과 이방인은 십자가에 못 박힌 이를 천시하고 경멸했습니다. 십자가는 그 모두에게 보내는 명백한 신호
와 같았습니다. 

당신들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 이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로마인들의 표현을 빌리면 십자가형을 받는 이는 "저주받아 죽어야 마땅한 짐승"이었습니다(오늘날 사람들은 짐승을 이런 식으로 취급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지요). 

본래 십자가형에는 어떤 종교적인 의미도, 어떠한 희망도, 어떠한 영감을 주는 요소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십자가형은 사람들이 ‘음란함'이라는 말의 본래 의미, 즉(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역겹고, 혐오스럽고, 더럽고, 악취가 나며, 구역질 나는" 감정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로마 제국 전역에서 십자가형이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던 때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타락한 범죄자, 저주받은, 짐승만도 못한 자가 하느님의 아들이자 세상의 구세주라 선언했습니다. 이 사실이 가장 중요합니다. 어떠한 기준으로도, 종교라는 기준에서 볼 때는 더더욱, 이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나자렛 예수가 우리의 구세주라는 선언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주장입니다. 이는 인간의 종교적 상상력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주장입니다. 대다수 사람이 받아들이는 영적 관념들로는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라는 낯선 관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문화'에 젖어 있는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예배 때 십자가를 들고 행진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별다른 불편함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심지어 적잖은 이들은 십자가를 목걸이로 만들어 걸기도 하지요. 그렇기에 십자가가 본래 자아낸 공포를 우리가 가늠해 보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현대인들은 십자가를 다윗의 별이나 태극 문양 같은 '종교적 상징'religious symbol으로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십자가는 결코 '종교적'이 될 수 없습니다.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우리는 폭력에 의한 죽음을 영적인 것, 영감을 주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시간이 흐를수록 낭만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잔다르크가 화형당한 모습을 그녀가 경외감에 눈을 뜬 채 불꽃에 휩싸이는 모습으로 묘사하는 작품들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백합으로 둘러싸인, 은은한 빛이 감싸고 있는 십자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부활절' 카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카드를 받고 십자가가 극도로 잔인한 도구였음을 떠올리지는 못하겠지요. 이 런 상황에서 우리는 실제 십자가는 우리를 신앙의 핵심에 이르게 하는 가장 비종교적이고, 영적이지 않은 것임을 이해하려 노력해야만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종교성을 충족시켜 주는 도구가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독특한 사건에 대한 강력한 증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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